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잘못이 아닌데도 제 탓이라 스스로를 상처 입히고, 빠르게 철이 들고, 의젓해진다. 속은 어린아이로 남은 채. 참으로 불쌍하지. 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었다는 게 안타깝다. 이곳의 아이들이 흔한 사랑도 받아보지 못하고 자라난 게 한탄스러웠다.
벨리타는 소르니의 등줄기를 쓰다듬듯이 토닥거리며 잔잔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가 행복하겠다 싶으면 결혼하는 거지. 같이 살다 보면 정도 안 들겠어. 너 스스로를 지탱할 수만 있으면 뭘 해도 괜찮아.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설움과 한탄이 섞인 앓는 소리가 방을 울렸다. 소르니의 손이 벨리타를 쥐었다가 놓고, 놓기 싫어 움켜쥔다. 타오르는 붉은 머리를 빗어 주고 어깨를 도닥이고, 착하다고 속삭인다.
소르니는 아무래도 좋아졌다. 다른 사람처럼, 세월을 다 산 노인처럼 굴어도 벨리타는 벨리타였다. 속살거리는 온정이, 닿아 오는 살가움은 모두 벨리타였다.
부부싸움 하면 이리로 와. 편 들어줄게.
장난스럽게 조잘대는 문장마저도 벨리타여서, 소르니는 한참을 울어야 했다.
*
혼자 하는 일, 맞들면 빠르다. 오웬이 들들 볶은 덕이었다. 베르는 며칠 되지도 않아 혼 이동 의식을 알아냈고 생명체를 대체할 개체를 찾아냈다.
신관의 피 한 컵. 베르는 선뜻 자신의 피를 내어주겠다고 했다.
그 후는 일사천리였다. 추기경에게 안타까운 어린 양을 도와달라고 애원의 편지를 몇 통이나 써 보내고 일정도 맞추었다. 베르와 오웬을 제외한 모두는 벨리타의 건강을 찾기 위한 의식인 줄 알았다.
실제로 오웬이 그런 뉘앙스를 풍기며 말을 했던 탓이다.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며 어깨나 으쓱이는 오웬의 엉덩짝을 두둥 탁! 때려 주고 싶은 벨리타였지만 애써 참아냈다.
벨리타는 진정되지 않는 가슴께를 몇 번이고 쓸어내려야 했다. 오늘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이 척척 진행된 게 꺼림칙하고 못 미더웠지만 돌아갈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좋았다.
마중을 나와 준 데이비드와 엘라를 들여보낸 벨리타는 베르와 오웬과 함께 마차에 타고 수도 옆, 히렐바트 공작령에 있는 신전에 도착했다.
허둥지둥 신관들의 손에 끌려간 벨리타는 성수로 몸을 씻고, 입을 청소하고, 맹물과 다를 바 없는 성수까지 들이켜 속을 정화했다. 하얗고 단출한 천 쪼가리 하나 입은 벨리타가 비워진 예배당을 가로질러 걸었다.
창문 너머로 여러 색을 받아 현란하게 내리쬐는 빛과 메스꺼운 향의 냄새. 바닥에 흩뿌려진 정체 모를 잎사귀들. 소수의 신관들이 벨리타가 걸을 때마다 성전을 읊었다. 불협화음이 무척이나 거슬렸다.
벨리타는 간절하게 바라왔던 소망을 되새김질하며 역겨운 속을 다스렸다. 바스락, 잎사귀들을 지르밟는 소리가 퍼졌다.
추기경은 칼과 잔을 베르에게 내밀었고 베르는 주저 없이 자신의 손목을 그었다. 잔에 비릿한 피가 쏟아져 채웠다.
내진까지 다다른 벨리타에게 앉으라는 표시를 한 추기경이 방금 짜낸 피가 채워진 잔을 벨리타에게 건넸다. 마시라고? 이걸? 강압적인 분위기였다.
벨리타는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피를 들이켰다. 비리고 역겨웠으며 혐오스러웠다.
우욱, 헛구역질이 나왔다. 추기경은 뱉지 말라는 말과 함께 의식을 시작했다. 일제히 벨리타를 둘러싼 초에 불이 붙었다. 속사포로 쏟아지는 주문, 불협화음으로 기괴하게 울리는 신관들의 목소리.
벨리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익숙하다. 속이 메스꺼웠다. 질척한 무언가가 타고 올라오는 감각이었다.
‘네가 다 부덕해서 그래. 그럼 애 아빠한테 문제가 있겠니?’
헛숨을 삼켰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잊지 못해 묻어두었던 감각들이 스멀스멀, 개미 떼처럼 기어 올라왔다. 물어뜯기고 부어오른다. 한 군데 성한 곳이 없었다. 의미 불명의 언어들에 휩싸인다.
