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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97화 (97/150)
  • 97화.

    맨발에 파고드는 모래가 간지럽고 반가웠다. 이곳에 온 뒤로 체면을 차리느라 맨발로 다닌 적이 없었다. 왜 여기 사람들은 죄 신발을 신고 집구석을 돌아다니는가.

    발을 디딜 때마다 움푹 파고드는 모래사장의 감촉이 좋아서 기력이 쇠할 때까지 걸었다. 오웬이 옆에 붙어 신발을 들어 줬다. 벨리타가 오웬을 잡아끌었다.

    “발 담그자.”

    “조심해, 넘어질라.”

    “잡아주면 되잖아, 네가.”

    그 또한 맞는 말이라 반박할 구석이 없다. 오웬이 허탈하게 웃으며 벨리타를 따라 파도가 치는 바다로 향했다. 맨발에 닿는 차가운 감각. 파도가 다리를 휩쓸고 지나간다. 근래 느껴 보지 못한 생생한 감각이었다.

    죽지 못해 살던 한 달 동안 벨리타는 많은 걸 포기하고 잊고 살았다. 잃어버린 현실을 그리워하며 놓고 있었다.

    지금도 괴롭다. 딸과 거닐었던 정동진의 바다가 그리워서 눈가가 시큰거렸다. 그래도 한 달 전보다는 나아졌다. 확실히 덤덤해지고 있다. 끊임없이 그리워하고 한탄스럽지만 살아가고 있다. 숨을 쉬고 감각을 느끼고 있다.

    상체를 숙여 바닷속에 손을 담갔다. 시원하다. 바닷속에서 일렁거리는 손아귀가 하찮아 보였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을 걸 그랬나.”

    늘어지는 치맛자락을 본 오웬이 낮게 후회했다. 벨리타는 고개를 들었다. 끝도 보이지 않는 바다가 넓어서. 자신 따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등산과는 또 다르게 가슴이 트인다.

    벨리타의 눈이 햇볕과 바다의 빛을 받아 푸르게 반짝거렸다. 오웬은 이 순간을 영원히 남길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얗고 푸르기만 한 공간에서 벨리타의 주황빛 머리가 유독 찬란했다.

    “나, 가족이 있었어. 여섯 남매에 부모님은 내가 열일곱에 돌아가시고, 막내도 사고로 죽었어. 넷째도 군대 갔다가 죽어서 돌아오고. 그때는 열악해서 잘 죽었지. 툭하면 죽는 시대였어.”

    남은 가족끼리 어떻게든 살아 보자고 벨리타는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사회에 뛰어들었다. 아이들을 대학에 보내주고 싶고, 고등학교에 보내주고 싶어서.

    자신처럼 살지 않기를 바랐다. 당연하게 희생했다. 벨리타에게는 희생이 아니었다. 가정을 지키기 위한 필연적인 노력이었다.

    자식 이야기만 했지 본인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던 벨리타였기에, 오웬은 벨리타를 따라 물속에 발을 밀었다. 맨발에 닿는 물과 흙,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개운했다.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가니까 내가 너무 촌스러운 거야. 같이 일하는 언니들은 화장도 하고 염색도 하고, 잘 꾸미고 다니는데 나만 검은 생머리에 화장할 줄도 모르지, 소심해서 대우를 이상하게 받아도 쓴소리도 못 했어.”

    소심한 벨리타는 상상이 안 간다. 오웬이 물끄러미 벨리타를 보았다. 추억에 젖은 눈이 허공을 응시했다.

    오웬은 반사적으로 벨리타의 시선을 따라 허공으로 돌렸다. 파도가 잔잔하게 이는 바다의 끝 편이다. 벨리타가 한 발을 더 내밀어 바다로 파고들었다.

    “식당 일도 하고 공장 일도 했어. 식당에서 전남편이 몇 번이고 싫다는데 만나자고 떼를 써서 만났어……. 그때 처음 돈가스를 먹어 봤어. 놀이공원도 처음 가 봤고, 롤러스케이드도 처음 타 봤어. 처음 하는 것뿐이었는데도 재밌더라. 무식하게 일만 할 줄 알았지, 그렇게 재밌는 건 생전 처음이었어. 그래서…….”

    전남편. 한 번도 입에 올린 적 없던 사람이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벨리타의 남편.

    오웬은 자신도 모르게 벨리타에게 집중했다. 몰랐던 벨리타의 과거.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고 싶었다.

