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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87화 (87/150)

87화.

죽었다고 믿을 만큼 처참한 몰골의 벨리타였으니 놀랄 만도 했다. 오웬은 베르의 품에 안겨 늘어져 있는 벨리타를 빼앗듯 안아 들었다. 안는 폼이 익숙해 보였다.

햇볕이 드는 복도를 걸어 비어 있는 침실로 향하며 베르가 상황을 설명했다. 벨리타가 발작하여 의식은 망쳤다고. 울고 몸을 뒤틀어 구토를 했으며 끝내 피를 토해냈다.

묵묵히 베르의 말을 들은 오웬은 이렇다 할 대꾸를 하지 않았다. 할 말을 찾지 못한 것일지도 몰랐다.

한참을 걸어 비어 있는 침실을 찾아낸 베르가 문을 열어 주며 낮은 목소리로 지껄였다.

“신관을 싫어하셨으니 안 좋은 기억이 있으셨을지도 몰라요. 신전에서 돌려보내드리는 건 힘들겠어요.”

“……내가 방법을 찾을게요. 그동안 고생했어요.”

차마 아니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베르는 며칠 동안 벨리타의 집에서 오웬에게 시달렸던 기억을 회상했다.

아침, 밤 가리지 않고 일을 시키고 자료를 구해오도록 부려먹은 오웬에게 예의상 고생한 게 없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저 인간, 불필요한 자료 조사까지 시켰다. 궁금증 해소를 위해서.

베르는 그저 고개만 숙이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러 떠났다.

희미하게 멀어지는 발소리를 확인한 오웬이 길게 한숨을 뱉었다. 그리도 간절히 돌아가고 싶어 했음에도 돌아가지 못했다.

오웬이 손가락을 휘적거려 마법으로 벨리타의 피와 눈물, 말갛게 들러붙은 위액을 소멸시켰다. 피와 위액, 술식을 그었던 액체로 얼룩진 흰옷마저 본래의 상태로 돌아갔다. 갓 씻고 나온 것처럼 멀끔한 차림새였다.

얕게 흐트러지는 호흡이 벨리타의 생사를 확인할 방법이었다. 오웬은 버릇처럼 벨리타의 코밑에 손가락을 대었다. 숨이 닿는다.

그제야 오웬은 안도했다. 벨리타가 기절할 때마다 해 왔던 수순이었다. 가녀린 손을 잡고 머리카락을 쓸어 한데 모아 주는 것까지가.

이불을 당겨 벨리타의 목 끝까지 덮었다. 하얀 얼굴과 맞잡은 손만이 이불 밖에서 존재했다.

그냥, 돌려보내지 말까. 무심코 충동이 들었다. 신전에서도 실패했으니 마법으로도 실패했다고 하면. 방법을 찾지 못했다고만 해도. 벨리타를 돌려보내 줄 수 있는 희망은 오웬뿐이었다. 바람대로 보내 줄지, 곁에 붙잡아 둘지 선택하는 것도 오웬의 몫이었다.

보내지 않으면 첫사랑은 이루어질 수도 있었다. 이전의 삶을 그리워하며 눈물지으면 달래 주고 안아 주기만 해도 될 것이다.

하지만 안다. 보았고 들었다. 딸의 이야기를 하면 빛이 나던 눈망울과 들뜬 목소리. 그리움과 애정이 흘러넘쳐 적시고야 마는 감정을.

사랑한다는 핑계로 벨리타의 행복을 막을 수 없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희생시키는 걸 원하지 않는다. 사랑하니까. 행복하길 바라는 거다. 자신이 사무치는 슬픔에 시달리게 되어도.

온기가 남은 손을 단단히 쥐었다. 마른 입술 사이로 앓는 소리가 샜다. 아픈가.

오웬이 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보랏빛의 머리카락이 아래로 향했다. 쪽, 핏줄이 드러나는 살가죽이 얇은 손등에 입술을 문지른다.

“꼭 돌려보내 줄게. 조금만 참으면 딸, 볼 수 있게 할게.”

바짝 마른 잇새로 단어가 흘렀다. 진수야, 진수야…….

오웬은 벨리타의 손등에 거듭 입술을 문질렀다. 딸의 이름이 진아라고 했으니, 진수는…….

오웬은 어렴풋이 떠오르는 생각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눈치가 너무 빨라서 탈이었다.

진수라는 이름은 또 다른 아이일 터였고 그간 딸의 이야기만 했던 건, 아마도.