‘공양을 하셔야 합니다. 전생에 지은 죄가 많아 그럽니다.’
돈 벌려는 수작. 내가 믿을 것 같으냐. 벨리타는 하얀 천을 움켜쥐었다. 입술 사이로 미처 삼키지 못하고 남은 핏물이 흘렀다.
‘애가 저따위로 태어났는데 네 문제가 아니면 뭐니?’
내 탓이 아니다. 이젠 안다. 내 아이를, 내 첫아이를 그딴 식으로 말하지 마. 마르지 않은 주황빛의 머리가 흘러내렸다. 물기가 가득한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이 바닥까지 흐트러졌다.
‘야, 그럼 내 탓이냐? 네 배 속에 있었으니까 네 잘못이지. 무조건 우리 엄마 말 들어.’
그럼 내 탓일까. 만삭이 될 때까지 일만 시키던 네 탓은 아닐까. 산후우울증도 앓아야 했던 내 탓이겠어. 정신병원 치료도 받지 못하고 미친년처럼 심장이 아픈 아기를 안고 마을을 돌아다닌 내 탓이겠니. 모유가 새고 가슴팍을 적셔도 아이 한 번 안아 보겠다고 뛰어다닌 내 문제겠니. 아이를 낳은 직후에도 집을 청소하고 홀로 미역국을 끓여 먹어야 했던 나의 잘못이냐고.
내 상의도 없이 돌연 아이를 친가로 데려가, 울면서 삼을 키우던 강원도까지 내려가야만 했던 참담한 내 심정을 알아? 아이와 함께 살겠다고 구박하는 시부모를 모시고 삼까지 다루어야 했던 내 비참을 이해나 하니. 심장이 아파 죽어가며 우는 내 아이 살리겠다고 옆집까지 뛰어가 차를 얻어 탔던 초조함은 느껴 보았어? 병원을 핑계 삼아 서울로 갈 수 있었음에 안도했던 나의 처참한 심정을 알까.
심장이 아파 잠도 못 자던 내 아이 우는 거 달래주겠다고 밤새워 팔 저려가며 안았던 나를, 억지로 눕혀 끝내 아이를 갖게 하고, 돈뭉치를 던져주며 지우라고 했던 넌 아무 잘못 없었어?
자나 깨나 걱정이었던 내 아기를 옆집에 맡기고 성치 않은 몸으로 병원에 가야 했던 날 동정하지도 않았잖아. 무너지는 가슴과 태어나지도 못했을 아이를 그리워하며 겨우 지켜낸 첫아이를 안고 안도해야 했던 내가 불쌍하지 않았니.
네 번째 아이를, 또 지우라고 했던 남편에게 매달려 낳게 해 달라고 애원했던 그날을 잊을 수 없다. 꼬박꼬박 절에 나가 공양을 드리고 교회에도 가서 기도도 드리겠다며 애걸복걸해서야 둘째를, 아니 다섯째를 품에 안을 수 있었다. 딸이라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남편과 남편의 가족들을 기억한다. 원망한다. 저주하고 있다.
남편이 원해서 가진 가족에게도 무관심해 밖으로 나돌아도 그러려니 했다. 가져오는 돈이 부족해 피붙이를 떼어놓고 식당 허드렛일이나 하던 그 순간에도 괜찮았다. 허구한 날 앓아 울던 첫 아이를, 아들을 살피느라 딸에게 신경 써 주지 못해도 버틸 만했다. 술을 먹고 들어와 자신에게 손찌검을 하던 나날에도 견딜 수 있었다.
밤마다 짙게 깔리는 서러움과 쏟아지는 고독감에 눈물을 삼켜도 좋았다. 주말, 남편이 쉬는 날. 술을 먹고 늘어진 남편과 아이들을 두고 홀로 식당으로 나섰던 날. 구닥다리 핸드폰으로 온 남편의 전화에 더는 견딜 수 없어진 때가 왔다.
‘첫째가 쩌렁쩌렁 울기에 좀 봤더니 숨을 안 쉰다.’
아이를 안아 봤어야 알지. 아이를 들여다볼 줄 알았어야 알았겠지. 살려 달라고 애처롭게 울던 자신의 아들을 그리 죽일 수는 없었을 거다. 미친년이 되어서도 품에서 놓지 못했던 자신의 아들을, 이토록 허무하게 죽일 수는 없었을 거다.
신은 다 부질없었다. 자신의 첫아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아들 제발 좀 살려 달라고 돈을 처박아도. 열 살이 되어도 또래와 뛰어다니지 못하는 내 아이를 불쌍히 여겨 나를 대신 데려가라고 빌어도. 내 아기들, 소중한 딸과 아들, 결혼하고 아이 낳는 것까지만 보게 해 달라고 애원하며 손이 발이 되도록 기도해도 들어주지 않았다.
