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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88화 (88/150)

88화.

조슈아는 호들갑을 떨지 않고 손을 내민 그 자세를 유지하며 잔잔히 말을 이었다.

“사람에게 각자 계절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내가 겨울이 와서 쉬어도, 다른 사람들은 아직 여름이어서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도 알았고요. 겨울이 오면 봄이 오듯이, 내가 지쳐도 후에는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 걸 알아요.”

벨리타는 조슈아의 반대로 돌렸던 고개를 바닥을 향해 떨구었다. 조용히 흩어지는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영애께도 겨울이 찾아왔나 봐요. 봄이 오기 전에요.”

“…….”

겨우 고개를 들었다. 일그러진 미소가 낡아 해졌다. 하녀가 손질해 주었을 머리가 단정했다.

벨리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불 안에 구겨 넣었던 팔을 들었다. 느리고 초췌했다. 손 앞까지 다다를 순간을 기다리며 조슈아는 굳이 말을 얹지도, 손을 더 내밀지도 않았다. 신이 자비를 베풀어 줄 때까지 기다리고 인내했다.

비로소 닿는다. 며칠 제대로 먹지 않아 앙상해진 팔을 손에 얹었다. 온기가 느껴졌음에도 차가운 기운이 들었다.

조슈아는 차분하게 가녀린 팔목 위로 팔찌를 둘렀다. 조심스럽고 섬세한 손길이었다. 금줄 사이에 드문드문 낀 초록색 보석들이 벨리타의 눈과 같았다. 벨리타는 조슈아와 팔찌를 거듭 번갈아 보았다. 금색의 머리카락이 손등에 흘러내렸다.

간지럽다. 속이 울렁거렸다. 벨리타는 자신에게 정말 겨울이 찾아온 걸까, 홀연히 생각했다. 쪽, 손가락 끝에 입술이 닿았다. 조슈아가 벨리타의 약지 손가락 끄트머리에 입술을 맞댔다. 의미를 알 수 없는 행동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입술을 문대지 못해 안달이었는데도 조슈아는 손가락 끝에 겨우 입을 대고는 수줍어했다.

한데 모아 묶은 금색의 머리카락이 조슈아의 어깨로 흐르고 마주치는 시선에 배시시 웃는다. 황송하고 감복하다는 듯. 귀한 사람에게 귀하게 대하듯. 벨리타는 울컥하는 심정을 알 길이 없었다. 위로받았나 보다. 막연히 생각했다.

“……고마워요. 소중히 할게요.”

환하게 웃는 조슈아가 반짝거린다. 행복하고 기뻐서 감격스럽다는 듯이 웃는다. 고작 말 하나로. 인사치레일지도 모를 문장 하나에 고마워했다.

벨리타의 가슴 안쪽으로 퍼져나가는 열기가 생소했다. 겨울이 닥쳤음에도 그리 차고 매서운 겨울은 아니었나 보다. 불씨 하나 꺼트리지 않을 온건한 겨울이었다.

“다음에 또 올게요. 그때는 같이, 괜찮으시다면……. 휴식을 해요.”

“응, 좋아요. 그래요.”

그때가 올지는 모른다. 언제 떠나게 될지 모르는 현재였다. 그럼에도 귀엽고 하찮은 약속쯤은 거절하지 않고 싶었다. 지키지 못하더라도 그러자, 언제 한번 밥 먹자, 하는 것처럼 무심코 하게 되는 것이다.

온화하게 피어오르는 벨리타의 미소는 조슈아를 행복하게 했다.

“내가 준 선물은 왜 안 하고 다녀요? 마음에 안 들어?”

무심코 던져진 질문에 조슈아는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신경 쓰고 계셨다. 조슈아가 말을 더듬으며 변명했다.

“너무 고마워서,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어요. 크라바트 장식이요, 정말 마음에 들어요.”

“아끼다 똥 돼요. 모셔만 두지 말고 쓰고 다녀.”

아깝고 소중해서 장식장에 곱게 모셔 두었던 크라바트 장식. 은빛의 보석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자신을 위해 골랐다는 실감이 드는 선물이었다.

조슈아는 감히 자신이 사용해도 될까, 고민했지만 사용하라는 벨리타의 낯이 진지해서 그만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벨리타가 사용하고 있음에 더욱 기뻐해 줄 것을 알았으니까.

미련이 가득하지만 안정을 위해 조슈아가 떠나고, 벨리타는 한참 팔찌를 들여다보았다. 곱다. 참 고왔다. 이렇게 귀한 걸 받아도 될까 싶을 정도로.

