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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93화 (93/150)

93화.

사람이 곰 인형도 아니고 줍기는 뭘 줍는다는 말인가. 벨리타는 헛웃음을 지었다. 아닌 척 틱틱거리는 게 귀엽기는 하다.

손을 든든하게 붙잡은 데이비드에게 몸을 기댔다. 걷지를 못하니 기댈 수밖에 없었다.

데이비드는 차분히 벨리타의 어깨를 붙들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기가 걸음마를 떼는 것보다는 빠른 속도였다.

계단 앞에서 난관에 봉착했다. 힘이 다 빠져 버린 다리는 계단을 디디지 못했다. 혈육은 아니었지만 의리로 맺어진 남매에게 더 이상의 접촉은 하고 싶지 않았으나 걸을 수 없으니 방법이 없다.

데이비드가 팔을 뻗어 겨우 서 있는 벨리타의 무릎 뒤로 손을 밀어 넣었다. 벨리타는 무척 놀랐다. 공주님 안기라니. 남매 사이에 공주님 안기는 어지간한 다짐 없이는 불가한 것이었다.

무리 없이 들어서 힘도 들이지 않고 걸어 내려갔다. 이 상황이 무척 민망해진 벨리타가 고개를 돌렸다. 일부러 느리게 걷는다. 한 계단 내려간 뒤 쉬고, 다시 걷기를 반복하며 데이비드가 그간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무슨 일이 있기는 했다.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말할 수 있으면 속이나 편했겠지만, 데이비드에게는 죽어도 말하지 못한다.

다른 이들은 벨리타가 이곳에 온 이후로 만났으나, 파텔가의 사람들은 애초부터 알고 있는 사이였다. 사실을 알게 되면 배신감은 이루 말하지 못할 거다.

벨리타는 고개를 약하게 도리질 쳤다. 비밀만 있다 하면 기겁하고 달려드는 데이비드가 웬일로 얌전하다.

“누님께서 언질을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부모님께…… 큼, 아무튼 그거요. 오지랖도 나름 쓸모가 있긴 합니다.”

새해에 일어난 일을 5월이 되어서야 고맙다고 인사하는 건가. 벨리타가 미묘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벌인 일이었다. 후회하지는 않지만 다 몸을 빼앗았다는 죄책감으로 행한 일이었다. 감사를 들을 필요 없었다.

대답 없는 벨리타를 의아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데이비드가 큼, 정면으로 시선을 돌리고 마저 입을 열었다.

“원래 누님께서 이런 분이셨다지만, 갑자기 이렇게 침울하게 구니 저택이 소란스럽습니다. 오웬도 말해 주지 않으니 알 길이 없다지만…….”

벨리타를 안고 있는 데이비드가 고개를 내렸다. 옆선이 수려하고 날카롭다. 그새 컸다. 일 년도 되지 않은 사이에. 이맘때의 아이들은 쑥쑥 자라는구나. 내 딸도 이렇게 금방 자랐는데. 조금 더 눈여겨볼걸. 그럴 걸 그랬다.

두고 온 자식 생각에 눈물이 흐른다. 남의 자식을 보고 자신의 자식을 떠올리는 스스로가 바보 같았다.

“그래도 정신 차리고…… 누, 님? 왜 우십니까. 왜…….”

이래서 보기가 싫었다.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당연하게 자식 생각이 나서 그리움에 찌들어 몸부림치게 되니까. 괴로워서 견디지 못하게 된다.

두 번째 인생이라고 마음 편할까. 원하지도 않았던 새 삶이다. 불행해도 소소한 행복에 겨워 웃음 났던 삶이었다. 뿌리 뽑혀 나동그라진 인생이 반가울 턱이 없었다. 자식을 잊고 새 삶을 살라는 게 저주와 다름없다.

눈물이 끝없이 흐른다. 앞에 있는 게 오웬이었더라면 다 이해한다는 듯 다정히 눈물을 닦아 주고 안아 주었을 텐데. 아는 게 없는 데이비드는 그저 당혹스러워하며 벨리타를 내려다보고 어깨를 감싼 손을 토닥거려 주는 게 고작이었다.

그냥 침대에 누워 있을걸. 벨리타가 후회를 짓씹었다. 고향에 잠시 다녀온다는 오웬을 보내주는 게 아니었다.

오웬이 있었으면 데이비드가 찾아오기도 전에 알아서 대처했을 텐데. 반가운 이름에 신나서.

