98화.
솜 따위로 틀어막은 듯,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일기를 읽었다면 변명도 하지 못한다. 미쳤다는 핑계를 대자니 미치지 않았다는 것도 들켰다. 거짓말을 하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다. 아끼던 누나는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충격받게 하지 않고 말할 방법이 있을까.
벨리타는 짧은 순간에 많은 생각을 해냈다. 결론은 달아날 길이 없다.
인정해야 했다. 벨리타가 숨을 들이마시자 칼이 더 깊이 파고들었다. 살갗에 닿을 거리까지 다가온 칼을 보고 결국 오웬이 마법을 사용했다.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칼이 튕겨 나갔다.
멀찍이 나가떨어진 칼을 보던 데이비드가 이를 갈았다. 혼란과 분노가 점철된 낯으로 한 걸음씩 다가온다. 오웬이 벨리타의 앞을 막아 데이비드를 저지했다.
“비키십시오. 당신과 관련된 일이 아닙니다.”
“조금 진정해 봐. 왜 이렇게 화가 났어.”
진정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삶의 일부였던 누님에 관한 일이다. 벨리타는 이 상황에서 죄인이었다. 입을 여는 것조차 변명이었고 데이비드에게 기만이었다.
데이비드의 어깨를 붙든 오웬이 난처하게 눈썹을 늘어트렸다. 힘으로 찍어 눌러 움직임을 봉쇄하자 데이비드는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저와 누님의 일입니다! 끼어들지 마십시오!”
맞다. 오웬이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해도 끼어들 일이 아니다. 이미 다 알아챈 이상 숨겨 보았자 우스울 뿐이다.
마법을 사용해야 할지 고민하는 오웬을 내버려 두고 앞으로 나선 벨리타가 데이비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씨근덕거리며 분개하는 데이비드의 앞에 마주 섰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무섭다. 죽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여차하면 오웬이 도와주리란 것도 알지만 무서웠다.
강제로 진실에 대면하게 된 데이비드에게 미안해서, 오지랖과 순수한 호의라고 했던 행동들이 교사였다는 죄책감이 무거웠다. 그럼에도 마주해야 한다. 벨리타는 책임을 져야 하는 어른이었고 달아날 수 없었다.
뒤에 바짝 붙은 오웬을 밀어낸 벨리타가 데이비드를 보았다.
“우리 둘이 얘기하자. 갈까?”
침착한 벨리타의 반응마저 화가 난다. 데이비드는 끓어넘치는 분노를 어찌할 바 몰라 하며 주먹을 떨었다. 벨리타는 감히 진정하라는 말도, 괜찮냐는 말도 하지 않았다.
벨리타가 상체를 숙여 일기장을 들었다. 최근에 볼 사람도 없다고 편하게 잠금장치를 하지 않은 벨리타의 잘못이다.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일기장을 꾹 쥐고 데이비드를 지나쳤다.
데이비드가 작게 욕설을 짓씹으며 벨리타를 따라간다. 오웬은 한숨을 뱉으며 혹시 모르니 마차를 준비하라고 하녀에게 지시했다.
임의로 정리된 벨리타의 방으로 들어섰다. 손님방을 정돈한 것뿐이지만 벨리타가 지낼 방이다.
데이비드는 큰 소리가 나게 문을 닫고 벨리타를 쏘아봤다. 협탁에 일기장을 내려놓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일기장을 읽어 봤다면 이미 모든 상황을 짐작하고 있을 거다. 눈치가 빠른 아이다.
“일기 어디까지 봤어?”
“지금 그딴 게 중요합니까? 대체 뭡니까, 당신. 정체가 뭐냐고요!”
혼란스러울 거다. 과거의 잘못에 용서를 구한 것도, 가족이 되도록 도운 사람은 벨리타였다.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벨리타가 아니라. 다른 벨리타였다.
벨리타는 용서해 달라는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기구한 운명의 장난질에 휘둘린 게 잘못은 아니니까.
그래서 벨리타는 사실만 이야기해 주기로 했다. 판단은 모두 데이비드의 몫이다.
“일기가 맞아. 내가 썼고, 난 너의 누나가 아니야. 나는…… 다른 세상에서 왔어. 그곳에서 난 너보다 나이가 많은 딸을 둔 엄마고, 다른 삶을 살았어. 어떻게 여기에, 이 몸으로 살 게 됐는지 몰라. 난…… 돌아가려고 노력했어. 황태자와 결혼하면 돌아갈 수 있을 줄 알고 그렇게 했고, 신력이나 마력을 이용하면 돌아갈 수 있다고 해서 그렇게 했어.”
