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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95화 (95/150)
  • 95화.

    “목적지는 내 별장.”

    인정한다. 실없는 소리에 뜬금없는 발언이라는 걸. 벨리타의 표정뿐 아니라 모두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도 봤다. 오웬은 단정하게 추스른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헤집었다.

    데이비드가 미묘한 기류를 감지하고 스푼을 내려놓았다. 그간 지켜봐 온 오웬은 성급하고 충동적인 사람이 아니다. 데이비드는 벨리타가 독을 먹고 쓰러졌을 때 침착했던 오웬을 떠올렸다.

    그 이후 황태자에게서 벨리타를 데려오기 위해 들이닥치려던 모습도 생각났다. 이유 없이 갑작스럽게 행동할 사람이 아니다. 벨리타를 위해서 나섰으면 나섰지, 괜히 여행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을 거다. 편지의 내용이 심상치 않았을 거다. 데이비드는 정확히 모르는 일이지만 오웬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오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당장 채비하겠습니다. 엘라, 짐을 챙겨 주시고 마차를 준비시키십시오. 한시가 급하니 쉽게 살 수 있는 물건은 챙기지 않아도 됩니다. 누님은 가서 돈을 전부 가져오십시오. 그리고 이온.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지만 돌아가 주셔야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막힘없이 쏟아지는 지시에 모두가 다급하게 움직였다. 처음 먹는 비싼 음식을 먹고 체할 기분이 들었다가, 휘몰아치는 상황 탓에 가만히 앉아 있던 이온은 고개를 거듭 끄덕거렸다.

    오웬이 마차에는 이온을 태우고, 마법으로 순간이동하겠다며 서두르라고 채근했다.

    데이비드는 영지로 갈 요량이었다. 아카데미에서도, 사교계에서도 황궁 안에서 피바람이 줄 조짐이 보인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2황자를 지지하는 귀족들이 하나씩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고 남아 있는 측근들이 기사단을 재정비한다는 소식이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영지에 가서 2황자의 세력인 아버지와 함께 황태자를 끌어내릴 준비를 해야 했다. 데이비드가 담당 하녀에게 자신은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자마자 오웬이 소리쳤다.

    “어딜 가. 너도 가는 거야. 빨리 준비해.”

    “예? 하지만…….”

    “데이비드 네이선 파텔. 더 미룰 수 없어.”

    짙게 가라앉은 호박색의 눈동자가 차분하게 반짝였다. 데이비드는 기이할 정도로 침착한 오웬의 모습에 움찔, 몸을 떨었다.

    벨리타도 묘한 분위기를 눈치채고 자리에서 일어나 데이비드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데이비드의 고개가 돌아갔다. 굳은 얼굴의 벨리타가 데이비드도 함께 가자며 졸랐다.

    “언니, 언니도 같이 가면 좋겠지만…….”

    “됐어. 난 가서 내 가게 해야 돼. 높은 분들은 높은 분들만의 일을 해결하시고.”

    이온에게까지 피해가 갈 일은 아닐 거다. 벨리타는 하녀에게 지시해 이온의 짐을 준비시키고 마차에 태우라고 했다. 모두가 바삐 움직였다.

    이온이 벨리타의 등을 끌어안아 가득히 감쌌다. 애정이 느껴지는 따뜻한 품. 벨리타는 이온의 등을 마주 감쌌다.

    “정신 꼭 붙들고 살아. 알았어? 또 만나러 올 테니까 멀쩡해야 한다.”

    현 상황을 모르지 않은 이온이 몇 번이고 당부했다. 전쟁이 일어나면 애먼 사람도 피해를 보고 죽어 버리고 만다. 이온은 벨리타가 피해를 입지 않기를 바랐다. 평민일 뿐인 자신은 휘말려 죽더라도 팔자겠거니, 하겠다만 벨리타는 아니지 않은가.

    살가운 걱정과 염려에 벨리타는 은은한 미소를 걸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빠르게 준비한 이온은 마차를 타고 홀연히 떠났다.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보며 벨리타가 주먹을 쥐었다. 수도 저택에 있는 사람들은 벨리타가 모은 사람들이다. 소설 속 벨리타가 아닌 벨리타 스스로가 모아 곁에 둔 사람들. 그 사실만으로도 큰 위안이 됐다.

    오웬이 벨리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벨리타가 오웬을 돌아봤다. 떠날 채비는 끝났다. 일기도 챙기고 돈도 다 챙겼다. 엘라도 고향으로 돌려보냈고, 수도 저택의 인원은 최소한만 남기고 휴가를 주었다.

