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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91화 (91/150)

91화

체르핀 공녀라는 껍데기가 없었다면 찾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잭슨이 뒷배여서 더 수월한 부분도 있었고. 잭슨은 뚜하게 턱을 괴었다.

“그렇게 할 필요가 있나?”

“그럼요. 누명과 다름없는 헛소문을 퍼트렸다고 귀족들에게 알리면서, 체면과 신뢰를 깎아 주는 일이 얼마나 필요한데요. 벨리타의 소문뿐 아니라 여러 죄목들도 알리면 나중에 재판에 세웠을 때나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을 때에도 득이 될 거예요.”

소르니는 고상하게 찻물을 한 모금 넘기고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남을 엿 먹일 때에 짓는 미소였다.

잭슨은 내심 소르니와 동업을 하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교계의 중심인 소르니가 2황자의 측근이 되었다면 분명 골치 아팠을 거다. 언론을 장악하기보다 무력으로 찍어 누르는 편인 잭슨으로서는 필요한 인재였다.

구겨진 서류를 대충 눌러 편 잭슨이 알아서 하라며 손을 저었다.

마저 찻잔을 비운 소르니가 벨리타에게 가겠다며 홀연히 사라졌다. 일에 둘러싸여 벨리타를 만나러 가지도 못하는 잭슨은 약혼자가 얄미웠다.

*

화려한 마차를 이끌고 소르니가 찾아왔다. 마차에서 내린 소르니를 마중 나온 건 엘라였다. 아가씨에게 독을 먹인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에 화도 나고, 공녀의 신분이 무섭기도 한 엘라는 쭈뼛거렸다.

소르니가 대수롭지 않게 높고 정갈한 문 앞에 섰다. 엘라가 입을 우물대다 소르니의 뒤에서 작게 소리쳤다.

“아, 아가씨께서, 돌아가 달라고 하셨어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하루가 멀다 하게 드나들어도 그만 좀 오라고 타박할지언정 문전박대를 하지 않았다. 충격과 공포였다.

소르니가 휘청거리며 호위 기사의 팔을 붙잡았다. 눈앞이 아찔하다.

“대체 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니?”

생각할수록 믿기지 않았다. 엘라는 손가락을 꿈지럭거린 끝에 겨우 입을 뗐다.

“당분간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으시다고 하셔서요. 먼 길 오셔서 고단하시겠지만 죄송합니다.”

소문을 들었나. 헛소문을 듣고 상심한 상태일까. 신전에서의 일은 이미 회복되었다고 들었는데.

소르니는 엄습하는 걱정과 두려움 탓에 엘라를 매섭게 돌아보았다. 엘라가 두드러지게 움츠러든다.

“문 열어. 내가 직접 벨리타를 살펴봐야겠으니.”

“하, 지만 아가씨께서…….”

“안 열 거니? 네 가문이 어디에 있었더라.”

치사하게 가문과 가족을 가지고 협박하다니. 공작가에 비할 바 되지 못하는 신분이 야속하다.

엘라는 눈물을 삼키며 속으로 벨리타에게 몇 번이고 사죄했다. 벨리타에게 사죄의 말씀을 전하느라 대답이 없는 엘라를 흘겨본 소르니가 호위 기사에게 손짓했다. 기사가 주춤거리며 문을 연다. 엘라는 눈을 질끈 감고 소르니의 뒤를 쫓았다.

방문을 두드려도 대답이 없다. 뒤에서 쭈그러진 엘라가 안 된다며 거듭 말렸지만 걱정이 앞서 엘라를 무시하고 문을 열었다.

침대에 앉아 있는 벨리타가 고개를 돌렸다. 안쓰러울 만큼 눈이 부어 있었다. 조르르 벨리타의 앞에 도달해 침대에 걸터앉으려고 하자 벨리타는 무감한 시선으로 소르니를 훑었다. 평소와 다른 태도였다.

“벨리타, 무슨 일 있니? 소문 들은 거야?”

울었던 게 분명한 얼굴을 보니 걱정이 안 될 리 없었다. 소문을 들은 거다. 그러지 않고서야 안타까운 몰골을 설명할 일이 없다.

살갑게 벨리타의 손을 잡아 상체를 들이민 소르니가 말을 건네자 벨리타는 고개를 돌렸다.

“보고 싶지 않아. 가.”

명백한 거절이었다. 벨리타에게 단 한 번도 당해 본 적 없었다. 소르니는 현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대로 굳어 버렸다.

