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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92화 (92/150)

92화.

다 치워 버리고 싶은데도 볼을 감싼 오웬을 밀어내지 못한 건 능청스러운 말투 속에 애정이 숨어 있고 걱정과 불안함이 비쳤기에 그렇다. 되레 자신이 더 우는 얼굴을 하고선 머리카락이나 넘겨 주며 말을 거는 게 한심하다.

챙겨 줄 필요도 없는 사람이다. 벨리타는 스스로를 그렇게 정의했다. 딸만은 지키겠노라 되새기며 살았는데 그마저도 지키지 못한 형편없는 어미였고, 이곳의 모두를 속인 기만자였다.

벨리타의 고개가 아래로 추락한다. 꺾이기 전, 오웬의 손이 단단하게 고개를 받쳤다. 엄지손가락이 간결하게 살결을 쓸었다.

“날씨가 좋아, 벨리타. 바람도 적당히 불어. 나가기 딱 좋을 거야.”

“싫어. 다 하기 싫어.”

“걸으면 기분이 좀 나아져. 나가서 마법도 연습하자. 새로운 거 알려 줄게.”

“하기 싫다고 했잖아.”

눈물이 쏟아졌다. 이유도 모른다. 갑작스럽게 터진 눈물이 의지 없이 흘렀다. 당황한 기색도 없이 오웬은 묵묵히 벨리타의 눈물을 닦았다.

모든 것에 화가 나고 서러워지길 반복하다 끝내는 체념하고 다시 분노한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오락가락하는 기분을 통제할 수 없다. 눈물이 나면 울고, 화가 나면 화를 낼 뿐이다.

오웬이 벨리타를 끌어안았다. 정말 나가서 볕을 쬐면 조금이라도 나아질까. 무기력하게 한없이 나락으로 나동그라지는 감각이 사라질까.

그는 벨리타의 곱슬곱슬한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섬섬옥수에 엉키는 머리카락이 고운 실처럼 흩어졌다. 오웬이 벨리타의 등을 토닥이고 자신의 어깨에 얼굴을 묻게 했다. 로브가 축축하게 젖어갔다.

“강요는 아니야. 네가 하기 싫으면 하지 마. 괜찮아, 그래도 돼. 뭘 하든 옆에 있을게.”

사람이란 참 간사하다. 고작 위로 조금 들었다고 속이 편해지다니. 품에 안겼다고 시큰거리는 속이 풀어진다. 마른 손이 로브를 쥐고 당긴다.

“……당분간 아무도 보고 싶지 않아. 그냥, 혼자 있고 싶어.”

“나도?”

입이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묵묵히 얼굴을 파묻은 벨리타가 훌쩍거렸다. 의미를 충분히 알아들은 오웬이 잔잔하게 속삭였다.

“알았어. 옆에 있을게.”

단 거 먹자. 좋아하잖아. 오웬이 살갑게 웃었다. 겨우 눈물을 그쳤던 벨리타가 다시 눈물을 쏟아냈다. 봄볕이 따사로웠다.

*

한 달간 벨리타를 볼 수 없었다. 조슈아와 소르니, 잭슨은 종종 벨리타를 찾아갔지만 매번 문전박대를 당했다.

데이비드도 아카데미를 다니고 있어 몰래 들여보내 줄 수 없었으니 항시 상주하고 있는 오웬이 집주인과 다름없었다.

소르니는 사교 파티 시즌이 되어 벨리타를 끌고 나가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한 달 전, 벨리타에게 매몰차게 쫓겨날 때 했던 약속을 철저히 지킨 소르니였다. 사교 파티에서 소문을 낸 자에게 대놓고 면박을 주었다. 여태까지 퍼졌던 소문들은 죄다 거짓부렁이었으며, 이런 소문을 내는 자는 몰상식하고 한심한 데다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못 박아 놨다.

소문을 낸 당사자인 자작은 소문이 진실이라고 떵떵거리며 되레 소르니에게 따졌지만 말발로 조져 주었다.

그날 이후로 파텔 후작가의 딸, 벨리타는 지나가던 새도 개 거품 물고 떨어트린다는 체르핀 공작가의 공녀와 막역한 사이에, 전쟁만 나갔다 하면 승리로 이끄는 피에 미친 난폭한 황태자와 친구를 먹었고, 수도를 장악한 경제 실세인 소이트 상단의 상단주가 따르며, 모든 마법사들의 중심 수도 마탑주 아들의 제자임이 기정사실화되었다.

한마디로 잘못 건들면 주옥 된다는 뜻이었다.