    오웬과 벨리타, 데이비드만 응접실에 모여 무거운 가방을 들었다. 오웬이 처음 보는 지팡이를 들고 바닥에 술식을 그렸다. 셋의 이동까지는 오웬도 버거운 모양이었다.

    복잡하고 어려운 술식은 금방 끝이 났다. 좌표까지 적어 넣은 오웬이 벨리타와 데이비드의 팔을 잡았다. 술식에서 빛이 퍼진다.

    벨리타는 정신없는 현재의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외부와 차단되어 있는 벨리타로서는 오웬과 데이비드가 급박하게 움직이는 이유도 몰랐다. 그저 휘둘리는 대로 휘말렸다.

    눈부시게 퍼지던 빛이 수그러들자 셋은 사라져 있었다. 술식도 남아 있지 않았다. 넓고 화려한 응접실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황량하게 비었다.

    물이 흐르는 소리. 파도가 치는 시원한 소리가 들린다. 벨리타는 주위를 둘러봤다. 수도 저택보다 작은 저택. 뒤에 펼쳐지는 작은 마을과 넓은 바다. 수도보다 더운 날씨다.

    마중 나온 하녀와 하인 몇 명이 짐을 들고 안으로 안내했다. 벨리타가 바다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소설 속이어도 바다는 똑같았다.

    “식사를 제대로 마치고 산책 겸, 바다를 갈까?”

    살가운 오웬의 목소리였다. 벨리타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유려한 손가락이 벨리타의 어깨를 감싸 저택 안으로 끌어당겼다. 내부는 깔끔하고 단출했다. 다른 귀족들의 저택과는 다르다.

    두리번거리며 내부를 감상하던 벨리타가 드디어 미묘한 이질감을 감지했다.

    당연하게 로브를 건네고 하인에게 툭, 명령을 뱉는 오웬. 암묵적인 연인 관계까지 발전할 동안 벨리타는 오웬의 성도 몰랐다. 오웬이 마탑주의 자식인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

    신분이야 벨리타가 살던 현실에서는 중요하지 않았으나 이곳에서는 중요하다. 그저 평민인 줄 알았다. 옷차림도 그렇고 격의 없는 말투도 그랬으니까.

    “난 평민 맞아.”

    입 밖으로 내뱉었던가? 벨리타가 입을 앙 다물었다. 분명 소리를 내어 말한 적도 없는데 귀신같이 속마음을 읽어버리고야 만다.

    오웬이 벨리타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아버지가 귀족이지, 난 아니야.”

    몸 주인의 기억으로 되짚었다. 분명 귀족은 세습제인데 가족 중 한 명만 귀족이라면.

    “일대 귀족이십니다. 그러니까 오웬의 아버지, 세드릭 메이지께서 남작 작위라는 말입니다. 마탑주의 신분으로 전쟁에 큰 기여를 했다고 합니다.”

    손가락을 휘적거리며 오웬을 가리켰다가 허공을 가리킨 데이비드가 친절히 설명해 줬다. 이 썩을 놈의 나라, 아니 제국은 전쟁이 무슨 놀이인 줄 아나. 허구한 날 싸움질이다.

    이해한 벨리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상치도 못하게 오웬의 신분과 성까지 알아 버린 벨리타가 오웬의 팔을 붙잡았다. 조금 서 있었다고 그새 지치는 몸이 조금 야속했다.

    오웬이 벨리타의 무릎 뒤로 손을 넣어 안아 들었다. 안정적으로 받친 등과 무릎 뒤가 편할 지경이어서, 벨리타는 얌전히 오웬에게 안겼다. 데이비드가 질린다는 낯을 했다.

    오웬은 이 집은 연구를 위한 별장이며, 저택에는 아버지와의 불화가 있어 가지 못하는 걸 이해해 달라며 불쌍한 체를 했다. 오웬도 사실 불우한 과거가 있었던 걸까, 벨리타가 안쓰럽게 보았다.

    술식 하나 가지고 싸우다가 저택 한 부분을 날려먹은 후로 서로 토라져 있는 상태라는 걸 모르는 벨리타는 오웬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지켜보는 데이비드로서는 꼴값이 아닐 수 없었다.

    *

    피 냄새가 코를 찌른다. 복도와 곳곳에 쌓여 가는 시체들이 발에 차여 굴렀다. 비명이 찢어진다. 익숙한 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끊임없이 퍼졌다.