허공을 응시하며 고단한 숨을 내쉰 벨리타가 먼발치에 서 있는 엘라에게 소리친다.

“손님 가신다. 배웅해드려.”

“뭐? 아니, 벨리타! 지금 나 쫓아내는 거야?”

가녀린 팔을 움켜쥔다. 절박한 낯의 소르니가 벨리타의 팔을 붙들고 흔들었다. 우악스럽기까지 한 힘에 못 이겨 벨리타의 머리가 휘청거린다.

엘라가 다급히 뛰어와 소르니를 말렸다. 미처 공녀의 몸에 손을 대지 못한 엘라를 무시하고 소르니는 악을 써가며 벨리타를 몰아세웠다.

“소문이 문제라면 이럴 필요 없어! 나랑 파티에 가자, 소문의 근원지를 찾았으니 네 앞에 무릎을 꿇려 줄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잘못했다고 빌게 해 줄게!”

벨리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앉은 채로 주먹만 쥐었다. 악을 쓰고 매달려도 돌아오지 않는 반응이다.

무시만 당하고 비웃음만 당하며 살아 왔던 소르니는 하나 남은 제 편도 돌아설까 봐 두려워졌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정답게 오이를 얼굴에 얹고 알 수 없는 결혼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던가. 갑자기 손바닥 뒤집듯 뒤바뀐 태도가 무서웠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니…….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어? 말해 줘, 다 사과할게. 내가 미안해, 벨리타.”

대답이 없다. 붙잡은 팔을 지지대 삼았던 소르니의 상체가 무너졌다. 겁에 질려 떨리는 몸을 느꼈음에도 벨리타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난폭하게 잡은 팔을 흔들었다. 벨리타의 상체가 들썩거렸다.

엘라가 소르니를 부르짖으며 어깨를 잡고 당겼지만, 악만 남은 소르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난장판이었다.

“날 미워하지 마! 내 편이라며, 황태자와 싸워도 내 편을 들어주겠다며! 그냥은 못 가, 대답은 듣고 가야겠으니 무어라 말 좀 해 보렴!”

입장을 고려할 여력도 없다. 돌변한 태도가 두려워 이성을 잃었다. 소설 속 악녀답게 거칠고 난폭했다.

소르니가 벨리타의 어깨를 붙잡고 자신의 쪽으로 힘주어 돌렸다. 가만히 목석처럼 앉아만 있던 벨리타가 손을 매섭게 쳐냈다. 소르니는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떨쳐진 손은 목적을 잃고 허공에 머물렀다.

소르니를 뜯어말리던 엘라가 슬금, 뒤로 물러났다.

공녀도 맞을 때가 됐지. 엘라는 분명 벨리타가 등짝을 때리리라 예상했다. 예상했지만 빗나갔다.

이제야 고개를 든 벨리타가 덤덤하게 굳은 채 소르니를 쏘아본다. 짜증도, 으레 보였던 귀찮음도 없었다. 피곤함만 남아 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창문 너머를 본다. 지치고 갈라진 목소리가 날카롭게 비수로 꽂혔다.

“왜 너희는 멋대로만 굴까……. 다 자기들만 좋자고 들락거리지.”

틀린 말이 아니라서 더욱 가슴께가 저릿하다. 벨리타와 함께 있으면 즐겁고 편안하다. 터놓고 마음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어릴 적 홀로 정원을 헤매다 찾은 언덕에서 받은 위로와는 다르다. 인정받고 위안을 얻으며 더 나아질 미래를 꿈꾸게 했다.

그 달콤함에 취해서, 놓을 수 없어서 드나든 게 맞았다. 벨리타의 일정도, 상태도 고려하지 않고 찾아온 건 소르니의 잘못이 맞았다.

그래서 싫었을까. 벨리타는 귀찮아하고 번거로워하는 기색을 내비쳐도 결국은 밥을 챙겨 먹이고 간식을 손수 챙겨 주며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 과정 속에서 불쾌함을 느꼈을까. 자신이 좋자고 피해를 줬다. 제일 좋아하는 사람에게.

수치심과 미안함, 죄책감을 참을 수 없었다. 눈물이 한 방울씩 떨어진다. 소르니가 화려한 치맛자락을 투박하게 쥐어뜯었다.

“……미안해. 이 말만 하고 갈게.”

돌아오는 대답이 없어도 소르니는 숨을 들이켰다. 목이 메서 청아하던 목소리가 일그러졌다.

