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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84화 (84/150)
  • 84화.

    “여기 와서 엄청 힘들어했고. 자기 세상으로 돌아가는 게 가장 간절한 사람이니까, 좀 도와줘요.”

    피해자인가. 생명을 해치며 치러야 하는 의식의 결과를 원하지 않게 받아낸 걸까. 몸의 주인을 위해서라도 돕는 게 맞았다. 그럼에도 왜 이리도 불안할까.

    베르가 전보다 나아진 상태에 다시 문서를 넘겼다. 철저히 마법사의 입장에서 적힌 글들이다. 이해가 가지 않는 용어들과 도형의 향연. 베르는 문서를 내려놓았다.

    “……돕기는 하겠지만, 이 문서들…….”

    “왜요? 모르는 거 있어요?”

    “전부 이해가 안 되네요. 저는 마법사가 아니라 한낱 신관인걸요.”

    하나하나 낱낱이 헤집어 모조리 설명해 주겠다며 오웬은 미소 지었다. 문서보다 역시 감성을 자극하는 게 잘 먹힌 거다.

    불쌍한 사람이고 무해하며 그저 돌아가기만을 바라는 선량한 피해자. 남을 돕고 사는 데 의의가 있는 신관이라면 돕겠다고 나설 수밖에 없다. 너무 감성을 자극해서도 안 되고 넌지시, 얼마나 처참한 상황인지 상상하게 만들어 주면.

    도와주겠다고 확답까지 받아냈으니 결과를 도출하기까지 굴려먹으면 될 일이다. 신의 사람들만 볼 수 있는 성전부터 그 이상의 것까지. 마법사인 자신의 신분으로는 접할 수 없는 지식과 연구 결과들을 쉽게 받아낼 수 있다.

    쉽다. 쉬워. 오웬은 앞으로 베르가 해야 할 일들을 짚어 주며 깊은 대화를 이어 나갔다.

    *

    “베르 신관님이 당분간 머물기로 했어.”

    뭔 소리야. 벨리타와 데이비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오웬이 해가 넘어갈 시각이 되어서야 연구실에서 비척이며 나온 베르를 응접실로 끌고 와 폭탄 발언을 해 버린다.

    데이비드는 골이 울릴 지경이었다. 자꾸 사람이 는다. 수도 저택이 넓기는 하다만, 땅을 파서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대가도 받지 않고 집에 들이는 건 손해였다. 게다가 신관이다.

    신의 사람. 신전에 있어야 하는 존재. 그게 왜 우리 집에 얹혀사느냔 말이다. 여기가 봉사하는 곳도 아니고.

    데이비드가 짜증 가득 섞인 태도로 거절의 의사를 밝히려는 순간, 오웬이 말을 가로챘다.

    “벨리타의 몸이 회복할 수 있게 될 거야.”

    “환영합니다, 신관님. 방은 몇 개 필요하십니까?”

    떨떠름한 사람은 벨리타뿐이었다. 신이고 나발이고 필요 없는데. 거북하다.

    벨리타는 베르와 시선도 마주치지 않고 차만 홀짝였다.

    베르가 멋쩍게 웃는다. 자신의 상태가 들통 나 벨리타가 걱정하고 무서워하는 거라고 오해한 탓이었다.

    걱정 마세요, 파텔 님, 아니, 정체 모를 무언가님. 반드시 돌려보내드리겠어요. 시릴리우스 신의 이름으로.

    정신없는 상황에 응접실의 문이 슬쩍 열렸다. 엘라였다. 똥 씹은 표정의 벨리타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는다. 벨리타가 아는 체를 하기도 전, 문이 더 활짝 열렸다.

    “벨리타!”

    소르니였다. 화려하고 휘황찬란한 차림으로 반갑게 벨리타에게 다가왔다. 엘라가 빠르게 벨리타의 뒤에 서서 작게 속삭였다.

    “갑자기 찾아오셨어요. 전하께서도 잠시 나가셨다가 들어오는 중이시래요.”

    “아니 뭐, 여기가 여관이야? 뻔질나게 들락거리네.”

    말은 않지만 동의하는 오웬과 데이비드였다. 이게 다 벨리타가 잘나서……. 아니다, 됐다.

    오웬이 데이비드에게 베르의 방을 내어주라며 부탁했다.

    데이비드가 베르와 오웬을 끌고 응접실에서 벗어났다. 도망치는 게 답이다.

    소르니가 벨리타를 끌어안고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아이들의 스킨십이 점점 잦아지자 체념한 벨리타가 볼을 내어줬다.

    소르니가 말갛게 웃으며 벨리타의 팔을 끌어안았다.

