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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94화 (94/150)

94화.

좋은 시간이었다. 정말, 좋은 시간이었다. 벨리타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웬이 마른 벨리타의 볼을 부드럽게 문지르다 번쩍 안아 올렸다.

벨리타의 머리가 오웬의 위로 솟았다. 허벅지를 두른 팔이 단단히 벨리타를 받친다. 뒤로 넘어갈까 봐 본능적으로 오웬의 어깨를 붙들자 기분 좋은 웃음이 터졌다.

즐거운 시간을 보낸 건 벨리타였는데 오웬이 기뻐 보였다.

“좋았으면 됐어. 이온 씨가 너 준다고 디저트를 한가득 만들었더라. 내일 밥 먹고 먹어.”

“……응. 그럴게.”

“이온 씨가 수도를 엄청 궁금해한대. 내일 같이 가서 산책도 하고 오면 좋을 거 같아.”

“……그래.”

다부진 몸이 벨리타를 안은 채 성큼성큼 걸어 계단을 올라 벨리타의 방에 들어선다. 벨리타가 회복했다는 것을 대놓고 기뻐하지는 않았지만 온몸에서 티가 났다.

벨리타는 침대에 자신을 내려주고 돌아가려는 오웬을 붙잡았다. 이유가 있지도 않았다. 그저 잡고 싶었다. 아직은 보내고 싶지 않았다.

로브가 붙들리는 감촉에 오웬이 뒤를 돌았다. 침대에 앉은 벨리타가 꽤나 생기 있는 낯으로 오웬을 올려다보았다.

오웬은 꽤 난처했다. 그렇게 귀엽게 쳐다보면 심장이 아프고 그런다. 뽀뽀로 혼내 주고 싶게 귀엽고 난리다.

귀여운 벨리타는 기력이 쇠한 팔을 당겨 오웬을 자신의 앞까지 끌고 왔다. 예상치 못한 힘에 휘둘려 오웬이 벨리타의 코앞까지 도달한다.

쪽.

혼나는 건 오웬이었다. 한 달간 무보수 간병의 값인가? 날아갈 듯한 기분과 당황이 뒤섞여 얼굴만 붉어졌다.

벨리타를 가운데에 두고 양팔로 가둔 오웬이 상체를 숙였다. 벨리타는 지친 낯으로 입꼬리만 올렸다.

“갑자기 뭐야? 나 놀라서 심장 떨어졌어.”

“주워 오면 되잖아.”

말장난까지. 벨리타의 상태가 꽤 나아졌다. 한 달간의 벨리타는 돌연 눈물을 터트리고 오열을 하다가 시체처럼 누워 있고 얼마 못 가 악을 쓰며 분개했다. 처음 보는 괴이한 행동이었으나 수도 저택의 사람들은 태연하게 원래 그런 분이셨다 했을 때 얼마나 당혹스러웠는지.

오웬이 벨리타의 볼에 자신의 볼을 기대어 문질렀다.

“네가 또 떨어트릴 거잖아.”

“그때마다 주워 와.”

“너무 자주 떨어져서 안 돼.”

힘을 주어 볼을 기대니 벨리타가 속절없이 넘어갔다. 쓰러지는 벨리타의 허리를 감싸자 앙상한 팔이 오웬의 목을 감아왔다.

기분이 좋다고 안겨 오는 게 반갑지만 위태로운 사람에게 비집고 들어가 상대의 위기를 기회로 삼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할 만큼 자신이 없지도 않았으니까.

오웬이 벨리타의 이마에 이마를 맞댔다.

숨이 닿고 시선이 닿는다. 오웬의 시야는 온통 벨리타였다. 벨리타가 전부였다.

“가져오는 김에 내 것도 주워 와.”

“뭐?”

“내 심장도 같이 주워 오라고.”

이건 꼭…… 아니다. 오웬은 넘겨짚지 않기로 했다. 눈치 빠른 오웬이 모를 리 없었지만 확실하지 않으니 모르는 체했다.

오웬의 답이 돌아오지 않자 벨리타는 목에 두른 팔을 심술궂게 당겼다. 오웬 대신 벨리타의 몸이 움직인다. 힘을 주어도 미동도 않는 오웬이 괘씸해서, 벨리타는 고개를 들어 입을 맞췄다.

“……벨리타.”

“응.”

붉어진 얼굴은 감추어지지 않는다. 잔뜩 달아오른 오웬의 얼굴이 벨리타 눈에 가득했다.

벨리타는 눈을 감고 몇 번이고 소리를 내어 입을 맞추었다. 천천히 벨리타의 상체가 기운다. 이윽고 벨리타의 등이 침대에 기대어졌다.

