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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85화 (85/150)

85화.

귀족들이 나불대다가 가볍게 나온 이야기가 커진 것도 아니었다. 계획적으로, 몰래 시작된 입방아. 고의적으로 퍼지는 구설수였다. 벨리타가 무너지길 바라기라도 한 듯이.

벨리타가 알 필요는 없는 소문이다. 상처받는 모습을 보고 싶지도 않았다. 소르니와 잭슨이 은밀히 소문의 근원지를 조사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며칠 전이었다.

근원지를 쉽게 찾을 수 없는 걸 보면 고의성과 악의가 섞인 건 명백했다. 벨리타와 가까워지지 않았더라면 헛소문을 믿었겠지. 소르니가 귀걸이를 매만졌다.

“전하께서는 워낙 다망하시니 소문에 관해서는 제가 도맡을게요. 벨리타에게도 소문이 좋지 않게 퍼질 수 있으니 찾아오는 건 자제하세요. 로틀 남작에게도 전해 둘 거고 파텔가의 장남에게도 언질을 해 둘 거예요. 벨리타를 위해서니까…….”

오늘까지다. 근원지를 찾아내 소문을 뿌리 뽑기 전까지는 섣불리 벨리타를 만날 수 없다. 공녀로서의 위치도 물론이거니와 자신들이 붙어 있으면 더욱 소문이 퍼져나갈 것이다.

벨리타가 공녀와 황태자, 상단주에게서 버림받았다는 소문이 더욱 긍정적일 터다. 흑마법을 사용한다는 구설수보다야 훨씬.

얼추 대화를 끝낸 잭슨이 먼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소르니는 홀로 남은 정원에서 귀걸이만 만지작거렸다. 하나 남은 내 편. 자신을 그리 아껴주지 않아도 좋았다. 간간이 받는 다정함으로도 충분했다.

소르니는 숨을 들이켜고 저택 안으로 돌아갔다. 벨리타가 있는 곳으로.

*

소르니는 현재의 상황이 무척 어이가 없었다. 방으로 갔더니 벨리타가 작은 단도로 오이를 얇게 잘라내고는 얼굴에 덕지덕지 붙이는 것이 아닌가. 황당한 와중에도 능숙한 칼질이 더 어이가 없었다.

편한 옷을 입게 하고는 식재료를 얼굴에 얹는 것도 당혹스러운데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는 스스로가 당황스러웠다. 벨리타는 사사로운 대화로 혼을 쏙 빼놓고는 거절도 못 하게 만들었다.

오이를 떼어내려고 하니 피부에 좋다며 벨리타가 몇 번이고 만류했던 탓에 소르니는 이제 포기의 단계에 접어들었다. 나란히 누워 있으니 기분만큼은 최고였다.

벨리타가 살갑게 조잘대며 첫 마법이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하자 소르니는 진심으로 축하했다. 얼마나 신이 났으면 이 이야기를 세 번째 하고 있을까. 다섯 번을 거듭 이야기한 벨리타가 화제를 돌렸다.

“잭슨이랑 결혼 이야기 때문에 나간 거지요?”

아니라고 말도 할 수 없고. 소르니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내저었다. 오이 떨어진다며 얌전히 있으라고 혼이 났다.

벨리타는 부끄러워서 그러는구나, 어림짐작하고 흐뭇하게 웃었다. 애정을 받고 자라지 못해 위태로운 아이들이지만 서로를 의지하며 굳건히 잘살기를 바랐다. 서로를 사랑하지 않더라도 나중에는, 먼 훗날에는 서로를 소중히 여기지 않을까.

“결혼하면 나 들러리 세워 줘요. 부케도 받을래.”

“…….”

조용하다. 이곳 결혼 문화에는 들러리도, 부케도 없던가?

벨리타의 기억을 되짚어 보아도 결혼에 관한 일은 없어서 영 낭패였다. 괜한 말을 했나. 고개를 돌리면 오이가 떨어져서 표정을 볼 수도 없었다.

“응, 그럴게. 들러리 서 주렴. 꼭.”

젖은 목소리였다. 결혼이 하기 싫은가. 하긴, 어린 나이에 사랑도 없이 결혼을 하려니 곤혹스럽겠지.

“근데 꼭 결혼할 필요는 없어요.”

딸에게 해 주고 싶었던 말. 해 주지 못했던 말. 먼저 겪었던 사람으로서 하는 오지랖.

벨리타는 차분하고 잔잔하게 말했다. 소르니는 당혹스러웠다. 소르니에게는 결혼이 탈출구였고, 무자비한 폭력 속에서 달아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이었다.