저도 모르게 미소가 터진다. 입가가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꼬르륵, 처량하게 배꼽시계가 우는 소리가 났다. 밥을 먹어야겠다. 아주 든든하게. 벨리타가 종을 울렸다.

*

일주일가량이 흐른 뒤, 벨리타는 완전히 회복했다. 아직 다 끝이 난 것도 아니었고 오웬이라는 희망이 남아 있었기에 벨리타는 기운을 낼 수 있었다.

망아지처럼 저택을 누비는 벨리타에게 오웬이 얼굴을 보여 주지 않은 건, 벨리타가 신전에서 돌아오고 난 후부터였다.

오웬은 이따금씩 언데드처럼 걸어 나오고 포션을 입에 때려 부은 뒤 다시 연구실로 들어가길 반복했다. 잠도 자지 않고 끼니도 대충 때워가며 연구에 몰두하는 듯했다. 벨리타가 오웬과 만나지 못한 지 이 주일이 지났다.

해가 지는 저녁, 벨리타는 데이비드와 정답게 둘러앉아 아카데미 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숙사 생활을 하지 않았냐는 벨리타의 질문에 데이비드는 본래는 기숙사 생활을 했지만, 이번 학기부터는 저택에서 등하교를 한다고 전했다.

부모님과 종종 편지를 주고받는다고 말하는 데이비드는 근래 들어 부쩍 밝아지고 무척 사랑스러워졌다. 생기가 돌고 곧잘 웃고는 했다.

해 줄 만큼은 해 주었다. 벨리타는 대화가 부족하다 못해 말라비틀어진 가족에게 충분히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했다. 데이비드가 친구와 함께 사 온 디저트를 맛보라며 작은 상자를 열었다.

이온이 떠오른다. 조슈아의 영지에서 만났던, 좋은 사람. 그때에는 유일했던 사람. 벨리타는 무심코 잼이 발라진 쿠키를 씹으며 중얼거렸다.

“이온 보고 싶네.”

“누구입니까? 또 어디서 사고 친 겁니까?”

경기를 일으키는 수준이었다. 벨리타가 워낙 이곳저곳에서 사람을 끌어와 복잡하게 만들어버리기 일쑤였으니 데이비드로서는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경계 가득한 데이비드의 반응에 벨리타는 조용히 웃었다.

“소이트, 아니 로틀 남작 영지에 있던 디저트 가게 주인. 과자를 참 잘했어. 대화도 잘 통했고.”

선물은 전해 줄 수 있게 배려해 주었지만, 데이비드는 조슈아와 더 얽히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벨리타가 이온이라는 사람을 만나러 간다면 조슈아가 나서서 따라붙을 거고, 최악의 경우 황태자와 공녀도 따라올 거니까. 그렇다고 영지민을 함부로 데려오면 영주에게 무례였다. 절차대로 데려오는 과정도 복잡하고 번거롭다.

데이비드는 이온을 데려오는 게 어떠냐고 섣불리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그렇구나, 또 어디서 이상한 사람을 사귀었구나, 하고 넘겼다.

살가운 대화가 이어지는 중, 불쑥 오웬이 벨리타의 뒤에서 나타났다. 초췌한 몰골이 시체와 다를 바 없어 깜짝 놀란 데이비드가 찻잔을 떨어트렸다. 데이비드의 식겁한 낯짝을 보고 뒤를 돌아본 벨리타도 으아악, 우렁찬 비명을 질렀다.

“가자.”

설명도 없이 벨리타를 낚아챈 오웬이 주문을 외우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망할 순간이동. 몰려오는 하녀들에게 별일이 아니라며 손을 내저은 데이비드가 신경질이 가득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비싼 찻잔이 박살이 났다.

납치당했다. 벨리타는 눈앞에 펼쳐지는 푸른 언덕을 내려다보았다. 주위를 둘러보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허여멀건 하게 뜬 얼굴이 푸석푸석했다. 그동안 얼굴도 보지 못했는데 꽤나 바쁘게 지냈던 듯했다.

오웬이 벨리타를 내려놓았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도 없었다. 여태 보지 못했던 차분하고 무거운 모습이었다.

그저 바라만 본다. 할 이야기가 있는 태도였음에도 오웬은 입을 열지 않고 벨리타를 보았다. 생동감 넘치는 에메랄드빛의 눈과 석양을 품은 머리카락, 보들보들하게 매끄러운 뺨. 자신을 보는 애정 어린 시선.