벨리타가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지나가던 하녀들이 화들짝 놀라 다가왔다. 손수건을 바치고 헐레벌떡 물과 의원을 찾아 돌아다닌다. 벨리타가 그간 쌓아 왔던 인망의 결과였으나 안중에도 없다. 그저 숨 막히는 고독감에 눈물만 쏟을 뿐이다.

“아이고! 뭔 일이야! 벨리타, 왜 울어!”

익숙한 목소리. 처음으로 정을 주고 싶다고 느꼈던 살가움. 훅, 코끝으로 끼쳐 오는 달콤한 냄새에 벨리타가 고개를 들었다. 눈물에 흐린 시야였으나 이온이었다. 잊고 있어도 이따금씩 떠오르던 주름진 이마. 선량함이 가득한 눈. 우악스러우면서도 다정한 말투의 사람.

달콤한 향을 몸에 가득 두른 이온이 계단을 올라왔다.

밀가루와 설탕을 원 없이 만졌을 투박한 손이 벨리타의 얼굴을 감쌌다. 데이비드는 잠시 주춤하며 제 누님을 보호하려고 했으나 벨리타의 얼굴에 떠오른 은근한 미소를 보고 이온을 향해 벨리타를 슬쩍 들이밀었다.

이온이 엄지로 벨리타의 눈가를 벅벅 문지른다. 살결이 눌려 쓸렸지만 아프지 않았다. 인상을 찌푸린 이온이 걱정 가득히 말을 걸었다.

“웃으면서 보내줬으면 웃으면서 지내야지, 이게 무슨 꼴이야. 뭔 일 있어? 애가 아주 피골이 상접했네. 수프도 못 얻어먹겠다, 야.”

무례하고 무식한 말투였지만 정다웠다. 벨리타가 울음을 터트렸다. 이온이 화들짝 놀라 데이비드에게 명령 아닌 부탁을 했다.

“하이고, 도련님. 빨리 가서 애 앉혀 놔요. 차가운 물수건도 가져오고. 디저트는 얼어 죽을, 먹이다가 초상 치르겠네.”

구수하게 연달아 터지는 언어의 연속에 곱게 자란 도련님인 데이비드는 어영부영 이온의 말에 따랐다.

이온은 응접실 소파에 벨리타를 앉히고 담요를 덮었으며 미지근한 물을 가져왔다. 그러고는 차가운 물수건을 짠 이온이 벨리타의 얼굴을 닦았다. 울음에 열이 오른 벨리타의 얼굴이 서서히 식어갔다. 능숙하게 물까지 먹인 이온이 혀를 찼다.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며 눈치만 보며 이온이 시키는 대로 척척 따르던 데이비드가 흐트러진 벨리타의 머리를 그러모아 한 군데로 치워 놓았다. 이온은 얼굴이 익숙한 엘라에게 지시를 내렸다.

“집구석에 어른이 있어야 애들이 정신을 차리지. 애들만 두니까 이 난리 아니야. 엘라 아가씨, 가서 애 먹일 수프 좀 가져와요. 건더기는 작게 잘라서.”

엘라도 귀족이라면 귀족이다. 평민에게 명령을 들을 입장이 아니었으나 너무도 능숙하게 벨리타를 건사하는 이온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수도 저택에 있는 어른은 무척 많았지만 이온이 말한 어른은 보호자였다. 영지에 있을 테일러와 라빌을 책망하며 이온은 벨리타의 눈물을 거듭 물수건으로 닦았다. 벨리타가 배시시 미소 지었다.

방에서 두문불출했던 벨리타의 웃음은, 한 달 만에 보았다. 엘라와 데이비드는 울컥하는 감정을 누르고 각자 할 일을 서둘렀다. 쭈그리고 앉은 이온이 벨리타의 앙상한 손을 꼭 쥐었다.

“바짝 말라가지고……. 돈도 많은 아가씨가. 뭐가 부족해서 이렇게 말라. 얼굴에 그늘이 졌네, 그늘이 졌어.”

“……오랜만이야. 보고 싶었는데. 내가 너무 바빠서.”

“또 지랄을 해요. 나도 소문 들어서 알아. 난리가 났더만. 아주 흑마법사에 여우에, 공녀님이 해결해 줬다니 망정이지. 뭔 짓을 하고 다닌 거야.”

흑마법사? 여우? 몰랐던 소문이다. 미쳤다는 소문이라면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신력을 가지고 있는 벨리타가 흑마법이라니. 여우라는 소문은 나름 잭슨과 얽혀 짐작이 갔으나 흑마법은 정말 모르는 일이었다.

어물거리며 마땅한 대답을 하지 못하자 이온이 인상을 찌푸리며 벨리타의 소문에 대해 모조리 설명했다.