식은땀을 흘리며 아이의 이름만 애처롭게 부르짖는 벨리타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여분의 천으로 벨리타의 땀을 닦아 주고 괜찮다며 뇌까리는 것뿐이다.

*

벨리타는 해가 저물고 들짐승이 우는 저녁이 되어서야 눈을 떴다. 기대와 다른 풍경을 확인한 벨리타는 절망해야 했다.

돌아갈 수 없었다. 돌아가지 못했다. 그리도 간절히 바라고 염원했음에도 이루지 못했다. 원치 않은 방법이었음에도 참아내고 견뎌가며 해내었는데 결과는 참혹했다. 낯선 신전의 허름한 방에서 벨리타는 목 놓아 울었다.

역겨운 피를 다 마시고 거친 잎사귀들을 밟아 발바닥이 욱신거렸음에도 무릅쓰고 버텼던 건, 딸에게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때문이었다.

정신을 잃고 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와닿지 않았다. 좋지 않았던 기억이 있었냐는 질문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딸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기억에 남았다는 사실이, 그리도 선명하게 남아 있던 기억이 흐려졌다는 참담함이 괴로웠다.

겨우 묻어두어, 꺼내 보았을 때 무너지지 않게 되었던 기억도 파도처럼 밀려 들어왔다. 매섭게 벨리타를 덮치고 파묻는다. 빛도 한 점 들지 않을 심해 속으로 잡아당기고야 만다.

벨리타는 몸도 세우지 못하고 초라한 침대에 누워 몸을 웅크렸다. 작은 방을 밝히는 작은 촛불 하나마저 벨리타에게는 빛이 되어 주지 못했다.

벨리타가 우는데도 오웬은 감히 손을 잡아 줄 수도, 괜찮다며 다독여 줄 수도 없었다. 자신도 감당하지 못할 깊고 짙은 컴컴한 아픔을 감당할 만큼 자란 사람이 아니었다.

허리를 말아 이불에 얼굴을 파묻은 벨리타의 울음소리만 들었다. 한탄스럽고 서러움이 찢어지는 곡소리만 퍼졌다. 머리카락이 얼굴에 들러붙고 사지가 벌벌 떨려 간헐적으로 두드러지게 들썩이는 몸이 애처로웠다.

핏대가 선 하얀 손이 이불과 베개를 잔뜩 그러쥔다. 긁다가 못내 힘주어 쥔다. 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가도 쏟아지는 비명이 위태로웠다.

한참을 울어 벨리타의 호흡이 아슬아슬하게 이어지자 오웬은 비로소 벨리타의 등을 다독여 줄 수 있었다. 옆에서 침착하게 호흡을 유도하며 벨리타의 등을 쓸어내리고 진정시켰다.

벨리타가 안겨 온다. 오웬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서럽게도 울었다. 진동하는 어깨를 감싸 끌어안고 호흡이 편한 자세로 바꾸어 준다.

간단한 과정에서도 오웬은 자신마저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벨리타의 바람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알아서, 얼마나 괴로운 심정일지 짐작이 갔다. 오웬은 벨리타의 신체를 빠듯하게 부둥켜안은 채 몇 번이고 말해야 했다.

“괜찮아. 다 잘될 거야. 내가 있잖아. 걱정하지 마. 다 괜찮아질 거야.”

잠깐이라도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는 충동이 든 자신을 후회했다. 스스로가 이다지도 멍청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벨리타의 거친 숨과 눈물이 수그러들 때까지 오웬은 벨리타를 다독였다. 조금만 참아. 며칠만 견뎌.

벨리타는 오웬의 옷자락을 구겨져라 쥐고 까무룩 기절했다. 촛불 하나로 의지하던 늦은 저녁이었다.

*

신전에서 돌아온 후의 벨리타는 기력이 없었다. 신나서 돌아다니던 벨리타는 침대에 가만히 앉아 창밖만 물끄러미 바라봤다.

오웬은 벨리타의 주변인들에게 의식이 잘되지 않아 벨리타가 기운이 없다며 나중에 방문해 달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조슈아는 겨우 완성된 장신구를 손에 꾹 쥔 채 문에서 등을 돌려야 했다.

선물만 전해 줄 수 있게 해 달라는 부탁에도 오웬은 완고했다.

