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오웬의 손이 무릎을 넘어 침대 위에 널브러진 손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작은 손을 끌어 허벅지 위에 얹는다.
다소곳이 벨리타의 허벅지 위에 놓은 손을 고쳐 잡은 오웬이 벨리타의 안색을 살핀다.
“내가 다 미안해.”
마탑주인 오웬의 아버지가 오더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신전도 해내지 못한 걸 오웬은 해내었지만 벨리타가 바라는 결과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이다.
오웬은 마력을 뻗어 벨리타의 실제 몸에 흘러들어갔을 때 느꼈던 오싹한 감각이 떠올랐다. 영혼을 간신히 붙들고 있던 망가진 신체.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겨우 실낱같은 기력만 맴도는 육체 속을 헤매었다. 벨리타와 비교도 할 수 없는 처참한 몸.
마법인지, 발달한 의학 덕인지 생명만 유지하고 있는 죽은 몸이었다. 혼이 돌아가더라도 얼마 가지 못한다. 나아질 가능성조차 없다. 이미 기력은 희미하고 혼의 끝자락만 붙잡고 있는 신체는 신관이 신력을 쏟아도 해내지 못할 것이었다.
그리 망가진 몸을 본 적이 없었다. 시체와 다름없는 육체를 마력으로 헤집는 감각은 소름 끼치게 역겨웠다. 벨리타에게 전해주어도 될까 싶을 정도로 부수어진 것들은 참혹할 지경이었다. 그 몸으로 벨리타가 눈을 뜬다고 생각하면, 눈물이 나올 만큼 서러워지게 되었다. 내심 돌아가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녀는 돌아가지 않았다.
차라리 돌아갔다면 잠깐이라도 행복했을까.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음에도 오웬은 벨리타에게 미안함을 가졌다. 오웬이 벨리타의 무릎에 이마를 기댔다.
“더 일찍 시도했어도 결과는 같았을 거야. 그러니까 벨리타, 너무 상심하지 마.”
대답이 없다. 오웬은 차마 벨리타를 볼 자신이 없었다. 그저 치마폭에 얼굴을 묻고 고해성사와 다름없는 위로를 건넸다.
“네 선택은 언제나 옳잖아. 딸도 이해할 거야. 네가 얼마나 힘든 결정을 했는지 알 거야. 넌 최선을 다했잖아.”
단단한 껍질을 두드리고 나면, 벌어진 틈새로 보이는 속알은 여리고 쉽게 문드러진다. 벨리타의 알맹이는 이미 썩은 내가 풍기는 상한 것이었다. 더는 썩을 수도 없어 삭아 버린, 남지 않은 알맹이였다.
벨리타는 고개를 숙였다. 오웬의 잘못이 아님을 안다. 최선을 다해 준 것도 안다. 그냥, 조금은 쉬고 싶어졌다. 다 놓고 죽은 듯이.
진심 어린 위로마저 위선이었고 기만이었다. 벨리타에게 있어서 그랬다. 화를 낼 힘도, 악을 쓰며 울 힘도 남아 있지 않다.
벨리타는 바짝 마른 입술을 달싹이다가, 붙들린 손을 빼내어 들었다. 작고 하찮게 나가라는 제스처만 취한다. 오웬은 더 매달릴수록 벨리타만 버겁게 함을 알고 쉽게 물러났다.
손가락을 휘둘러 마법으로 치렁치렁하게 늘어진 드레스만 벗겨낸 후, 의자에 얹어놓았다. 옷이 불편하면 기분마저 저하되니까. 오웬은 최소한의 도움만 준 뒤 문을 열었다. 복도를 밝힌 촛불의 빛이 문틈으로 쏟아졌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 난 네 편이야.”
소리도 없이 문이 닫혔다. 어둠만 남는다. 벨리타는 상체를 뉘여 침대에 쓰러졌다. 피곤하다. 피로가 덮쳐 벨리타는 속절없이 눈을 감았다. 봄이었음에도 한기가 들었다.
엄□, 그냥 행■해. 행복했□면 좋겠□.
나 때■에 고생 많□ 했■아.
엄마■ 이제 ■마 인생 살아.
못 했■ 거 다 하■서.
그렇게 살아.
□랑해.
못난 딸이□서 미안□. 사랑해, 엄마.
고마□.
□안해.
하얗기만 한 공간이었다. 발밑에는 희고 까슬한 바닥만 있었다. 벨리타는 오로지 바닥만을 의지하여 걸었다. 위를 보고 고개를 좌우로 돌려도 컴컴할 뿐이어서, 그저 걷기만 했다. 바닥에 쓸리는 감촉이 부슬부슬하다.
