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아버지의 마지막 말은 자식을 죽이려고 했던 새어머니의 안위를 묻는 것이다. 어떠한 감상도 들지 않았다.
황후는 이미 포위되었다. 황후의 궁에 쳐들어가 포박하여 알현실로 끌고 오는 중이라고 했다.
잭슨은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검 끝으로 바닥에 나뒹구는 황관을 들어 올렸다. 전투는 끝났다. 황후와 에르테를 잡아들여 목을 베면 모든 게 끝이 난다.
피곤하지도 않다. 지치지도 않았다. 끝이라는 해방감이 들뜨게 했다.
쿵, 묵직한 소음에 잭슨이 근원지로 시선을 돌렸다. 황후와 조슈아였다. 저 녀석은 왜 여기에. 잭슨이 인상을 찌푸렸다.
피가 엉망으로 튄 눈가를 손등으로 문지른 잭슨이 계단을 내려왔다. 몸이 결박되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황후와 조슈아를 둘러싼 길드원들이 잭슨이 다가오자 한 걸음 물러났다.
“네가 기어이 모든 걸 부수고야 마는구나.”
악에 받친 황후가 분노를 씹어 뱉었다. 잭슨의 입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부추긴 건, 당신입니다.”
“내 자식 황위에 앉히고자 하는 것도 죄가 되나? 내 아이, 내가 잘 키우겠다는데!”
와닿지도 않는 외침이었다. 잭슨은 황제의 머리를 발로 건드려 황후의 앞까지 굴렸다. 이를 본 황후의 비명이 알현실을 가득 채웠다.
“죽어 마땅할 놈! 네가, 네까짓 게 감히……!”
“2황자도 곧 올 겁니다. 함께 보내드리려고 했지만, 아쉽게도 먼저 목을 내놓으셔야겠습니다. 그래도 서운해 마십시오. 사랑하는 남편이 곁에 있지 않습니까, 이미 죽었지만.”
아아악! 황후의 애처로운 비명이 잭슨을 향해 원망으로 돌아갔다. 조슈아는 그저 가만히 앉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잭슨은 조슈아가 있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았다.
잭슨이 주저 없이 칼을 들었다. 비명이 시끄럽고 거슬려서 듣고 싶지 않았다. 원수와 다름없는 황후를 죽이면 기분이 썩 개운할 것 같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황후와 황제의 목이 계단 아래에서 뒹군다. 그 위에 선 잭슨은 무감한 눈으로 알현실을 둘러보았다. 황실 문양을 담은 천까지 피로 젖었으니 정리하려면 시간이 꽤 걸릴 터다.
“2황자를 끌고 와라. 이미 달아났을 수도 있으니 끝까지 추적해.”
길드원들이 고개를 조아리며 떠났다. 알현실에 남은 인원이 반으로 줄었음에도 잭슨은 제 안위를 걱정하지 않았다. 스스로가 강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잭슨이 검을 털어냈다. 피가 우수수 바닥에 흩뿌려졌다.
“너, 에르테를 빼돌렸지.”
매서운 눈초리가 조슈아를 향했다. 바닥에 앉아 피로 범벅이 된 조슈아가 순한 미소를 지었다.
잭슨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언제나 벨리타를 예의주시하고 있는 조슈아는 수도 저택에 이상이 있자 곧장 에르테를 찾아와 빼돌렸다. 파텔가의 수도 저택에서 사용인들이 우르르 빠져나가는 건 흔히 있는 일이 아니니까.
잭슨이라면 분명 벨리타를 먼저 달아나게 했겠지.
조슈아가 길게 숨을 뱉었다. 삶에 후회는 없다. 살고 싶어 악착같이 살았으나 이 상황마저도 자신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결과다. 비참하지 않다. 벨리타를 만나고 늦게나마 짧은 순간 인생을 즐겼다.
벨리타와 함께 올랐던 산, 벨리타와 함께 거닐었던 무르펜, 그를 위해 준비했던 팔찌를 직접 채워 주었던 순간, 파티에 찾아와 선물을 안겨 주고 소소한 간식거리를 사다 건네주던 따사로운 미소.
테라스에서 받은 구원은 조슈아를 살게 했다. 그 순간부터 조슈아는 벨리타의 종이었으며 신자였다.
조슈아가 고개를 숙였다. 크라바트를 장식한 장신구가 화려하게 반짝거렸다. 오늘 일을 끝마치고 벨리타를 찾아가려고 했다. 어디로 숨었을지 모를 그를 찾아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다.