“그래서 지금 돌아가지 못했다는 소리잖습니까. 이미 일기에 다 적혀 있습니다. 내가 듣고 싶은 건! 내가…… 듣고 싶은 건…… 그게 아닙니다.”
다 적어 놓았으니 이미 아는 사실이었겠지. 오웬과 돌아오기 전까지 생각까지 정리했을 거다. 듣고 싶은 게 따로 있다면 답을 해 주어야 마땅하다.
데이비드가 쿵, 벽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끓다 못해 넘쳐흐르는 감정을 추스를 수 없는 어린 나이니까, 벨리타는 섣불리 입을 열지 않고 데이비드의 말을 기다렸다.
“당신은…… 절 농락했습니다. 제 감정을, 제가 겪은 과거를 우습게 여기고 방만하게 굴었습니다. 제가 누님에게 얼마나……!”
우습게 여긴 적 없다. 돕고 싶었을 뿐이다. 치기 어린 행동이었음을 인정한다. 누님에게 관심받고 싶어 안달이 난 아이를 자신의 동생과 빗대어 보고, 딸을 떠올려 오만하게 행동했다.
소설 속이지만 캐릭터들은 벨리타가 눈을 뜬 이후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벨리타마저 소설 속 인물이 되었다. 겨우 소설 속 캐릭터라고 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그러니 맺어지고 깊어진 관계다. 데이비드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벅찬 숨을 가파르게 내쉬었다. 벌어진 손 틈으로 뜨거운 호흡이 뱉어졌다. 이를 가는 소리가 났다.
“왜 그러셨습니까? 왜 저에게 대신 용서를 구하고 곁에 두셨습니까? 아무것도 모르고 따라다니는 저를 보면서 얼마나 우습고 바보 같다고 생각하셨습니까? 아는 것도 없이 저는……! 저는, 누님과 친해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행복해서…….”
운다. 서럽게 울었다. 데이비드는 양손을 파묻고 원망을 씹어 뱉다가 이내 주저앉고 말았다. 그토록 염원하던 바람을 이루었는데 그마저도 허상이었다.
벨리타는 내심 부러웠다. 적어도 데이비드는 탓할 사람이라도 있었으니. 붙어살다 보니 정이 들었다. 친동생 같기도 했다. 티격태격하면서도 죽이 잘 맞아 즐겁기도 했다.
돌아가지 못해 힘들어하는 벨리타를 돕겠다고 손수 이온을 찾아 데리고 오는 수고로움까지 본래의 벨리타를 위한 애정이다.
데이비드가 틱틱 대면서도 부탁을 들어주고 걱정하며 안달 내는 모든 게 벨리타에게 향한 애정이었다. 현재의 가짜 벨리타가 아닌. 진짜 벨리타를 위한.
괜한 짓을 한 걸까. 몸 주인이 행복해지길 바라서, 처참하게 울고 있는 저 아이가 행복해지길 원해서 한 행동들은 위선이었을까.
“미안. 난…… 벨리타랑 네가 행복해지길 바랐었어. 몸을 뺏은 게 미안해서, 돕고 싶었어. 그뿐이야.”
“감히요. 제 누님의 몸을 빼앗고도 감히. 누구의 행복을 바랍니까. 어떻게…… 어떻게 당신이 감히.”
눈물에 젖은 눈동자가 서슬 퍼렇다. 가득한 악의와 살의가 벨리타를 향했다.
감당할 수 없는 감정에 벨리타는 달아나고 싶었다. 숨고 싶다. 이 상황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벨리타가 입을 꾹 다물자 데이비드가 욕설을 뇌까렸다. 물기가 축축한 얼굴이 일그러진다.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용서를 구하는 것도, 관계가 어찌 되는 것도 전부 제 누님과 제가 해결할 문제입니다. 당신이 아니라. 외부인 따위인 당신이 아니라! 저와 제 누님이요! 알량한 선의로 얼마나 즐거우셨습니까. 남의 불행을 들추고 간섭하면서 얼마나 재미있으셨습니까.”
할 말이 없었다. 사과조차 변명이었다. 행복해지길 바랐는데 끝까지 불행하게 했다. 벨리타가 끼어들어서, 벨리타가 이곳에 와서. 전부 벨리타의 탓.