자존심도 없이 선물을 들이미는 조슈아를 안타깝게 여긴 건 데이비드였다.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어도 누님에게 선물을 주고 싶어 몇 개월을 들여서 헐레벌떡 가져왔을 조슈아가 불쌍했다. 얼굴도 보지 않고 돌아가도 좋으니 선물만이라도 전해 달라고. 며칠 얼굴도 보지 못한 누님이었지만 선물 하나 전해 주는 건 괜찮을 거다.

“……들어오십시오, 로틀 남작. 선물만 전해 주고 가셔야 합니다.”

조슈아는 단번에 밝아진 안색으로 연신 감사를 되풀이했다. 데이비드의 기분은 묘했다. 이를 세우고 으르렁거릴 때가 엊그제 같은데 자존심도 버리고 고개까지 숙여가며 감사해한다. 자신 못지않게 조슈아에게도 벨리타의 의미는 컸을 거다. 안 된다며 부득불 말리는 오웬에게 고개를 저으며 벨리타의 방을 가리켰다.

황태자도, 공녀도 벨리타를 아꼈지만 데이비드의 관점에서는 조슈아가 더했다고 느꼈다. 찬양 편지만 몇 번을 찢어 버렸고, 벨리타의 신변이 위태로울 때 거듭 마주쳤으니까.

데이비드가 직접적으로 겪은 조슈아는 벨리타에게 간절했다. 조슈아는 선물만 주고 오겠다며 계단을 올랐다. 오웬이 탐탁지 않게 조슈아의 등을 바라봤다.

“벨리타가 또 울면 어쩌려고.”

“괜찮을 겁니다. 로틀 남작만큼 누님에게 순한 개는 없으니까 말입니다.”

태평해 보이기까지 하는 데이비드는 서재로 돌아갔다. 오웬도 연구실로 돌아갔다. 아직 연구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도 응답이 없다. 조슈아는 실례를 무릅쓰고 문을 열었다. 시체처럼 침대에 우두커니 앉아 고개만 돌린 벨리타가 조슈아를 응시하고 있었다. 햇볕이 부스러져 벨리타에게 닿아 빛났다.

조슈아는 그만 무릎을 꿇고 앉아 찬양하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눌렀다. 왜 왔냐는 질문도 하지 않는다. 벨리타는 눈만 데굴데굴 굴려 다가온 조슈아를 보았다.

“영애, 잘 지내셨나요. 그간 격조했어요.”

시선에 피로가 묻어난다. 벨리타는 이미 충분히 지쳐 있었다. 조슈아는 안주머니에 곱게 모셔 놓았던 작은 선물상자를 꺼냈다.

선물상자에서 조슈아에게 눈이 굴러간다. 조슈아가 살갑게 미소 지었다. 달칵, 상자가 열렸다. 주황빛의 보석이 박힌 고급스러운 팔찌였다. 깔끔하고 수수하지만 세공된 금줄이 세세하게 문양을 이루었다.

“귀걸이로 만든 팔찌예요. 오래 기다리셨어요. 참 예쁘죠?”

“…….”

예쁘다. 예쁘지 않을 리 없다. 귀한 보석도, 금 하나하나를 깎아 파텔 가문의 문양으로 새겨 넣은 정성도, 장신구 하나 주겠다며 수고를 들인 조슈아도. 전부 고왔다.

벨리타는 입술을 짓씹었다. 턱 끝이 파르르 떨린다. 받을 수 없었다. 넙죽 좋다고 받을 수가 없다. 들떠서 싱글벙글한 조슈아에게 미안한 감정이 밀려 들어온다.

이불 속에 파묻힌 손이 주먹을 쥐어 자잘하게 진동했다. 벨리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조슈아는 오웬이 한 말의 의미를 비로소 깨달았다.

“제가 채워드려도 될까요?”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은 조슈아가 순하고 살가운 미소를 지었다. 상자 속에 장식된 팔찌를 꺼내어 손에 올리고, 벨리타를 향해 내민다.

벨리타는 조슈아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고개를 돌린다. 명백한 거절에도 조슈아는 내민 손을 거두지 않았다. 기다린다. 벨리타가 돌아볼 때까지. 그대로 머물러서.

“그러고 보니 산에서 하셨던 말이 떠올라요.”

조슈아는 벨리타 너머의 창을 보았다. 푸르게 싹을 틔우기 시작한 봄. 시작을 알리는 계절.

“사람도 가끔은 쉬어 주어야 한다고요. 사람에게도 겨울이 있다고 하셨죠. 저는, 그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그리고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던 수도까지도요.”

묵묵히 고개만 돌리던 여린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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