“소문, 내가 알아서 다 처리할게. 다시는 네 구설수가 오르지 못하게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렴. 너는 그냥, 평소같이…… 지내면 된단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잘 이겨 내고……. 우윽, 또 올게.”

창피하다. 벨리타가 아닌 다른 사람 앞에서 우는 것도 창피하고, 벨리타의 속도 모르고 막무가내로 굴었던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소르니는 옷소매로 눈물을 닦은 후 천천히 일어났다. 침대가 삐그덕거린다.

“궁금하지도 않은 소문, 네가 뭐라고 처리를 해. 찾아오지 마.”

맞는 말뿐인데도 소르니는 동의할 수 없었다. 알겠다고 하면 정말 벨리타와 아무 사이도 되지 못할 것 같아 무서웠다. 관계가 끝이 날까 봐 겁이 나서 소르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끝까지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벨리타가 야속하고 서운하다.

소르니는 한참을 침대 옆에 서 있다가 침실을 벗어났다. 엘라가 배웅을 위해 따라나섰다.

문 닫히는 소리가 거슬렸다. 벨리타는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애먼 아이에게 화풀이나 하는 꼴이 같잖다. 아이들은 잘못이 없다. 돌아가지 못하는 신세가 한탄스럽고 비참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다 싫었다. 편안하고 안락한 이곳에서의 삶도 싫고, 남의 몸을 빼앗아 살아가게 될 처지도 원망스럽다.

몸의 주인, 벨리타는 어떻게 되는 걸까 걱정까지 들었다. 벨리타는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으니 몸 주인은 어딘가에서 떠돌고 있을까. 벨리타를 미워하고 책망하고 있을 거다.

자괴감이 들었다. 차라리 몸 주인이 찾아와 몸을 돌려달라고 하면 마음이라도 편할 텐데. 스스로를 건사할 수 없는 상황에 아이들까지 보고 싶지 않다.

정이 든 게 맞다. 챙겨 주고 싶은 마음도 든다. 찾아와 주면 반갑기도 하다. 얼굴을 볼 생각을 하면 가슴이 진창을 뒹군다. 딸이 만든 캐릭터라서, 딸이 다져 놓은 세상이라서 호흡조차 요원하다.

잭슨을 떠올리면 잃은 아들이 맴돌고, 소르니를 생각하면 다시 만날 수 없을 딸이 아른거린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 손이 닿는 곳, 귀에 들리는 소리 하나하나 전부 제 딸이었다.

어딘가에 털어놓을 수도 없다. 하다못해 오웬에게도 말하지 못한다. 소설 속 세계라고, 딸이 쓴 소설이라고 어떻게 말하랴. 그저 가슴 깊이 묻고 혼자 앓기만 하는 게 전부였다.

혹여라도 지금의 상황을 딸이 보고 있더라도 의연하게 대처할 방법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그럴 기력도 없다. 이미 다 해지고 낡아 썩어가고만 있어서.

창문 옆에서 찬란한 빛 무더기가 흩어졌다. 오웬이다. 며칠간 몸 상해가며 연구에만 매진했던 터라 당분간은 쉬기로 마음먹은 오웬이 천천히 벨리타에게 다가왔다.

매번 입던 검은 로브가 살랑거리며 흔들렸다. 달고 묵직한 향. 가볍지만 천박하지 않은 발걸음. 당연하게 닿는 손. 익숙하다 못해 버릇처럼 잡는 깍지.

“식사도 걸렀다며. 아침은 꼭 든든하게 챙겨먹어야 한다던 사람 어디 갔어?”

“너도 나가. 아무도 보고 싶지 않으니까.”

깍지 낀 손을 자잘하게 간지럽힌다. 오웬이 눈에 띄게 서운한 티를 냈다. 잡은 손을 놓고 벨리타의 양 볼을 감쌌다. 늘어진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기고 말랑한 볼을 손가락 끝으로 조심스럽게 문지른다. 달래듯 조곤조곤 간질거리는 낮은 목소리가 살가웠다.

“섭섭하게 왜 그래. 계속 앉아만 있어서 허리 아프겠다. 우리 걸을까?”

“꺼지라고 했지.”

“밥도 안 먹어서 욕도 착착 안 감기네. 뭐라도 먹고 걷자. 응?”

욕을 해도 물러나지 않는다. 화가 났다. 벨리타는 너무도 피곤한데 계속 말을 걸고 무얼 하자 조르니 짜증이 난다. 걱정인 걸 알아도 거슬리고 귀찮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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