    “놀러 가자! 쇼핑도 하고 오페라도 보자!”

    귀찮은데. 가진 교양이랄 것도 없으니 오페라도 탐탁지 않았다. 날이 많이 풀려 나가면 좋기는 하겠다만, 이틀간 내리 기절해 있어서 몸이 말썽이기도 했다. 기절이 잦아 이따금 다리가 풀리고 손도 떨었다. 곧 있으면 무릎도 쑤실 것 같았다.

    운동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잭슨도 곧 돌아온다고 하니 소르니를 따라 나간다면 필히 잭슨도 따라오리라.

    애 한 명도 힘든데 둘씩이나 데리고 가기는 싫다. 소르니의 귓바퀴에 달린 주황빛의 귀걸이가 반짝거렸다. 선물로 주고 난 후 벨리타를 만날 때마다 끼고 오는 것이다. 정작 벨리타는 아직 조슈아에게 귀걸이로 만든 장신구를 받지 못했다. 얼마나 공을 들이기에 4개월씩이나 걸리나.

    벨리타는 기절하고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힘들겠다는 답을 했다.

    소르니가 눈에 띄게 서운해했다. 딸도 좀 이렇게 대해 줬으면 얼마나 좋을까. 비교하면 화를 내겠지. 분명 그랬을 텐데.

    벨리타는 쓰게 웃으며 소르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착잡한 듯 보이기도 하는 벨리타의 미소를 본 소르니는 더 조르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벨리타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어 온다.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행동이었다.

    “내가 미안해. 안 그럴게. 그러니 나 미워하지 마렴.”

    온정이 고픈 어린아이. 어른의 사랑이 필요해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추는 덜 자란 아이. 의미 없는 행동에도 잔뜩 움츠러들고 안달을 낸다.

    주변에 있는 어린 여자애라곤 엘라와 소르니뿐인데, 유독 소르니에게 너그럽지 못했다. 딸이 생각나서 그런 걸까. 소르니만 보고 있으면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딸이 생각나서, 딸이 떠올라서 곁을 선뜻 내어주지 못한 걸지도 모른다.

    예민하고 기민한 아이이니 다 알고 있겠지. 다른 아이들에게는 과할 정도로 오지랖을 부리는데, 유독 자신에게만 선을 그어 놓으니. 미안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

    오늘은 소르니와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한 벨리타가 소르니의 등을 가볍게 토닥거렸다. 엘라가 질투 어린 눈으로 소르니를 노려보았다가 벨리타의 귓속말에 새파랗게 질렸다.

    “황태자 전하를 돌려보내라고요?”

    “오늘은 소르니랑 있을 거야. 너도 들어가서 쉬어.”

    “제가 아가씨 곁이 아니면 어디에 있어요?”

    “놀러 가든가. 뭔 주야장천 내 옆에만 있겠다고. 빨리 가.”

    어린 나이에 나이 먹은 아줌마랑 있으면 뭐가 즐겁다고 그리 땅이 무너지는 표정인지. 감동받아 표정 관리도 되지 않는 소르니를 다독이며 엘라를 내보냈다.

    벌컥, 문이 열렸다. 자기네 집도 아닌데 다들 문 하나는 신명 나게도 열어젖힌다. 잭슨이 성큼성큼 다가와 소르니의 팔을 붙들고 잡아끌었다. 속절없이 소르니가 끌려 나왔다.

    잭슨은 뭐하는 짓이냐며 화를 삼킨 소르니를 무시하고 벨리타를 들어 무릎에 앉힌다. 아주 버릇이 들었다.

    소파 끝자락에 널브러진 소르니가 끓는 분노를 삭였다. 그러면서도 자신과 함께 있겠다고 했던 벨리타의 눈치를 살핀다. 돌려보내기도 전에 잭슨이 와서 버려질까 봐 두려운 탓이다. 벨리타는 입술부터 들이대는 잭슨의 얼굴을 밀쳤다.

    “집에 가. 난 소르니랑 있을 거야.”

    “왜지? 내가 저 계집보다 못한 게 뭔가.”

    “씁, 말하는 것 좀 봐라. 뒈지게 혼날라고.”

    단호하게 잭슨을 거절하자 소르니의 낯이 환해졌다.

    사나워진 기색의 잭슨을 한 걸음 뒤에서 바라보던 엘라는 연신 마른침을 삼켰다. 이제 익숙해질 즈음도 되었는데 황족과 공녀의 살벌한 분위기는 적응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벨리타의 눈에는 그저 투정일 뿐이었다. 잭슨의 무릎에서 일어난 벨리타가 잭슨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갈 때 명이 나물 챙겨가. 소르니 너도 챙기고. 넌 김치 다 먹었냐?”