직접 골라 준 이 장신구를 하고, 선물의 쓰임을 확인한 벨리타가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면 자신이 지지하던 2황자가 무너져도 행복할 것 같았다.
조슈아는 잭슨이 궁에 들이닥친 순간부터 직감했다. 작은 바람조차 불가능하다는 걸. 마지막으로 본 벨리타의 얼굴이 수척했던 게 마음에 걸린다.
“전하, 아니, 황제 폐하.”
“널 살려둘 생각 없다.”
“알아요. 목숨을 구걸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긴 머리를 늘어트린 조슈아가 고개를 들었다. 벨리타 앞에서 보였던 순한 낯은 온데간데없이 차갑게 가라앉은 서늘한 얼굴로 잭슨을 마주 보았다.
*
식사는 맛있었다. 근래 자주 먹지 못한 생선으로 거하게 차려 먹었다. 벨리타는 창문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바다를 눈에 담고 있었다.
차를 직접 내리던 오웬이 벨리타를 부르려고 입을 열었다가 어깨를 두드리는 데이비드의 손길에 입을 다물었다. 데이비드는 짐짓 굳은 낯으로 오웬을 보았다.
“왜? 이 김에 아카데미도 안 가고 좋지 않아?”
“그따위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능청스러운 미소를 띠던 오웬이 눈을 가늘게 떴다.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오웬을 탐탁지 않게 바라본 데이비드가 한숨을 길게 쉰다. 먼발치에 있는 벨리타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황태자가 일을 쳤습니까. 황위를 가지려고.”
“맞아. 황태자보다 공녀가 먼저 와서 귀띔해 줬지만.”
“공녀가 말입니까? 어느새…….”
찻잔에 차를 따르던 오웬이 기억을 떠올렸다. 아무도 들이지 않으려고 문을 걸어 잠갔던 저택의 문을 두드리던 소르니가 오웬을 찾았었다. 벨리타를 보지 못해 안달이 나 있었던 소르니였지만 그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다고 했었다.
흥미로운 일이라는 걸 직감한 오웬이 소르니와 정원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아무도 듣지 못하게 마법으로 소리를 차단하고.
“곧 황궁에서 피바람이 불 거란다. 난 황후가 되지 않을 거고, 전하를 도운 보상으로 백작 작위를 받을 거야. 이미 말은 끝났단다.”
“고작 그런 얘기 하려고 불렀어요? 관심 없는데.”
공녀가 가문을 떠나 백작이 된다는 건 전혀 관심사가 아니었다. 오웬은 황궁에서 피바람이 불 거라는 말에서 이미 생각을 정리했다.
백작 작위를 받는 것보다 공작가의 일원을 몰살해 공작 작위를 차지하면 편하지 않나, 따위의 생각을 잠시 하기는 했다만 공녀에게 관심은 없었다. 오웬은 평민이었고 귀족들의 사정에 무관했다.
소르니는 버럭 소리치며 오웬을 다그쳤다.
“피바람이 불면 어찌 되겠니. 누가 에르테의 세력인 건 잊은 거야?”
파텔 후작. 오웬이 허탈하게 웃었다. 소르니가 백작 작위를 받았다는 말을 한 이유가…….
헛웃음을 뱉은 오웬이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단정한 눈이 웃음기를 가득 담았다.
“가문이 무너지면, 벨리타를 공녀님 아래로 들이려고요?”
“후작의 아들도 몸이 성하리란 보장이 없지. 전하라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게 분명하고. 내 아래로 들이지는 않을 거란다. 도움을 줄 뿐.”
부채로 입을 가린 소르니가 작게 목소리를 냈다. 입 모양을 보이지 않으려는 버릇이었다.
붉은 머리를 시원하게 틀어 올린 소르니가 반짝거리는 주황색의 귀걸이를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모두 빼앗고 벨리타를 가질 심산이야. 후계 교육도 받지 못한 벨리타가 가주가 되면 전하가 전부 삼킬 거란다. 뻔해. 전하가 생각하는 게 다 거기서 거기지.”
잭슨과 소르니가 약혼한 지 5년이 되었다. 가까운 사이는 아닐지언정 곁에서 본 세월이 있었다.
소르니 또한 눈치가 빠르고 기민하니 잭슨의 속을 진작 꿰뚫었을 것이고, 영민한 머리로 그럴듯한 추측을 했을 거다.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다. 황제가 된 잭슨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오웬은 소르니와 만난 후 고향으로 가 오웬의 어머니에게 소식을 전하고 별장을 비웠다.