그때야 정신이 들었다. 남편은 언젠가 자신의 남은 딸까지 잡아먹을, 가축보다 못한 새끼라고.
부모는 산에,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 자신은 아들을, 사랑해 마지않아 자신의 삶과 전부를 내주었던 아픈 아들을 가슴에 묻었다.
그래도 자신의 허리춤까지 왔던 아이가 작은 병 하나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태어났을 적처럼 자신의 두 손으로 충분히 들 수 있게 되었을 때 남편과 이혼할 수 있었다. 남은 자신의 딸이라도 지켜야 했기에 무너져 추스를 시간도 없었다.
신은 언제나 묵묵부답이고, 도움도 주지 않는다. 그저 방관자일 뿐이다. 자신은 몇 년간 그리도 드나들었던 절과 교회에 다시 발을 들이지 않았다. 원망할 구석은 신밖에 없었다. 가족에게도 수치스러워 말하지 못했던 일들과 이렇게 흘러가야만 했던 비참한 자신의 인생을 한탄하고 탓을 돌릴 수 있는 방안은 신을 미워하는 것이었다.
악착같이, 이혼녀라고 손가락질받아도 악에 받쳐서 살아야 했다. 배운 것 없는 계집이 할 줄 아는 거라곤 식당과 공장 일뿐이었으니 내 딸 어디 가서 기죽지 말라고 양말이 찢어져도, 옷이 다 해져 구멍이 나도 돈을 모았다. 그렇게 살아야 했다.
밤마다 사무치는 괴로움과 비참함에 몸을 움츠려도 해가 뜨면 드세고 억척스러워야 했었다. 남편이었다는 무뢰한은 자신의 아들을 죽이고 자신의 인생을 죽였는데도 멀쩡히 살아가더라. 새 가정까지 만들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신만 기억하고, 자신만 상처받은 채 어떻게든 악착같이…….
그럼에도 가슴에 묻은 자신의 아이를 드문드문, 꺼내게 되는 것이다. 몸이 부서져라 바쁘게 살아도 하늘에 해가 뜨는 걸 보게 될 때, 어느새 교복을 입게 된 딸을 보게 될 때, 군복을 입은 사내아이들이 삼삼오오 지나갈 때, 교복을 입은 남학생들이 간식거리를 먹으며 길을 거니는 걸 볼 때마다 묻어 놓은 아이가 흙을 헤집고 기어 나와 자신을 부른다. 미안하기만 한 나쁜 엄마라서, 다 자신의 탓이어서 견딜 수가 없어지기 부지기수였다.
아득한 너머로 다급한 목소리가 울렸다. 질척한 바닥이 차가웠다. 시야가 흐리고 혼탁했다. 몸을 흔드는 손길과 매캐한 향의 냄새가 구역질 났다. 피 냄새가 짙었다. 여러 가닥으로 뒤섞인 목소리가 혼란스럽게 퍼지고 내리쬐는 현란한 색의 빛이 눈부셨다. 검은 손이 뻗어진다.
벨리타는 핏줄이 터진 눈을 여러 번 흐리게 깜빡거렸다. 구역질을 수차례 한 몸이 토사물에 얼룩져 있었다. 피를 마시고 정신을 잃은 벨리타가 경련하고 몸을 뒤틀어 식은땀을 쏟았고 끝내 피까지 토했다. 의식은 중단되었다. 혼절할 수준의 나약한 정신력과 신체가 감당할 수 없었다. 이다지도 무능할 수가 없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벨리타를 끌어안은 베르가 그녀를 살폈다. 벨리타는 악마가 아니다. 몬스터도 아니다. 그랬다면 성수에 이미 발작을 했어야 옳다.
그렇다는 건, 의식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뜻이 된다. 부족한 건 없었다. 벨리타의 집중이 흐트러진 탓이다. 다시 시도를 해 보아도 벨리타가 발작을 하게 되면 수포로 돌아간다. 추기경의 힘을 빌려 돌아갈 수 없음을 의미했다.
상심이 클 것이다. 신관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이유가 발작과 연관이 있을 터였다.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버티라고 강요할 수도 없다.
베르는 벨리타를 안아 들어 예배당을 빠져나왔다. 신관들이 분주하게 뒷수습을 했다. 예배당을 나오자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오웬이 재빠르게 다가왔다. 그리고 주저앉는다.
“…….”
“안 죽으셨어요. 일어나세요.”
“아, 그래요?”
오웬이 멋쩍게 엉덩이를 털며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