낭떠러지로 추정될 곳까지 걸으니 검은 계단이 놓여 있어 마냥 발만 움직인다. 바람도 없고 무엇이 있을지도 모를 공간에서 벨리타는 계단을 올랐다.
꽤 많이 오른 것 같았는데 끝도 보이지 않는다. 벨리타는 뒤를 돌아보았다. 계단은 보이지 않고 발자취를 남겼을 바닥만 보였다. 멀리서 보니 검은 조형물이 불규칙적으로 놓여 있었다.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에도 알 수 없어서, 더 멀리서 보면 정체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벨리타가 계단을 마저 올랐다. 천천히 얹어지던 발이 점점 속도를 냈다.
열심히 달리는데도 계단은 끝이 없고 숨도 차지 않는다. 어디까지 가야 할지 갈피도 잡지 못하고 뛰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지도 모르고 얼마나 뜀박질을 한지도 모르겠다.
벨리타는 태연하게 다시 뒤를 돌았다. 조형물이 보였다. 한참이나 작아진 검은 조형물들은 흰 바닥 위에서 규칙을 이루었다. 글자다. 하얀 건 종이였고 검은 건 글이었다.
멀리 있을수록 작아지는 글을 열심히도 읽었다. 간혹 알 수 없는 문자가 있었음에도 읽을 수 있었다.
이건, 그래. 딸이 쓴 편지. 닿을 수 없어진 관계를 위해 마지막으로 남겼을 편지였다. 딸에게 편지를 마지막으로 받은 건 딸이 초등학교 즈음이었나. 그때 이후 십 년 이상이 지나고서야 편지를 받았다. 마지막일 편지. 더는 받지 못할 딸의 연락.
너 없이 내가 어떻게 행복하겠어. 내 인생은 넌데, 내 전부는 너인데. 가족도 피붙이도, 나의 일생이 전부 그곳에 있는데 내가 행복할 수 있겠니.
못나고 부족한 엄마 밑에서 너무 잘 자란 딸이 부쩍 성숙해졌음을 느꼈다. 아직도 제 속에서는 아이였는데. 엄마를 위해 편지를 쓰고 걱정도 해 준다. 언제 이렇게 컸을까. 계속해서 아가일 줄 알았는데.
벨리타는 계단 위에 걸터앉아 거대한 글을 거듭 몇 번이고 읽었다. 뇌리에 박힐 때까지. 보지 않아도 외울 수 있을 만큼 읽었다.
사실 벨리타는 강한 사람이 아니다. 강해야만 했던 사람이었다. 아비도 없는 자식을 품에 안고 험한 세상을 살기 위해서 독해야만 했다.
소심하고 쓴소리 못 하던 처녀 적의 벨리타는 이미 없다. 배운 게 없어서 큰소리를 쳐야 쟁취할 수 있었고 손해 보지 않으려고 쓴소리를 해야 했다. 세월에 깎이고 굴려져 초라해진 스스로를 돌아볼 새가 없었다.
벨리타는 문득 제 어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유품이라도 남아 있었던 현실과 다르게 그리워할 매체도 없다. 낡고 빛바랜 기억만 들추었다. 차라리 쓰러지고 싶을 시기에 몇 번이고 떠올렸던 벨리타의 어머니는 얼굴마저 희미하다.
이미 충분히 외우고도 남을 정도로 본 딸의 편지를 쉴 새 없이 읽으며 벨리타는 무릎을 세워 몸을 웅크렸다.
꿈이어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숨도 막히지 않다. 그저 지독하게 외롭고 고요하다.
흰 종이가 끝부터 부스러졌다. 서서히 찢어지기 시작한 종이는 글자까지 형체도 남기지 않고 아래로 추락했다. 안 돼. 아직 충분히 읽지 못했다. 놓아줄 준비가 되지 않았다.
다급히 몸을 일으켜 계단을 내려갔다. 두세 칸씩 성급하게 발을 내디디며 뛰었다. 끝도 보이지 않을 어둑한 밑바닥으로 딸의 편지가 하늘거리며 사라진다.
쿵. 발을 헛디뎌 계단에서 굴렀다. 목이 엇나가고 팔이 뒤틀리며 한참 올랐던 계단을 뒹굴었다. 뒤통수가 계단 모서리에 박을 즈음에 시야에 빛이 들었다. 몹시도 환하고 밝아서 벨리타는 눈을 질끈 감아야 했다. 빛이 점멸한다.