    “아니, 아직…….”

    허리를 감싸 안으려는 잭슨을 밀어내면서 벨리타는 소르니에게 명이 나물 장아찌를 먹는 법을 설명했다. 창과 방패의 싸움이었다.

    물러나는 기색 없이 벨리타를 안으려는 잭슨과 매몰차게 쳐내는 벨리타를 바라보며 소르니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통 가려는 낌새가 없어 벨리타가 손을 치켜들었다.

    “안 가? 맞고 갈래, 그냥 갈래.”

    “다음에 또 오겠다.”

    좋은 말 할 때 말 들으면 좀 좋은가.

    소파에서 일어난 잭슨이 소르니를 흘겨보았다. 잠시 소르니와 나눌 이야기가 있다며 잭슨이 소르니를 끌고 나갔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정원까지 끌고 간다. 결혼도 아직이니 결혼에 관한 이야기려나.

    벨리타는 엘라에게 오이와 접시, 칼을 부탁하고 소르니가 돌아오면 자신의 방으로 안내해 달라는 부탁을 마친 뒤 응접실을 떠났다.

    소르니의 손목을 잡고 끌고 나온 잭슨이 사람이 없는 정원까지 도달하자 손목을 놓아주었다. 소르니의 살갗에 붉은 자국이 남았다. 벨리타가 그리도 가르쳤건만 벨리타에게만 잘하는 잭슨이었기에 소르니는 짜증 가득한 낯으로 손목을 문질렀다.

    잭슨이 길게 늘어진 로브를 뒤로 젖히며 말을 꺼냈다. 소르니와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소문은 어디까지 진행됐지?”

    “평민들까지 알 정도로 퍼졌어요. 벨리타를 찾아오는 것도 자제하셔야 할 거예요.”

    소문.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부터 벨리타를 따라다녔던 이야기들. 벨리타는 모를 것이다. 귀족답지 않게 사교에도 흥미가 없고, 친밀한 귀족도 몇 없으니까. 샤를로트 백작 부인과 편지를 주고받는 눈치이기는 하지만, 소문보다 안부에 치중한 편지였다. 파텔 후작가는 딸의 정신 건강을 위해 필사적으로 쉬쉬하고 있다.

    벨리타가 작년 겨울, 사교계에 발을 들이지 않은 후로부터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다.

    미친 척하더니 연기였다. 미쳤다는 게 남자에 미친 거다. 사교에 관심 없는 체하더니 황태자, 공녀에게는 꼬리를 흔들더라. 주제도 모르고 공녀를 밀어내 황태자비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다.

    이 수준의 소문이면 후작 영애에게 치명적이지만 가문의 힘으로 무마할 수 있다.

    다만 언제부터 소문이 크게 부풀었다.

    남자를 당당히 저택에 들여 천박하게 군다. 제 남동생과도 은밀한 사이다. 황태자가 결혼을 하지 않는 이유도 벨리타가 술수를 써서 그렇다. 황태자와 공녀를 홀린 것도 흑마법을 부린 거다, 라는 터무니없는 헛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신전과 긴밀한 관계인 제국의 입장에서 흑마법은 엄격한 금기였다.

    흑마법을 행한 사람은 불에 태워 죽이는 법도까지 있었다. 가문도 불명예스럽게 몰락할 것이다.

    흑마법을 사용한다는 소문까지 퍼지는 통에 소르니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고, 잭슨도 이를 갈았다.

    조슈아는 이미 벨리타의 소문이 난 근원지를 찾고 있는 모양이었으나 소르니와 잭슨은 조슈아와 협업할 수 없었다.

    적이었으니까. 피가 튀는 세력 다툼 중 다른 세력과 손을 잡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조슈아와 비밀스럽게 내통한다고 해도 지켜보는 이들이 많았고, 조슈아가 아니더라도 잭슨과 소르니에게는 권력과 힘이 있었다. 충분히 벨리타를 지켜낼 무력도 있었다.

    물론 곁에서 가까이 지켜보는 이들은 벨리타가 흑마법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걸 안다. 다만 너무도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홀로 산에 올라 풀을 뜯어오는 것과 수시로 며칠을 기절하는 모양새, 연구에 미친 마탑주의 아들을 집에 들이고, 맹수 같은 잭슨을 곁에 두고, 오만한 공녀를 옆구리에 끼고, 무섭도록 성장하는 상단주를 발아래에 뒀다.

    어릴 적부터 사람과도 잘 만나지 않고 내내 아프기만 했던 후작의 딸이 무슨 수로? 흑마법을 배우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는 것도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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