데이비드가 어깨를 떨며 분노를 삼켰다. 이해할 수 없는 벨리타의 행적이 일기장 하나 읽었다고 들어맞는 것 자체도 화가 났고, 벨리타와 함께 수도 저택에 머물면서 행복했던 기억마저 화가 치밀었다.
새해 선물로 받은 만년필을 차마 쓰지 못해 애지중지 모셨던 스스로에게도 분개했다. 부모님과 가까워지도록 도운 벨리타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졌던 순간마저 증오스러웠다.
“……차라리 떠나십시오.”
이 방법뿐이다. 데이비드가 새어 나오는 감정을 욱여 삼켰다. 턱이 덜덜 떨리고 목소리가 갈라지는데도 데이비드는 입술에 호선을 그렸다. 몹시 격노해서 되레 웃음이 나왔다. 벨리타를 향하는 말과 시선, 공기마저 경멸과 원망이었다.
“보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 부모님께 부모님이라 부르고 찾아뵙는 것도, 저를 마주하는 이 순간까지 모두 기만인 걸 아십니까. 부모님께 제가 변명해 드릴 테니, 이곳에서라도 사십시오. ……오웬과 긴밀한 사이라는 거, 압니다. 혼인하시든지, 열애하시든지 알아서 하십시오. 당신은 제 가족이 아닙니다.”
눈을 마주하는 둘의 가슴은 무너지고 부수어져 바닷가에 떠내려갔다.
이래서 벨리타의 가족한테만큼은 들키고 싶지 않았다. 벨리타를 향한 애정이 너무도 각별하고 애틋해서. 사실을 들켰을 때 받을 원망과 질타가 무겁고 두려워서 숨기고 싶었다.
벨리타가 입술을 이로 물어 씹었다. 찢어진 입술에서 피가 흐른다. 데이비드는 그토록 아끼고 염려하던 누님에게 흐른 피마저 외면했다.
“……그래, 그럴게. 미안해.”
잘못했다고 애원하고 매달렸으면 그나마 나았을까. 사랑하는 누님의 모습을 하고 울고불고 빌었으면 마음만은 편했을까.
데이비드가 헛웃음을 뱉었다. 분노를 참을 수 없다.
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친 데이비드가 몸을 일으켜 방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겨진 벨리타가 힘없이 주저앉았다.
돕겠다고 한 모든 행동은, 그저 한심한 오지랖이었던 거다. 조슈아에게도, 데이비드에게도, 잭슨과 소르니에게도. 불쌍하고 안타까워서 나선 모든 행실은 위선과 농락이었다.
벨리타는 흐르는 눈물로 바닥을 적시며 생각했다.
힘들지만 각자 잘살고 있는 아이들을 망친 건, 모두 자신이 아닌가 하고.
꺼윽, 끅……. 설움에 받친 울음만 샜다. 모든 상황이 버거웠다.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그때 굴러떨어지지만 않았더라면. 돌이킬 수 없는 후회만 곱씹는다.
벨리타가 상체를 수그리고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데이비드의 말이 전부 맞다. 수도에도, 영지로도 돌아갈 수 없다. 오웬만은 벨리타를 받아주겠노라 했으니, 벨리타에게는 오웬만 남았다.
오웬만. 벨리타에게.
*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거칠고 무겁다. 오웬은 마차와 짐을 준비해 두기 잘했다고 스스로를 칭찬했다.
데이비드는 문 앞에 서 있는 오웬을 노려보며 최대한 감정을 억눌렀다. 그럼에도 흘러넘치는 감정을 주워 담을 순 없었다.
“아셨습니까? 알고 계셨습니까.”
“응, 미안.”
“……또, 누가 압니까.”
“나만.”
“하, 둘이 아주 즐거우셨겠습니다.”
어느새 오웬의 앞에 다다른 데이비드가 살의를 가득 담아 노려봤다. 곱게 자란 데이비드는 섣불리 주먹질은 하지 않았다. 그저 손톱에 박혀 피가 배어 나오는 주먹만 힘껏 쥐고 몸을 떨었다.
오웬은 능청스럽게 어깨만 으쓱, 들었다 내렸다.
“다신 보는 일 없길 바랍니다.”
글쎄. 과연. 오웬은 입속에 맴도는 말을 겨우 삼켰다.
데이비드는 준비된 마차를 타고 영지로 떠났다. 단출한 마차가 멀리 사라져 점이 되고, 이내 보이지도 않는다. 오웬은 미련 없이 뒤돌아 벨리타에게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