“난 네 위기를 기회 삼고 싶지 않아. 네가 힘들 때 위로해 주고 싶은 건 내 마음이고, 넌 보답하려고 하지 않아도 돼.”

“알지. 내가 왜 몰라.”

“그러니까 분위기에 휩쓸리지 말고 잘 생각해 봐. 네가 너무 힘들어서, 이러는 걸지도 모르잖아.”

눈 딱 감고 벨리타의 상처를 이용할 수도 있다. 솔직히 그러고 싶다. 간사한 사람 마음이라는 게, 너무도 간악하고 야비해서 자신 좋을 대로만 하고 싶어지게 된다.

이성적으로 행동했지만 오웬도 사람이었다. 첫사랑의 상처를 보듬어 주며 사랑을 속삭이면 유일한 버팀목인 자신에게 응해 주리라는 기대를 안 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벨리타가 행복하길 바라니까. 자신의 간사한 마음보다 괴로울 벨리타가 극복하고 행복해지기를 바랐다. 그러니까 물러나는 거다.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되면 벨리타가 자신을 선택해 주리라는 자신이 있었다.

많은 고민 끝에 무겁게 뱉은 말이었음에도 벨리타는 태연자약했다. 멀뚱히 오웬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네 말이 맞아. 난 네가 전부터 좋았고 지금도 좋아. 유일하게 내 속사정을 아는 사람이기도 하니까 의지도 돼.”

“그러니까 벨리타…….”

“씁, 내 말 들어. 어딜 어른 말을 끊어.”

오웬이 입을 다물었다. 으름을 두는데 이렇게까지 귀여울 필요가 있나. 오웬은 제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는 걸 인정했다.

미간을 찌푸린 벨리타가 오웬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보랏빛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흩어진다. 촛불도 켜놓지 않은 어두운 방 안에서, 밤하늘의 빛에 의지해 서로를 담는다.

“난 아마 나아지겠지. 시간이 지나면 의연해질 거야. 상처가 아물지는 않겠지만 죽지 않으면 살아는 가.”

초췌하게 마른 얼굴이 미소를 띤다. 아직 극복하지 못했다. 오늘도 괴로워서 울고 두려워서 달아나고 싶었다. 포기하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워도 죽지 않으면 아침이 밝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무뎌지고 닳아져 간헐적으로 찾아오게 된다.

벨리타도 알고 있다. 이미 겪어 본 감각이다. 적응하고 순응하며 살게 될 거다.

“기억을 지우고 싶어.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살고 싶기도 해.”

“뭐?”

예상치도 못한 발언이다. 오웬이 소스라치게 놀라 상체를 뒤로 물렸다. 팔을 두르고 있던 벨리타가 딸려 올라갔다.

우득, 어깨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들리자 오웬은 벨리타의 허리를 감고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침대는 신발 벗고 올라오라는 말에 얌전히 신발도 벗었다.

“절대 안 돼.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 돼.”

“알아. 그냥…… 그러고 싶었다고. 너무 힘들어서 차라리 그러면 속 편할까 생각도 했어. 근데 그러면 안 되잖아. 내 자식들, 내 친구, 내 가족, 내 삶을 갖고 있는 건 나뿐이니까. 나 하나니까.”

주책없이 또 눈물이 흐른다. 벨리타는 눈물이 흐르는 대로 뒀다. 언젠가는 마를 테니.

“내 업보지 어쩌겠어. 내가 못난 탓인데. 다 안고 살아야지.”

“왜 그런 말을 해. 넌 좋은 엄마야. 정말 좋은 사람이야. 자책하지 마.”

다정함에 길들여졌다. 벨리타는 오웬이 좋았다. 끝도 없이 퍼주는 다정함과 이성적이면서도 유독 벨리타에게 무른 냉철함이 좋았다. 오웬의 곁에 있으면 특별해지는 기분이 든다. 다 괜찮아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곪아 터진 상처를 떠안고 살게 되어도 오웬과 함께 있으면 감당할 고통이 되리라는 짐작이 됐다.

어떤 상황에서도 오웬은 오로지 벨리타의 얼굴만 담는다.

오웬의 손은 여전히 벨리타의 눈물을 닦아 주고 손을 잡아줬다. 벨리타는 이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소설 내용과 관련 없는 사람. 딸이 만든 세상에 얽혀 있지만 깊지 않은 사람.

벨리타가 오웬의 볼을 감싸 쥐었다.

“네가 좋아, 오웬. 시간이 지나도 나는 너야.”

“……너.”

“내 마음 내가 모르면 누가 알아. 너는…….”

벨리타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허공을 가르며 시선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너는 이런 이상한 아줌마라도 내가 좋아?”

진지하게 듣고 있던 오웬이 웃음을 터트렸다. 볼을 감싼 손을 끌어내려 깍지를 꼈다. 맞잡은 손이 뜨거웠다.