소르니는 입을 힘주어 다물었다. 악문 입술 사이로 서러움이 샜다.

벨리타는 손을 뻗어 더듬거리며 소르니의 손을 찾았다. 이불을 훑고 허리를 간질였다가 배 위에 가지런히 모아진 손을 덮어 쥐었다. 소르니가 소스라치게 움찔, 몸을 떨었다.

“결혼이 전부는 아니더라고요. 결혼하면 내가 해야 할 일은 다 끝나는 줄 알았어.”

공감이 되지는 않았다. 소르니는 수단으로서 결혼을 하려고 했으니까. 혹은 다 끝나도 상관없었다. 지긋지긋한 저택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폭력에서 달아날 수만 있으면 뭐든 좋았다. 돈도, 권력도 하다못해 능력도 없는 공녀 따위가 저택에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결혼뿐이었으니까. 코끝에서 오이의 아삭한 향이 은은하게 맴돌았다.

“그런데 결혼을 해도 내 인생을 계속되고, 나는 여전히 그대로인데 주변만 바뀌어요. 함박 스테이크 먹는 게 소원이었던 것도 그대로고, 음악다방에서 DJ 오빠한테 신청곡도 못 주고 가만히 앉아서 노래만 듣던 것도 똑같은데. 나만 두고 다 달라져. 드레스 입고 하루를 보내기만 했는데 누군가의 아내고, 기혼자고, 새로운 가족이 생기는 게 무섭기도 하더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함박 스테이크도, 음악다방도, 들어 본 적 없었다. 이질감이 들었다. 곧잘 느껴졌던 기이한 감상이었기에 부득불 따지고 들지는 않았다.

소르니는 눈만 데굴, 굴려 다정하게 감싸 쥔 손을 보았다가 옆 눈으로 벨리타를 흘겼다. 결혼도 해 보지 않았을 어린 영애. 남자도 만나 본 적 없는 사람인데도 겪어 본 것처럼 생생해서.

이미 결혼을 한 사람인 양, 쓰라린 세월을 마주한 듯 지친 낯을 하고 있었다.

소르니는 손가락을 꿈지럭대 벨리타의 손을 잡았다. 가녀린 손이 소르니의 손가락을 힘주어 쥐었다. 문득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좋아서 한 선택인데도 무서웠어. 달라진 환경에 맞춰서 나도 변해야 한다는 게 싫기도 했는데……. 그렇게 되데. 신기하게. 요리도 못하는데 남편 해먹이겠다고 칼질하다가 손가락 베어 먹고, 청소하기 싫어서 미뤄만 두던 내가 하루에 한 번은 청소를 하고 앉아 있더라고. 나는 그게 내 행복인 줄 알았어.”

미치지 않았다는 걸 안다. 벨리타는 미친 척해 왔던 게 맞다. 온전한 정신으로 생소하고 알 수 없는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도 알고 있다.

다른 사람처럼, 미혼일 게 분명한 후작의 딸이 날것 그대로의 결혼 생활을 주절거리고 있다는 게 도저히 이해가 되지를 않는다. 공포에 질려야 함이 옳다. 그런데, 그렇지만.

“애를 낳고 나서 정말 죽겠다, 나는 안 되겠다 싶었다가도 그 작고 포동포동한 손으로 내 손가락을 쥘 때면…… 아, 나는 행복하구나. 내 아이 때문에 산다는 게 이거구나. 싶어질 때가 있어. 내 모든 걸 주어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할 때가 와.”

애를 낳아 본 적도 없을 사람이 아이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자 그리움이 넘쳐서 흐른다. 사랑이 넘실대고 행복이 짙어져서 빛바랜 소중한 편지가 되는 것이다. 몇 번이고 읽어 보아 손때가 묻고 수십 번을 접었다 펼쳐 찢어지고야만 오래된 편지가.

소르니는 입술 안쪽을 이로 짓씹었다. 받아 본 적 없는 사랑에 질투가 났다.

무심코 제 어미도 벨리타가 한 말과 같은 감상을 느껴 본 적 있기를 바랐다. 비천한 첩으로 살아온 어머니가 낳아 사생아일 뿐이었던 자신이 기억하지 못할 아득한 옛날에 받아 보았기를 희망했다.

소르니는 자신 스스로가 자신의 아이 덕에 살아 있음을 느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해 줄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다. 경험해 보지 못한 걸 해낼 수 없으니까.

“아이 하나만 보고 결혼하기엔, 잃는 것도 많아. 나는 나로서의 삶이 언제였는지도 까마득해. 행복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지.”