“아가씨, 왜 울고 계세요. 악몽 꾸신 거예요? 괜찮으세요?”
벨리타는 너무도 울어 제대로 떠지지 않는 눈을 거듭 감았다 떴다. 엘라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젖은 천을 벨리타의 눈가에 댔다. 따끔거린다. 눈가가 부어 터져라 울었나 보다.
흐린 시야 사이로 화창한 햇볕이 넘나들었다. 눈이 부셔서, 또다시 눈물이 났다. 차가운 수건이 눈두덩이에 얹어진다. 가려진 시야 탓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예민하게 들렸다.
근처의 이불이 깊이 패고 손등에 온기가 닿았다. 엘라가 벨리타의 손을 잡아 손등을 토닥거린다.
“무슨 악몽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다 꿈이에요. 아가씨께서 근래에 일이 많으셔서 지치셨나 봐요. 아, 차를 내올까요?”
세뇌라도 당하는 기분이었다. 자신의 삶은 꿈이었고 이곳이 현실이 아닐까 싶은 충동마저 들게 했다. 너무 긴 악몽이어서 구분조차 되지 않는 지독한 꿈이었던 것처럼. 거짓이라고 여겼던 모든 게 진실이고, 자신만이 거짓이었다는 착각이 든다.
“아니면 단 걸 좋아하시니까, 식전에 디저트를 내올까요? 단 걸 먹으면 기분이 나아지실 거예요.”
단 걸 좋아했던가. 벨리타도 몰랐던 취향이었다. 비싸기만 하고 배도 안 차는 간식거리를 좋아했었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생각하고 싶지 않다. 가만히 누워서 아무 생각도 없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숨 쉬는 것조차 번거로웠다.
묵묵부답인 벨리타를 의아하게 여겼지만 괴로운 악몽 탓이리라 어림짐작한 엘라가 슬쩍 손등에 자신의 볼을 기댔다. 근래에 벨리타를 찾는 사람이 많아서 독차지할 수 없었으니 이렇게라도 사리사욕을 채우려던 속셈이다.
벨리타의 손을 놓은 뒤 침대에서 일어난 엘라는 걱정이 가득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우유에 꿀을 타고, 과일과 디저트를 가져올게요. 눈 좀 식히고 계세요. 우시면 저 정말, 정말 마음 아파요.”
가벼운 발소리가 들리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고요 속에 멀리서 새의 지저귐이 들린다. 아, 주옥같다. 아주 주옥같다. 욕 말고 나오는 단어가 없었다. 눈물이 그치지 않는다.
*
“시원하게 얻어맞고 왔나 보군.”
서류를 달싹이던 잭슨이 소파에 앉은 소르니를 흘겨봤다. 드레스에 얼핏 가려진 쇄골에 시퍼렇게 멍이 든 소르니가 덤덤한 태도로 차를 홀짝인다.
“언제는 아닌가요. 공작님의 손버릇이 워낙 지독해야죠. 이번에 벨리타를 사교 파티에 데려갈 예정이에요.”
바스락, 서류가 구겨졌다. 잭슨의 시선이 소르니를 향했다. 다리를 꼬고 찻잔을 내려놓은 소르니가 잭슨을 보았다. 창문에서 내리는 빛 탓에 잭슨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아도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짐작이 가서, 굳이 보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소르니가 작은 초대장을 꺼내 가볍게 흔들었다.
“파티에 온다고 하네요. 소문의 근원지가요. 아마 소문을 더 부풀릴 예정이겠죠.”
“벨리타를 왜 데려가느냔 말이다.”
“어머, 당연히 많은 사람들 앞에서 무릎 꿇려 놓고 잘못을 빌게 만들어야죠.”
홀의 한가운데에서 소문을 낸 당사자가 벨리타에게 무릎 꿇고 애원하며 용서를 구하는 모습이 선연하게 그려졌다. 많은 사람들의 앞이니 헛소문이었음도 알릴 수 있고, 체르핀 공녀의 소중한 단짝이라는 사실도 만인에게 공표할 수 있었다.
섣불리 벨리타를 건들지 못하도록, 벨리타의 뒷배는 황후가 될 체르핀 공녀가 싸고돌아 주겠다는 셈이다.
물론 그 후에 문제의 당사자는 잭슨의 손아귀에서 쥐어짜진 후, 편히 죽지 못할 거다. 그자는 2황자의 최측근이었으니까. 어찌나 정체를 감추고 몰래 소문을 퍼트렸는지 찾는 시간도 오래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