“당연하지. 난 그래서 더 좋은데.”

바스락, 나뭇잎이 나부낀다. 그동안 역겹고 거슬리기만 했던 소음이 풍경 소리 같았다. 벨리타는 잡은 손을 들어 오웬의 손등에 입 맞췄다.

“그럼 기다려 줘. 나는 아직 많이 힘들어. 숨만 쉬어도 아파. 내가 날 건사할 수 있으면, 그때 나랑 만나. 도저히 너한테 나도 감당 못 하는 날 견디라고 하고 싶지 않아.”

“네가 바란다면 얼마든지 기다릴게. 머리가 하얗게 되어도 기다릴 수 있어.”

입술이 닿았다. 당연하게 입을 맞췄다. 좋지 않은 몸 탓에 버석하게 마른 입술이 까슬까슬했다. 오웬이 벨리타의 등에 손을 얹자, 벨리타의 굽은 허리가 곧게 세워졌다.

오웬의 위에 걸터앉은 벨리타의 머리카락이 오웬에게 쏟아졌다. 오웬의 얼굴을 가리는 머리카락을 치웠다.

드러나는 행복이 피어난 단정한 얼굴. 붉은 뺨. 오롯이 벨리타만 담고 있는 오웬. 벨리타는 지금의 상황이 버겁고 앞으로도 고통스럽겠지만 괜찮으리라 생각했다.

몸의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그때까지만. 딱 그동안만.

*

먼저 일어난 오웬이 벨리타의 머리를 정돈해 줬다. 애정 가득한 손길에 잠에서 깬 벨리타가 아침 인사를 했다. 오웬이 긴 머리카락을 붙잡고 이리저리 흔들며 옆 저택의 강아지도 이렇게까지 곱슬곱슬하지 않다고 놀렸다가 얻어맞았다.

아침 식사도 식당으로 내려가 함께했다. 데이비드와 엘라는 알겠다는 눈으로 벨리타와 오웬을 쏘아봤다.

“뭐. 왜.”

“상태가 나아지셔서 다행입니다.”

“엘라야, 쟤 약 먹었냐?”

벨리타의 상태는 확실히 호전되었다. 엘라는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아가씨가 하는 말은 다 맞는 말이다. 용이 그냥 오래 사는 도마뱀이라고 해도 벨리타가 하는 말이면 다 맞다.

벨리타와 오웬이 나란히 앉아 다정다감한 대화를 나누자, 데이비드는 차라리 물컵에 코를 박고 죽고 싶어졌다. 벨리타의 상태가 좋아진 건 다행이지만 누나가 연애하는 모습이 너무도 꼴 보기 싫었다.

“동생, 일어났어? 야, 여기 정원 기가 막히더라~”

“언니, 밥 먹었어?”

“도련님이 같이 먹자고 해서 안 먹었지.”

한 바퀴 산책을 마치고 온 이온이 호탕하게 웃었다. 엘라가 데이비드의 옆, 오웬의 앞에 자리를 안내했다.

이온은 정말 무척이나 부담스러운 자리였지만 안내해 주었으니 앉았다. 귀족들 사이에서 뻔뻔하게 구는 건 어제로도 족했다.

벨리타는 이온에게 오늘의 일정을 설명했다. 함께 무르펜에 가서 수도 관광이나 하자는 시답지 않은 대화였다.

쿵.

저택의 벽이 울렸다. 식당의 외벽에서 나는 타격음이었다. 오웬과 데이비드가 벌떡 일어났다.

나서려는 데이비드를 막아 세운 오웬이 창문을 열어젖혔다. 타격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에 편지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소란스러웠다.

오웬은 어떠한 설명도 없이 순간이동으로 편지를 챙겨 돌아왔다. 데이비드에게도, 벨리타에게 온 편지도 아니었다.

오웬에게 도착한 편지. 잭슨이 보낸 짧은 편지였다. 벨리타에게 보낼 때에는 황실 마차로 곱게 보내주더니. 오웬에게 보낼 때에는 호위로 둔갑한 길드원이 보내준다. 참 고맙기도 하다.

오웬은 편지를 뜯어 내용을 확인했다. 편지만 아니었으면 식사는 평화롭게 이어질 뻔했다.

[당장 벨리타를 데리고 달아나 있어라. 지금 당장.]

이럴 줄 알았지. 오웬이 편지를 구기고 마법으로 흔적도 없이 태웠다. 밥을 입에 욱여넣으며 의아해하는 벨리타와 데이비드에게 오웬이 소리쳤다.

“지금 당장 짐 챙겨. 여행 가자.”

오웬이 짜증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황태자는 언젠가 자신이 꼭 나무에 매달아 두들겨 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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