데이비드는 막지 못했다. 쏟아지는 언어의 홍수를 막을 재간이 없었다. 때문에 파텔가에서 기를 쓰고 막던 소문을 장본인이 듣고야 말았다.

얼떨떨한 낯으로 벨리타가 오만상을 찌푸린다. 시선을 돌리니 데이비드는 이미 알고 있는 태도였고 엘라는 사라지고 없었다. 사실 기분은 나빴지만 상관없다. 벨리타는 이곳에 애착도 없었고 미련도 없다.

한 달 전 소르니가 찾아와 소리치던 소문이 이거였겠구나, 싶을 뿐이다.

덤덤해 보이는 벨리타의 반응에 데이비드와 이온은 속이 쓰렸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가문이 날아갈 소문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나.

이온이 벨리타의 손등을 몇 번이고 토닥였다. 이온은 벨리타가 안쓰러웠고 안타까웠다.

“어린 게 박복해서. 어휴……. 밥이나 먹고 운동 좀 해. 몸이 이게 뭐야. 네 동생분이 나 보고 싶다고 찾아와서 신나게 달려왔구먼. 무슨 일이 있었지?”

맞다. 있어도 아주 큰일이다. 말할 수는 없지만. 울적하고 몸서리쳐지게 괴로웠음에도 걱정을 들으니 속이 나아진다. 신기하게도.

벨리타는 제 생각보다 훨씬 이온을 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꽤 놀랐다. 오웬이 아무리 달래주어도 울적하던 기분이 우악스러운 이온을 만나고 참견을 듣자 썩 편해졌다. 벨리타가 이온의 손을 맞잡았다.

“……그냥, 조금. 일이 있었는데……. 이젠 좀 나아진 것 같아.”

“청승은. 야, 이 계집애야. 정신 차리고 살아. 보자마자 우는데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뒤에서 얌전히 서 있던 데이비드는 도저히 낄 수 없는 분위기를 감지하고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벨리타는 나아졌다. 콱 막혀 짓누르고 있던 바위에 약간은 금이 갔다. 제 것이 아니지만 자신이었기에 만날 수 있었던 사람. 소설 속 외의 사람을 만나 처음으로 쌓았던 친분은 벨리타의 소유였다. 그러니, 이온만큼은 정말 친구로 두고 싶은 욕심이 났다.

스스로를 잃지 않게 상기시켜 주는 사람이다. 이온과 함께 있으면 아직도 50대의 그때가 생각이 나서.

벨리타는 부들거리는 팔에 힘을 주어 이온을 일으켰다. 괜히 힘쓰지 말라며 타박한 이온이 벨리타의 옆에 앉았다. 벨리타가 이온의 팔짱을 꼈다.

“언니, 있잖아.”

“왜. 청승맞게 지랄이야.”

“언니.”

“뭐.”

“언니…….”

“똥을 싸네, 아주. 뭐, 왜.”

“나 언니가 참 좋아.”

“허이고, 웃기시네. 그래, 나도 좋다. 좋아.”

스르르 문이 열렸다. 엘라가 들어가지 말라며 오웬을 뜯어 말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분위기를 파악한 오웬이 다시 스르르 문을 닫았다. 이토록 편해 보이는 벨리타는 처음이다. 데이비드가 일을 참 잘했다.

오웬은 칭찬이나 해 주어야겠다며 데이비드를 찾으러 떠났다. 엘라가 갓 끓인 수프를 들고 문을 살짝 열어 테이블에 올려두고 사라졌다.

간만에 즐거웠다. 얼마나 떠들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벨리타는 한 달 만에,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가장 편안하게 웃었다.

늦은 새벽이 될 때까지 떠들었다. 무리한 몸이 떨리자 이온은 너무 붙잡아 두었다며 엘라에게 벨리타의 시중을 부탁했다.

벨리타는 무척 아쉬워했으나 아침에 또 만나지 않느냐는 말에 미련을 남기고 떠났다. 이온은 객실에 묵을 예정이었다. 벨리타가 부축해 주는 엘라에게 몇 번이고 이온에게 잘 대해 주라는 당부를 했다.

툭, 엘라와 벨리타의 사이에 손이 끼어들었다.

“내가 모실게. 엘라는 가서 쉬어.”

“네? 아뇨, 아가씨 하녀는 저인데요. 제가 모실 건데요.”

엘라가 벨리타를 보며 오웬을 쫓아내라고 눈으로 시위했으나 벨리타는 엘라를 보냈다.

아가씨, 미워요. 온몸으로 피력한 엘라가 멀어지자 오웬이 말갛게 웃는다.

“좋은 시간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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