    “결혼했어. 만난 지 3년이 되면서 이 사람이면 괜찮겠다, 싶더라고. 비슷한 형편에 비슷한 나이라서. 뭣도 모르고 결혼했다가 아들 낳고 미치고……. 나중에서야 알았는데 산후 우울증이라더라. 병원 가면 될 일을 무당 찾아가고, 절에 가서 무릎 닳도록 절하고, 교회 가고. 만삭이 되도록 일만 하고 애 낳자마자 일하니 당연히 미치지, 안 미치고 배겨.”

    미쳤었다고. 무당이고 절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말인데도 짐작이 됐다. 신전을 싫어하는 이유를. ‘진수’라는 건 역시 아들이었나 보다.

    오웬은 그저 묵묵히 벨리타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벨리타는 속 시원하게 읊었다. 아들은 심장이 아팠고, 일하고 돌아왔더니 아들이 없어서 미친년처럼 찾아다녔다.

    시댁이 말도 없이 아들을 데려가서 멀리 있는 강원도까지 울면서 찾아갔다. 남편은 남의 편이었고, 아들을 한 번도 돌봐준 적 없었으며, 몇 번이고 홀로 아이를 지워야 했다.

    겨우 딸을 낳고, 남편의 무관심으로 아들이 죽었으며, 원망스러워 이혼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에는 이혼녀가 손가락질을 받았다. 홀로 딸을 악으로 키웠다.

    “딸 앨범이 3권이 넘어. 고구마 먹다가 흘려서 울던 사진, 한겨울에 기어코 눈사람 만들겠다고 기어나가서 코 흘리고 있는 사진, 어릴 때 모습이 너무 생생해. 근데 이상하게 최근 모습은 잘 기억이 안 난다. 제일 기억하고 싶은 게 기억이 안 나. 잔소리하고 화낸 기억밖에 없어. 그냥…… 그거밖에 기억이 안 나.”

    소리도 없이 눈물이 흘렀다. 아들의 얼굴도, 목소리도 생생하다. 딸의 최근 모습만, 그것만 흐릿하다. 다른 모든 게 생생한데. 모두 생경하게 흘러넘치는데 딸의 최근만. 딱 그것만.

    끝없이 흐르는 눈물 탓에 시야가 흐리다. 벨리타의 발이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종아리, 허벅지, 허리까지 젖어갔다.

    오웬은 신발을 모래사장으로 집어 던지고 벨리타를 쫓아 뛰었다.

    “진아야, 내가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벨리타!”

    목 끝까지 잠겨온다. 이대로 잠겨 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다를 끊임없이 헤매다 보면 언젠가 죽고 또 죽고 나서야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지 않을까.

    가슴이 트이던 이유가 이 때문이었나 보다. 정말 죽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몸의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판국에 견디기만 하기는 버거웠다. 바닷속에서 마음 편히 눈 감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코 밑까지 물이 차오른다. 벨리타는 눈을 감고 걸었다. 그리고 건져졌다. 오웬의 마법이 벨리타의 몸을 휘감고 물속에서 건져냈다.

    바다 위로 몸이 떠오른 벨리타가 눈을 떴다. 언제나 실패였다. 으레 그랬듯이. 또 죽지 못했다.

    벨리타를 모래사장까지 끌어온 오웬이 하얗게 질린 낯으로 소리쳤다. 벨리타에게 닿지 않는다.

    “왜 그래, 내가 앞에 있는데. 왜……! 그러지 마. 제발, 제발 그러지 마.”

    냉혈한 오웬에게서도 눈물이 흘렀다.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서 버거워하는 모습에 억장이 무너졌다. 가슴이 떨어져 나가 바다 위를 표류한다. 단정한 호박빛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흘러 모래사장을 적셨다.

    오웬이 축축하게 젖은 벨리타의 몸을 힘주어 끌어안는다. 괜찮아진 줄 알았다. 이온을 만난 후로 회복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오웬이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박탈감과 허무. 상실감은 벨리타를 완전히 좀먹었다. 괜찮다가도 돌연 죽음을 갈망하게 되는 상실이었다.

    오웬이 벨리타의 몸을 붙들고 소리 내어 울었다. 벨리타는 허망한 눈을 끔뻑거렸다.

    “죽으려고 하지 마. 제발. 내가 다 잘못했어. 내가 널 늦게 돌려보낸 탓이야. 다 내 잘못이야. 미안해, 벨리타. 제발…….”

