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푸른빛의 마력이 어두운 밤을 밝히며 벨리타에게 뻗어 나갔다. 조심스럽게 육체를 감싸고 살갗 안으로 파고든다. 섬세한 다정함. 벨리타가 기분 좋게 눈을 감았다. 마력을 다룰 줄 알게 되니, 오웬의 마력을 감싸 보호할 수 있었다.
아득히 넘실댄다. 불쾌한 감각도 들지 않았다. 보이지 않을 먼 곳까지 솟아 혼의 흔적을 찾는다. 그리고 연결. 벨리타의 실체가 존재하는 곳까지 흐르고 또 흐른다.
벨리타는 속이 울렁거림을 느껴졌지만 참아냈다. 이 정도는 견뎌야만 했다. 어느 순간부터 걷잡을 수 없이 멀어진 푸른빛을 쫓았지만 역부족이었다.
홀로 뻗어 나간다. 어둠을 유유히 밝히며 솟구친다.
움찔, 오웬의 몸이 떨렸다. 돌연 마력이 끊어졌다. 몸 안을 가득 채우던 힘이 바스러지는 게 느껴졌다. 저번처럼 실패인가. 다리가 풀려 어쩔 도리 없이 주저앉았다.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오웬이 갑작스러운 숨을 들이켰다. 수풀에 주저앉아 더러워진 치마는 뒷전이었다. 오웬은 창백해진 낯을 감출 새 없이 초조하게 눈을 떴다.
할 말이 많은데 할 수 없는 듯 보였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일렁거리며 밀려오는 불안감과 두려움이 무서워서, 벨리타는 더러워진 치마를 쥐었다. 오웬이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왜? 뭐가 문제인데? 내 마력이 문제야? 부족해서 그래?”
“…….”
“말 좀 해 봐, 내가 부족해서 그런 거냐고! 술식이 잘못된 거야? 응?”
파르르, 손끝이 떨리는 채 오웬이 입을 틀어막았다. 두려웠다. 돌아갈 수 없을까 무서웠다.
벨리타는 소리를 질러가며 답을 채근했다. 몇 번이고 지르는 소리에 오웬은 가린 입을 내릴 새 없이 답했다.
“결정, 해야 해. 벨리타.”
“뭘? 빨리 말 좀 해 봐, 답답해서 돌아버리겠으니까!”
뜸을 들인 오웬이 꾹, 주먹을 쥐며 벨리타를 내려다보았다.
“네 몸은 이미…… 손쓸 도리가 없어졌어. 죽지 않은 게 신기할 지경이야.”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네가 어떻게. 고작 영혼을 쫓아간 것뿐이면서.
“혼이 연결되어 있어서 숨은 멎지 않았지만, 머지않아 끊어지겠지. 네가 돌아가면 몇 달은 버틸 수 있을 거야.”
돌아갈래. 몇 개월 살지 못하는 시한부여도 돌아가야겠다.
“혼을 끊으면, 몸은 바로 죽어 버릴 거야. 그런데 벨리타, 그게…….”
다음 말을 기다릴 가치도 없다. 벨리타는 여태까지 단 하나의 목표만을 바라고 달려왔다. 아이들에게 정을 주었어도 제 자식만 하지 못하다.
산에서 굴러떨어졌다고 이미 몸이 박살 나 있어도 상관없다. 딸의 손만 잡을 수 있다면, 아들의 사진을 볼 수 있으면 됐다. 가족에게 안부 인사를 전하기만 하면 만족했다.
“아마, 몸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서. 도움 없이는 버틸 수 없을 거야.”
그 말은 즉, 딸의 수발 없이는 몇 개월조차 살 수 없다는 뜻이다. 딸을 보겠다고 딸을 고생시켜야 한다.
이미 망가져 손쓸 도리도 없어진 몸뚱이의 욕창을 닦아내고 배설을 받아내며 손이 벌벌 떨릴 병원비를 감당시켜야 한다. 보험비보다 병원비가 더 많을 테지. 고생만 죽도록 시키고 그냥 죽어 버린다.
돌아가는 것도, 자신의 욕심이었나. 내 자식 보겠다는 것마저 내 과분한 바람이었나.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너무도 황당하고 참혹한 상황에 놓여 제대로 된 사고조차 되지 않았다. 욕심을 부려서 딸을 고생시켜가며 마지막 짧은 생이라도 영위하고 싶었다. 그러고 싶었다.