파텔 후작가 또한 정치에서도, 경제에서도 힘깨나 쓰는 가문이었으니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제국의 실세들이 뭉쳐서 벨리타를 물고 빨았다. 심지어 황태자는 몇 달 전, 체르핀 공녀와 파혼하고 후작 영애와 결혼하겠다는 소문까지 퍼졌으니 벨리타의 위상은 드높았다. 친구, 아니 자식들을 잘 두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잘나갔다.

사교계에서 소르니가 한바탕 휘저어 주고 나니, 벨리타와 친분을 쌓고 싶어 미치는 사람들이 파티 초대장을 보내 한봄에도 땔감으로 사용해도 될 정도였다. 물론 벨리타는 우울의 극치를 찍고 있어 바깥 상황을 몰랐지만.

높아지는 벨리타의 평판과는 달리 잭슨은 서서히 위태로워졌다.

‘약혼을 하신 지 일 년이 넘었는데도 결혼이 진행되지 않는 게 말이나 됩니까.’

‘후손이 있어야 황제 폐하께서도 편히 마음 놓고 물러나실 것 아닙니까.’

‘사실 황태자 전하께서 황제의 자리에 올라도 되는 걸지 의심스럽습니다. 어미도 죽인 분 아닙니까. 전쟁에 미친 살인귀에 성정도 난폭하시고. 일은 잘하실지 몰라도 성군의 자질이 없습니다.’

의도적으로 퍼진 소문이다. 그동안 피도 눈물도 없는 고고한 절대적 권력자의 위치를 굳건히 지키던 잭슨이 벨리타를 만난 뒤에 만만해진 탓이었다. 벨리타가 황태자궁을 수시로 들락날락하며 잭슨의 약점임이 만천하에 드러난 게 실질적 이유였다.

쉽게 칼을 휘두르고 황태자로서의 직무도 확실히 하며 암살마저 능력 좋게 되받아치는 잭슨에게 약점이란 없었다. 벨리타라는 존재가 잭슨의 역린이었으며 아킬레스건이었다. 벨리타를 인질 삼아 황태자에게 이래라저래라 간섭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잭슨이 오냐오냐 따를 리 없지만.

며칠 전, 잭슨은 벨리타의 평판을 깎아내린 소문의 근원지를 고문해 알아낸 정보를 추려냈다. 2황자의 세력임과 동시에 황제의 끄나풀이었다. 벨리타를 의도적으로 사회에서 매장시켜 잭슨을 무너트리려는 속셈이었다.

당연히 죽였고 이미 정리한 2황자의 수족들과 함께 태워버렸다. 죽여도, 죽여도 넘쳤다.

소르니와의 결혼은 핑계임은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군중심리로 잭슨을 끌어내리려는 술수인 것도 안다. 2황자의 측근들이 시작한 일인 것도 파악하고 있다. 2황자의 세력이라고 하지만 황제와 황후의 사람들이다. 주술서를 사들였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며칠을 고민하다 시작한 물밑 전쟁이었다.

분명 주술서를 이용해 반란을 일으키려고 한다고 예상했을 터. 황후의 짓일 거다. 황제는 잭슨과 같아서 힘으로 찍어 누르기를 선호했으니까.

여자에 미친 황제는 사랑하는 황후를 위해, 사랑하는 황후와의 자식을 위해 도울 뿐이다. 2황자가 멍청하고 정치에 재능이 없다는 건 관심도 없다. 여자에 미쳐 있는 건 핏줄의 힘인가. 잭슨도 벨리타에 미쳐 있듯이.

물론 주문한 주술서는 받지도 못했다. 물량도 많은 데다 로틀 남작이 일처리를 미뤘을 터였다.

의자에 앉은 채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던 잭슨이 사납게 웃었다. 잭슨은 그저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주술서를 사들였을 뿐이고 싸움을 시작한 건 황제 쪽이었다. 그러니 대응하는 건, 잘못이 아니다. 살기 위해 대응하는 게 뭐가 나쁘단 말인가.

물론 2황자의 수족을 죽이고 태워 버리고 있지만, 그쪽에서 먼저 암살 시도를 했으니 불가피한 대처였다. 집무실 끝자락, 구석에서 숨죽이고 대기하고 있던 호위에게 여유롭게 말을 걸었다.

“잠시 기다렸다가 시작한다. 준비해 둬.”

설명도 되지 않은 명령이었지만 호위는 무슨 의미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고개를 숙여 이해했다는 반응을 보인 호위가 열린 창문 틈으로 사라졌다. 커튼이 바람에 살랑거렸다.