    오웬의 탓이 아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르고 이미 망가진 몸은 일찍 돌아간다고 해서 회복되지 않는다. 벨리타의 탓이었다. 차라리 오웬의 탓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벨리타가 축축하게 젖은 팔을 들어 오웬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보랏빛의 머리카락이 물기를 머금기 시작한다. 벨리타를 위해 울어 주는 남자.

    오로지 벨리타를 위해. 세상이 무너질 듯 우는 사랑하는 사람.

    벨리타는 와중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얘 탓에 죽지도 못하겠다.

    벨리타가 오웬의 날개 뼈를 가볍게 토닥거렸다. 몸의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만 버텨 보자. 벨리타는 자신을 위해 울어 주는 남자와 연애 한 번은 뜨겁게 불태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미안, 나도 모르게. 이제 괜찮아. 안 그럴게. 네가 있는데 왜 죽겠어.”

    “하지 마……. 죽지 마. 나랑 있어 줘. 네가 얼마나 힘들지 나는 감히 모르겠지만, 그래도 견뎌 줘. 응?”

    언제나 능청스럽고 능글맞게 웃기나 하던 오웬이다. 철저하게 물러서서 관망하고 즐기던 심보 고약한 녀석이 벨리타에게 안겨 울고나 있다.

    벨리타는 섣불리 견디겠노라 답하지 않았다. 수시로 우울에 갇혀 끝없이 가라앉는 처지에 호언장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벨리타는 그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오웬의 어깨를 쓸었다.

    “노력할게. 아줌마 믿지?”

    “……누가 아줌마야. ……믿어. 그러니까 나랑 같이 나아지자. 나랑 같이.”

    “그래. 그러자.”

    아직도 햇볕은 쨍쨍하고 바다는 언제나 그랬듯 넘실거린다.

    벨리타가 오웬에게 입술을 문질렀다. 오웬이 눈물을 훌쩍거리며 벨리타의 허리를 붙잡고 입을 맞췄다.

    *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는 오웬은 달래고 뽀뽀도 실컷 해 주고 나서야 울음을 그쳤다. 마을 시장에서 파는 찐 감자를 사 먹이고 오웬의 손을 잡고 돌아왔다. 이것도 나름대로 데이트가 아닌가.

    벨리타는 아직 눈가가 부은 오웬의 눈을 문질렀다. 오웬이 그만 놀리라며 투정을 부렸다. 귀여운 녀석. 벨리타가 작은 저택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응접실인지 거실인지 모를 공간에 책을 읽고 앉아 있던 데이비드가 고개를 들었다. 여느 때였으면 왔냐며 손이나 휘저었을 데이비드가 거칠게 책을 내려놓았다.

    혼자만 떼놓고 나와서 토라졌나. 벨리타가 간식으로 사 온 찐 감자를 들었다. 데이비드의 눈매가 사납다. 영지 저택에서 처음 만났을 때도 이토록 매서운 눈을 하지는 않았다.

    데이비드가 읽고 있던 책을 덮자 익숙한 표지가 드러났다. 일기였다. 몸 주인을 위해 이따금 쓰고 있던 일기. 아직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최근의 일까지 적혀 있었다.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마저도.

    벨리타의 가슴이 얹힌 듯 가라앉았다.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벨리타가 테이블에 찐 감자를 올려놓았다.

    미묘한 분위기. 날이 서 있는 데이비드의 눈초리에 오웬이 벨리타의 앞에 섰다.

    “무슨 일이야? 처남, 왜 이렇게 심통이 났어.”

    처남 소리 하지 말라며 화를 내야 데이비드였음에도 아무 말 없이 벨리타를 노려본다. 악의와 분노가 가득 담긴 시선이었다.

    데이비드가 일기를 들어 벨리타를 향해 집어 던졌다. 벨리타의 발치에 떨어져 뒹굴었다.

    “누굽니까, 당신.”

    심장이 내려앉는다. 결코 들키고 싶지 않았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본래의 벨리타를 알고 있는 사람. 누구보다 원하고 있을 사람이다.

    벨리타가 숨을 들이켰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 머리가 멍하고 가슴이 울렁거린다. 손끝이 차갑게 식는 감각이다. 짐 속에 숨겨 두었을 텐데, 어떻게 알았지. 어디까지 읽었을까.

    “누님이 아니면, 당신은 뭡니까.”

    호신용 장검이 벨리타를 향했다. 날카롭고 매서운 칼끝이 벨리타의 목을 노린다.

    어떡하지. 변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목 안쪽이 막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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