오웬은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빠짐없이 벨리타를 담았다. 눈과 머리에, 닿는 손에 모두 새겨 넣었다. 벨리타는 불현듯 두려워졌다.

가슴이 요란하게 쿵쾅거리고 목 안쪽이 끓어오른다. 따사로운 바람이 불어 치마폭이 흩날렸다. 두려움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기대감일까. 흥분일까.

벨리타는 떠오르는 일말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 애먼 손만 쥐었다 폈다. 벨리타도 오웬을 담았다. 보랏빛으로 물든 어두운 머리카락. 바람이 흩날릴 적마다 드러나는 반듯한 이마.

단정하지만 무뚝뚝한 노란 눈이 자신을 향할 때면 사르르 녹아버리는 순간과 곱게 벼려진 턱선. 맞추었던 붉은 입술. 벌어진 어깨와 단단한 가슴팍. 로브에 둘러싸여 드러나지 않았던 다부진 근육들.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아직까지도 갈등하며 입을 열지 못하는 오웬에게 먼저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벨리타는 충분한 시간 동안 오웬을 머리에 욱여넣었다.

상냥하다가도 무심한 면도, 괴짜같이 연구에 몰두하는 뒷모습과 수없이 잡아 주었던 단단하고 길게 뻗은 손의 온기. 철저히 이성적으로 굴다가 돌연 감정적인 표정이 되어 버리는 얼굴. 예쁘고 사랑스러운 얼굴. 날카롭고 능구렁이 같지만 결국은 착한 성정.

오웬을 좋아했다. 벨리타는 이미 인정했던 감정을 다시금 상기했다.

떠나는 사람은 바라는 것도 없어야 했다. 미련만 남겨두고 떠나고 싶지 않았다. 같잖은 사심이나 채우자고 장난질 따위를 했어도 감정은 그대로 자라나서 결국은 싹을 틔우고야 만다.

벨리타는 오웬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봄이었다. 바람마저 따뜻하고 멀리 보이는 수도의 불빛들이 아름다운 저녁. 푸르게 돋아난 싹들이 싱그러운 날.

오웬은 울 것만 같은 표정을 지었다.

“……보내기 싫어.”

“가야지.”

“안 가면 안 돼? 나랑 살자. 내가 정말, 잘할게. 원하는 건 뭐든 해 줄게.”

그동안 애써 숨겨 오고 감추어 오던 진심이 비로소 토해졌다. 마지막일 테니 솔직히 이야기해도 좋지 않은가.

벨리타는 그저 미소 지었다. 대답을 바라고서 하는 말이 아니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저 바람일 뿐이다. 이루어지지 않을 소망인 걸 벨리타도, 오웬도 알았다. 투정이다. 잃기 싫어 부리는 칭얼거림.

마지막이다. 모든 게 끝이다. 거짓의 삶도, 죄책감과 괴로움에 몸부림치던 생활도. 이어지지 못할 정을 주고받던 아이들과도 모두.

드디어 딸에게 돌아갈 수 있다. 아들의 기일을 지키지 못했으니 납골당에도 들러야겠다. 가족의 얼굴도 보고 가게도 다시 열고. 딸과 쇼핑도 하고 맛있는 음식도 먹여야지. 같이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도 봐야겠다.

하고 싶었던 말도 실컷 해 줘야지. 사랑한다고. 보고 싶었다고. 내 딸 너무 멋지다고. 엄마는 언제나, 죽어서도 네 편이라고. 모자란 엄마 밑에서 너무나도 잘 커 주었다고. 고맙다고.

몇 번이고 말해 줄 거다. 귀에 딱지가 앉을 때까지, 너무 들어서 외워질 때까지. 다 자라 버린 딸을 안고 몇 번이고.

돌아갈 수 있게 될 순간에는 무척 들뜨고 기쁘리라 생각했는데, 너무 간절히 바라왔던 것이어서 되레 현실감이 없었다.

벨리타는 뒤꿈치를 들었다. 다물어진 입술에 입을 맞춘다. 얼마 문질러지지도 못하고 떨어졌다. 오웬이 입술을 짓씹었다.

“내가 마력을 넣을 거야. 벨리타 너는, 내 마력을 감싸 돕기만 하면 돼.”

미련이 남을까 봐 멀어졌다. 한 발자국 물러난 오웬이 숨을 들이쉬었다. 눈을 질끈 감고 마력을 흘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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