씁쓸하게 번지는 미소가 서글퍼 보이기도 했다. 소르니는 참지 못하고 상체를 세웠다. 오이가 하나둘씩 침대로 곤두박질쳤다.

시야에 온전히 담기는 벨리타의 얼굴. 오이가 덕지덕지 얹어져 우스꽝스러운 낯.

“네가 행복할 수 있는 걸 선택해. 결혼은 도피처가 아니고, 널 구해주지도 않아. 이런 것도 오지랖이겠지만, 그냥 헛소리한다 생각해요. 나를 아끼고 사랑해야 내가 바라는 게 뭔지도 아는 거잖아.”

말을 턱턱 놓아 버렸다. 소르니는 후작의 딸이 공녀에게 말을 놓는 것 따윈 신경 쓸 정신이 아니었다. 흘러넘치는 다정함과 걱정에 잠겨 숨도 쉴 수 없었다. 이런 걱정도, 조언도 들어 본 기억이 없었다. 기괴한 현재의 상황에 작은 불씨가 퍼져 끝내 따뜻함으로 채워 버린다.

오지랖이 맞다. 소르니는 공녀이니 할 수 있는 건 없고 오로지 결혼만이 살 길이었다.

그 후는? 결혼을 한 후는 생각하지 않았다. 결혼을 하고 난 후에서도 이어질 자신의 삶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지, 지옥에서 달아난 후의 삶을 어떻게 꾸려나갈 건지, 가늠도 해 보지 않았다. 받지 않았으니 사랑을 할 줄 모르고,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도 몰랐다.

맥이 풀렸다. 오이가 떨어져 침대를 뒹굴었다.

“예쁘다, 예쁘다 해 줘야 예쁜 줄 아는 것처럼. 사랑한다, 네가 소중하다 해 주어야 자기가 귀한 줄 안대요.”

곁눈질로 소르니를 올려다보던 벨리타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딸에게 해 주고 싶었던 말이었다. 서로가 익숙해서 낯간지러운 말도 하지 못해 후회가 되었던 지난 삶들이.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리라 오만하게 여겼던 세월이 야속하니까.

사랑한다, 내 딸이 제일 예쁘고 곱다, 최고다, 해 주지 못한 게 너무도 한이 맺혀서. 입이 닳도록,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퍼부어 줄 수 있음에도 할 수 없어진 지금이 한탄스러워서.

“소르니야. 넌 참 예쁘고 소중하다. 웃는 것도 곱고. 넌 참 사랑스러운 아이야.”

이불을 적신다. 피부에 들러붙은 오이를 지나쳐 눈물이 흘렀다. 소르니는 북받쳐 오르는 감정이 버거워서 소리를 욱여 삼켰다.

매질에 멍이 들고 찢어진 피부에 표독스럽게 악이 받친 얼굴도, 사랑스럽니?

소르니가 울음이 섞여 축축하게 젖은 목소리로 지껄였다. 벨리타가 소르니를 따라 상체를 일으켰다.

마르기 시작한 오이가 떨어져 구른다. 벨리타가 손을 뻗었다. 드문드문 오이가 남은 뺨을 부드럽게 쓸어냈다. 후드득, 남은 오이가 추락한다.

소르니의 손아귀가 이불을 우악스럽게 쥐었다. 눈물이 쉼 없이 흘렀다.

“물론이지. 사랑스럽고, 멋지고, 대견하지.”

“……아무도, 아무도 나한테 그런 말 해 준 적 없어.”

몇 남지 않은 오이가 아깝다고 중얼거린 벨리타가 부스스하게 흐트러진 소르니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눈물에 일그러진 낯이 드러났다.

벨리타가 하나씩 오이를 떼어냈다. 닿는 손길이 조심스럽고 섬세해서, 정말로 사랑이라도 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접시에 떨어진 오이도 담아낸 벨리타가 살갑게 웃는다.

“네가 너한테 해 주면 되지. 자기를 탓하는 건 쉬워도, 아껴 주는 건 정말 어려운 거거든.”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점점 무너지는 상체를 받아 끌어안은 벨리타가 등을 다독였다. 숨기려고 해도 티가 났다.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아 하는 모습들과 이따금 멍울이 진 목덜미, 발목이 짐작하게 했다.

아이의 눈에는 보호자라는 존재가 하늘보다 높고 두려운 법이다. 학대를 받아도 보호자를 탓할 수 없는 아이는 결국 스스로를 탓하고 갉아먹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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