그것이 데이비드를 부득불 챙겨 데려온 이유였다. 데이비드가 가주가 되면 벨리타는 스스로를 지킬 여유가 생긴다. 효녀를 뒀네.
오웬이 벨리타를 곁눈질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벨리타는 그새 근육이 붙기 시작한 몸이 욱신거려 다리를 주물렀다. 아무렇지 않은 낯으로 마저 차를 따른 오웬이 대꾸했다.
“소르니 공녀, 벨리타한테 효녀잖아. 조심하라고 말해 주고 가던데.”
효녀가 갑자기 왜 나오는지. 데이비드가 인상을 찌푸렸다가 잭슨마저 아들로 만들어 버리고 마는 오웬의 심성을 떠올리고 얼굴을 구겼다.
“저는 영지로 돌아가야 합니다. 부모님을 두고 이곳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벨리타는 혼자 둬도 되고?”
말을 잇지 못했다. 오웬을 신뢰하고 있지만 벨리타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부모님을 돕겠다고 아픈 누님을 홀로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날카롭게 데이비드의 틈을 찌른 오웬은 태연한 낯이다. 간혹 가다 얄미워 죽겠는 오웬에게 주먹다짐을 할 수도 없어서, 데이비드는 짜증 가득히 머리를 헤집었다.
“며칠 뒤에 떠나겠습니다.”
“며칠 뒤면 다 같이 가도 괜찮겠네.”
잭슨이라면 세력 정리까지 빠른 시일 내에 끝낼 거다. 데이비드와 오웬은 잭슨을 어렴풋이 파악하고 있었다.
데이비드는 챙겨 온 서적을 꺼내 소파에 걸터앉았다. 차는 됐고 둘이 나가서 바다나 구경하고 오라는 데이비드의 배려 넘치는 권유에 오웬은 찻주전자를 내려놓았다.
“고마워, 처남.”
“미쳤습니까?”
튕기기는. 오웬이 장난스럽게 윙크를 하자 데이비드가 책을 던지는 시늉을 했다.
오웬은 가만히 앉아 있던 벨리타의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인기척을 느낀 벨리타가 앞에 앉은 오웬을 확인했다.
“바다 보고 싶지 않아?”
“보고 싶어.”
가자. 양팔을 벌린다. 벨리타는 조용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오웬이 벨리타를 끌어안고 일어섰다. 벨리타의 발끝이 바닥에 겨우 닿는다.
짜증 나게 하지 말고 빨리 나가라는 데이비드의 축객령을 뒤로하고 벨리타와 오웬은 손을 마주 잡고 작은 저택을 나섰다.
초여름 같은 바람이 살랑거렸다. 나무와 수풀도 푸르게 자라 초여름이었다. 분명 5월임에도 날이 기분 좋게 따뜻했다. 신발에 닿는 흙바닥의 감촉이 좋아서 벨리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래로 보이는 작은 마을에 장이 서서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그 너머의 바다. 맑고 파란 바다가 지평선 너머로 넘실거렸다.
“무리하지 말자. 몸 아프면 바로 얘기해 줘.”
“응. 바다 둘러보고 시장에서 먹을 거나 사 먹을까?”
“네가 원한다면.”
아무도 모르는 외지로 오니 마음이 편했다. 딸의 손길이 닿았다는 감각마저 흐려졌다.
바다와 하늘은 여전히 푸르고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딸이 만들고 움직이던 등장인물들이 눈앞에 없어졌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굉장히 개운했다. 그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괴로워지고 숨이 막혀 왔으니까.
벨리타는 손목에 차고 있는 팔찌를 들여다봤다.
차마 빼지 못해서 언제나 차고 있는 팔찌. 조슈아가 공을 들여 가져온 팔찌를 빼낼 수 없었다. 은연중에 정이 들었나 보다. 생각해 보면 가장 많이 챙겨 주고 아껴 주기는 했다. 처음 만났던 등장인물이었고 동정을 자극하던 아이였으니.
벨리타가 모래밭에 발을 디뎠다. 구두에 모래가 자꾸 들어와서 신발을 벗어 양손에 쥐었다.
드넓은 바다. 빠져 죽어도 모를, 푸르고 깊은 바다다. 넋을 놓고 보았다. 팔을 잡아 지탱해 주는 오웬에게 몸을 기댔다.
그냥 이대로, 이곳에서 살아도 괜찮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