곱게 다림질된 치마가 사정없이 구겨졌다. 사지가 덜덜 떨린다. 이렇게까지 참담할 수가 있을까. 벨리타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 짜내야 했다.
“나는, 난…….”
입이 틀어 막힌 듯, 목구멍이 무언가로 가로막혀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딸을 보고 싶다. 목소리라도 듣고 싶다. 귀찮게 하지 말라는 짜증마저 듣고 싶다.
아직 딸의 소설도 다 읽어 보지 못했고, 축하한다고 외식조차 시켜 주지 못했는데. 딸은 집안일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데. 보험을 얼마나 들어 놓았는지, 집문서가 어디에 있는지 이야기해 주지 못했다.
이렇게 떠날 줄 어찌 알았으랴. 알았더라면 다 알려 줬을 거다. 텔레비전 서랍 아래, 테이프로 집문서를 붙여 놓았다는 것과 보험이 여섯 가지나 된다는 것, 방에 있는 화장대 맨 아래 칸에 금붙이들을 모아 놓은 곳과 통장의 비밀번호가 아들의 태어난 시간이라는 것도. 홀로 남을 내 아가가 불안해서라도 모조리 알려 주고 떠났을 텐데.
너무 안일했다. 산에서 굴러떨어져 죽기 직전까지 될 줄 알았더라면. 돈을 더 악착같이 모아둘 걸 그랬다. 결혼이라도 빨리 하라며 재촉할 걸 그랬다. 험한 세상 속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질 걸 생각하면 심장이 내려앉는다.
최소한 찌개를 끓이는 법이라도 알려 줄걸. 혼자 살아가기에 필요한 것들을 알려 주어야 했는데.
언제나 곁에 있으리라 오만하게 생각했다. 결혼을 하고서도 신혼집에 들락거리며 반찬과 김치 따위를 줄 수 있으리라 편하게 여겼다. 사람은 너무 쉽게 떠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부모님을 보내드릴 때에도, 아들이 병원에 가지 못해 죽어 버렸을 때에도 절절히 느꼈으면서 왜 자신은 그러지 않으리라 생각했을까.
사람을 고용할 돈도 없다. 병원비를 부담할 돈조차 없다. 딸이 모든 일을 내팽개치고 숨넘어가기 직전인 자신을 보살펴야 한다.
이미 고생을 죽도록 시켰는데 어떻게 더 고생을 시켜. 가진 것 없는 엄마 밑에서 태어나 고생만 한 딸에게 어찌 그러겠는가. 되레 짐일 것이다. 딸에게 짐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보고 싶어도, 손 한번 잡아 보고 싶어도 다 벨리타의 과분한 바람일 뿐이다.
딸을 위해서라도 빨리 죽어 버리는 게 옳았다. 죽고 싶지 않았는데. 딸이 결혼하고 애를 낳았을 때 산후조리까지 돕고 싶었다. 미역국도 끓여 주고 딸이 바쁠 때에는 손주를 돌보며 노후를 보내길 바랐다.
삶에 미련이 많았다. 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근래에 찍은 사진도 없어 젊었을 적 찍은 사진이 영정사진이 되겠지. 딸 혼자 내 장례를 지키겠지.
미안해서 어떡하나. 엄마가 모자라서 고생만 하는구나. 소중한 내 딸, 고아로 만들었구나.
벨리타는 어떠한 표정도 짓지 않았다. 감정이 솟구쳐 넘치고야 말아서, 끝내는 텅 비어 버리고 말았다.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생각이 스치고 부풀었지만 찰나의 순간이었다. 고민도 길지 않았다. 짧은 순간, 벨리타는 이어지는 답을 내놓았다.
“끊어.”
“뭐?”
“끊으라고. 혼이고 나발이고. 끊어 버려.”
돌아가고자 그리 난리를 쳤으면서 정작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순간만큼은 간결하고 담백했다.
오웬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바랐으면 부득불 돌아가겠다고 우겨야 하지 않던가. 오웬의 입장에서는 무척 기쁜 상황이었다. 첫사랑은 이곳에 남아 자신과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가능성이 열렸고, 6서클까지 쌓을 수 있던 마력을 소모해가며 고생하지 않아도 됐다.
벨리타를 좋아하는 다른 이들에게도 좋은 상황일 터였다. 기뻐해야 하는데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오웬은 목 안쪽 깊은 곳이 울렁거리는 게 느껴졌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흐트러져 벨리타의 얼굴을 가린다. 어떠한 표정인지 알 수 없었다. 들판에 주저앉은 여인의 실루엣마저 처량해서, 따뜻한 봄바람에 상처를 입는 듯 보이기까지 했다.