잭슨은 피로해진 눈가를 문지르며 긴 숨을 뱉어냈다. 벨리타가 보고 싶었다. 끌어안고 잔소리를 들으며 비비적거리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인데.

파텔 후작은 아직도 2황자의 밑에서 돕고 있었다. 조슈아가 뜻을 전달했으나 파텔 후작은 완곡히 거절했다. 잭슨은 알 필요가 없는 정보였고 알지 못했다.

파텔 후작의 처우도 고민해야 했다. 죽이면 벨리타가 싫어할까. 머저리의 골치 아픈 측근인데, 살려두면 번거로워진다. 가문의 핏줄을 남기지 않고 쓸어내야 옳다.

귀족들까지 소탕해 제 편의 사람들을 가주로 앉힐 계획이었으니 파텔 후작가도 마땅히 정리를 해야 했다. 데이비드는 말이 잘 통하고 정치에도 능통하니 자신의 수족으로 두면 익히 도움을 받겠지만, 은근히 비춰 오는 적개심이 설명했다. 아비를 따라 2황자를 지지하겠노라고. 데이비드도 살려 두면 골칫덩이가 될 터였다.

벨리타를 제외한 전원을 죽여 버리면, 괜찮지 않을까. 아무것도 남지 않은 벨리타를 가주 자리에 앉히고, 도움을 주는 체하며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 마법사 나부랭이에게 빼앗기지 않고 제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

황제가 되면, 권력을 써서 억지로라도 두 번째 부인으로 들일 수 있다. 첩 따위가 아닌 부인으로. 벨리타의 몸 상태를 위해서라도 마법사는 살려 둬야 했다. 몸이 나아지면 그때 죽여도 늦지 않다. 잭슨은 해사하게 웃으며 서류를 넘겼다. 기분이 좋았다.

*

우울했고 처절했으며 절망적이었던 나날의 연속이었다. 오웬이 곁을 지켜 주어도 상태가 호전되는 건 잠깐이었다.

불시에 찾아온 현실감은 벨리타를 무너지게 했다. 단 걸 먹어도 괴로웠고, 볕을 받으며 걸어도 눈물이 나왔다. 끼니도 수시로 걸러 마른 몸은 뼈대를 드러냈다. 저택의 모두가 벨리타를 걱정했다.

오웬을 제외한 전부는 기억하고 있다. 벨리타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 침실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고 기이하게 마른 몸과 간헐적으로 터지는 히스테릭한 비명. 공허한 눈. 근 일 년간 미쳤기에 달랐던 거다. 본래 벨리타의 모습은 처참했다.

걱정이 되기는 했어도 미친 상태가 나아졌다는 건 다행이지만, 모두 미친 벨리타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돌아온 데이비드가 벨리타의 침실 문을 두드렸다. 여전히 대답이 없다. 데이비드가 문을 좁게 열어 얼굴만 들이밀었다.

저녁이 되었는데도 벨리타는 촛불 하나 켜 놓지 않고 어두컴컴하게 침대에 앉아 있었다. 낯설지만 익숙한 모습. 미묘한 감상이 이질감이 들었으나 데이비드는 꽤 살갑게 말을 붙였다.

“무슨 언데드처럼 그러고 있습니까? 손님이 왔으니 나와 보십시오.”

“돌려보내.”

“안 나오면 후회하실 겁니다. 누님께서 찾으셨던 이온이라는 사람이 왔습니다.”

뭐? 벨리타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깜짝 놀라는 모습이 생동감 넘쳤다. 오랜만에 감정이 담긴 반응을 보았다.

데이비드는 문을 더 활짝 열었다. 빛 무더기가 쏟아졌다. 갑작스러운 빛이 눈부셨던 벨리타가 눈살을 찌푸렸다. 열린 문으로 발을 내디뎌 다가간 데이비드가 손을 뻗었다. 태연한 표정이었으나 손끝이 자잘하게 떨렸다.

“주방을 빌려 누님께 대접하겠다고 준비하고 있는데, 돌려보내실 겁니까?”

“여긴 어떻게, 왜……?”

말도 하지 않아 갈라지고 높낮이가 엉성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바짝 마른입이 찢어져 피가 났다.

반가움이 앞서 벨리타는 무심코 데이비드의 손을 잡았다. 뼈만 남은 앙상한 손에 데이비드는 차오르는 감정을 눌러 삼키고는 벨리타를 부축하여 일으켜 세웠다. 근육도 남지 않은 다리가 후들거린다. 데이비드가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했다.

“……오다가 주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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