    잭슨은 피가 흐르는 검을 휘둘렀다. 황실 기사의 목이 떨어져 나가 바닥을 굴렀다. 시간을 주면 달아나고 대비할 여력만 주는 꼴이다. 단번에 몰아넣어 치워야 했다. 살덩이가 달라붙은 검을 무심하게 털어냈다.

    장기전으로 가도 우세하지만 번거로울 뿐이다. 잭슨은 돌연 황궁에 들이닥쳐선 자신을 막아서는 기사들을 베고, 산하에 있는 기사단과 길드를 거느린 채 주저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눈에 띄면 죽고 막아서면 도려낸다. 잭슨이 지나간 길은 피로 웅덩이가 졌다. 황제가 알현실에 있다고 하던가. 뒤따르는 이들을 이끌며 닥치는 대로 베었다.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황태자. 결코 성군이 되지 못할 재목. 익히 들어 알고 있다. 그렇게 자랐으니 누구보다도 잘 안다.

    황제의 자리를 원한 적 없었다. 되어야 하기에 황태자가 되었고, 살기 위해 황좌를 노린다.

    제국에 애정도 없다. 살아야 하니까 살아갈 뿐이고, 해내어야 하기에 해낸다.

    잭슨이 알현실 앞을 틀어막은 기사들을 내려다봤다.

    “비켜라.”

    “반역자를 잡아라!”

    듣지도 않는군. 잭슨이 신경질적으로 검을 휘두르자 뒤에서 기사들과 길드원들이 쏟아져 나왔다. 서로를 베고 찌른다. 역겨운 소리가 신경을 긁는다.

    잭슨은 지지 않는다. 무조건 승리를 쟁취한다. 그렇게 살아왔다. 기사들과 길드원들이 한데 뒤엉켜 칼을 겨누고 악을 쓴다.

    잭슨은 무리를 뚫고 알현실의 문을 박찼다. 잭슨을 쫓아 황실 기사가 칼끝을 겨누었다.

    소름 끼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기사의 칼이 날아가 바닥에 추락했다. 곧이어 목이 떨어진다. 얼굴에 피가 범벅이다. 잭슨은 무심코 손등으로 얼굴을 문질렀으나 손도 피투성이라 더 번지기만 했다.

    알현실 내부에 일제히 검을 겨누는 기사들과 마법을 시전하려는 마법사들이 잭슨을 향했다. 불이 피어오르고 번개가 내리치며 성대하게도 알현실을 어지럽혔다.

    길드원들이 뛰쳐나와 잭슨을 둘러싼다. 마법을 쓸 수 있는 자는 황궁에만 있는 게 아니다. 문을 막고 있던 기사들은 이미 시체가 되어 복도를 채웠다. 수적으로도 잭슨이 우세하다.

    지키는 자들로만 구성된 황실 기사단과 죽이는 자들로만 메워진 길드 중 누가 승리를 거머쥘까. 당연히 잭슨이다.

    살의를 담아 전투하는 이들을 뒤로하고 달아나려는 황제의 목덜미를 잡아 바닥에 처박은 잭슨이 사납게 웃었다.

    “폐하.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태자…….”

    “정 없게 그러지 마십시오. 그래도 아들인데.”

    철저한 방관자. 잭슨의 어미가 학대를 일삼고, 잭슨이 기어코 어미를 죽여도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방치. 그래도 밉지는 않았다. 원망도 하지 않았다. 고스란히 황위를 물려주었다면 편안한 노후를 보냈을 황제.

    잭슨이 피와 살점이 덕지덕지 붙은 칼을 휘둘러 털어냈다. 잭슨과 황제에게 피가 튀었다. 황제의 낯이 새파랗게 질렸다.

    어떠한 관계도 아니다. 황제와 잭슨은 그저 피로만 이루어진 남이었다. 죽어도 아무렇지 않을 사이. 그러니 황제도 죄책감 없이 황후에게 넘어가 잭슨을 끌어내릴 술수를 벌이지 않았나.

    황제는 목숨을 구걸했다. 처절하게 살려 달라며 잭슨의 갑옷을 붙들고 매달렸다.

    “황제가 되고 싶다면 되거라. 황위를 네게 주마.”

    “이미 제 것입니다.”

    “꼭 이래야만 했냐. 황후는, 엘리제는 어디에…….”

    말도 끝마치지 못한 황제의 목이 알현실의 계단을 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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