부대끼는 나뭇잎 소리가 스산했다. 오웬은 다시금 마력을 뻗어 벨리타와 멀리 있을 육체와 연결된 혼을 끊어 버렸다. 고스란히 돌려보내기는 버거워도 끊어내는 건 쉬웠다. 가느다란 연결점을 잘라내고 흩어지지 않게 마력으로 감싸 몸에 들여보내기만 하면 됐다. 그거면 됐다. 너무도 간단하게. 그리 노력한 게 우스울 정도로.
혼을 끊어냈다는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둔해 빠진 몸이어서 그런 건지, 마력이고 영혼이고 느끼지 못하는 멍청한 사람이라 그런 것인지 모른다.
그저 막연하게 닥쳐왔을 뿐이다. 모두 끝이 났다는 게. 그동안 발버둥 친 게 무색하게 순식간에 끝난 일이었다. 현실감이 들지 않는다. 아무 감각도 없다. 느껴지는 게 없었다.
발목을 간지럽히는 잡초도 느껴지지 않았고 머리카락에 얼굴에 들러붙어 거슬림도 느껴지지 않는다. 하나둘씩 꺼져가는 수도의 불빛을 보고도 어떠한 감상이 들지 않았다.
오웬은 위로의 말을 건네지도 못하고 벨리타를 내려다보았다. 초라하고 허름하다. 값비싼 드레스를 입고 장신구를 하고, 곱게 손질한 머리를 해도 그래 보였다.
절망적이겠지. 오웬은 가늠하지 못할 감수성을 애써 자극해 보았다. 공감은 되지 않지만 이해는 됐다. 오웬에게는 최선이었다.
같이 울어 주지는 못해도 벨리타가 추스를 때까지 기다릴 수 있었다.
쏟아내듯 울고, 할 수 있는 만큼 버거워하면 오웬은 묵묵히 곁을 지키며 식은땀을 닦아 주고 가녀린 어깨를 안아 줄 수 있었다.
울지 않는다. 우는 걸 기다렸다는 뜻은 아니었지만, 오웬의 앞에서 곧잘 무너져 울곤 했던 벨리타였으니 으레 그러리라 생각했다. 분명 그럴 거라 생각했는데 울지 않았다. 앉은 그대로 굳어 숨만 고르게 몰아쉬었다. 생각보다 힘들지 않은가, 무심코 생각했지만 벨리타의 앞에 마주 앉아 얼굴을 들여다보고는 오판임을 느꼈다.
넋을 놓은 것이다. 너무도 버거워 자신을 놓아버렸다. 오웬은 짐작보다 상황이 심각해졌음을 알고 서둘러 벨리타를 감싸 안았다. 몸이 차가웠다. 벨리타의 속도 모르고 태평하게 서 있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오웬이 다급히 벨리타를 불렀지만 대답은 없었다. 오웬은 다급해졌다. 몸이 차갑고 가늘게 떨린다. 숨만 쉬었다.
우선 휴식을 취해야 한다. 이대로 두다간 걷잡을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런 걱정이 불현듯 들었다.
벨리타를 부둥켜안은 오웬이 조용히 주문을 읊조렸다. 푸른 언덕, 운치 있는 공간에서 빛이 품어졌다가 사라졌다.
조용히 벨리타의 방으로 순간 이동 한 오웬이 벨리타를 침대에 내려놓았다. 다리뿐만 아니라 몸이 후들거려 불안정해 보였다.
넓게 트인 창 너머로 달빛이 은은하게 내렸다. 문 너머로 하녀들의 조잘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바스락거리는 수풀의 소리도 울린다. 다 잃은 벨리타는 모든 감각을 잊은 듯,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어쩔 줄 모르겠다. 차라리 울고불고 자신을 원망하는 게 나았다. 호흡만 하며 멈춰 있는 벨리타를 보는 건, 기분이 좋지 못하다.
오웬이 벨리타의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화려한 치맛자락 너머에 있는 가느다란 무릎을 쥐고 고개를 들었다. 적나라하게 보이는 벨리타는 낡고 해져 있는 망가진 시계처럼 그저 멍하게 허공만 바라봤다.
초점마저 없었다. 어찌하면 좋을까. 가뜩이나 위태로웠던 사람인데, 지금은 벼랑 끝도 아닌 망망대해에 혼자 버려진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