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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83화 (83/150)
  • 83화.

    “벨리타에게 피해 가면 가만 안 있어요.”

    “너보단 내가 더 벨리타를 아낄 텐데, 감히.”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잖아.”

    응접실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와 같은 살기. 손에 타오르는 불꽃을 쥐고 대치하던 때의 매서움이었다.

    잭슨은 순간 뒷목에 소름이 끼쳤다. 그래, 이런 녀석이었다. 능글맞게 굴어 경계를 허물어 놓았지만, 꽤나 사나운 맹수와 같은.

    오웬이 경고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는 잭슨은, 오웬의 어깨를 밀어냈다. 오웬이 잭슨의 손길에 따라 뒤로 물러났다.

    “그럴 일 없다. 괜한 간섭하지 마. 같잖으니.”

    예와 같은 능청스러운 대답은 없었다. 오웬은 잭슨을 향해 그저 미소를 지었을 뿐이었다. 기분 나쁜 오싹함이 들어 잭슨은 혀를 차며 벨리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멀어지는 잭슨을 뒤로하고 오웬은 응접실로 고개를 돌렸다. 베르를 달래고 명목상으로 벨리타를 보여 준 후,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어야 했다. 오웬의 걸음이 빠르게 움직였다.

    베르는 아직도 떨고 있었다. 오웬이 잭슨과 담소를 나눈 지 얼마 되지 않았기는 했지만 그리 짧은 시간도 아니었다. 베르의 손에 쥔 찻잔이 진동했다.

    어느새 베르의 곁에 선 오웬이 찻잔을 들어 내려놓는다. 베르가 오웬을 바라보았다.

    “많이 놀랐겠어요. 우리 애가 좀 과격하거든요. 죄송해서 어쩌죠.”

    우리 애라면, 잭슨인가. 베르를 달래 주던 데이비드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애라고 하기에는 역겹지 않은가.

    헛구역질을 하는 데이비드를 뒤로하고 오웬은 베르의 옆에 앉아 살갑게 웃었다. 정말 죄송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양, 능청스러운 대처였다.

    베르가 떨리는 몸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숨을 들이켰다.

    “이제는 괜……찮아요. 아무런 언질도 없이 잡혀 와 놀랐, 놀랐을 뿐이에요. 신께서 주신 시련이겠거니, 하고 있어요.”

    이래서 신을 모시는 사람들이 어렵다. 철저히 보이는 것만, 확실한 것만 믿고 있는 오웬으로서는 결이 다른 종족이었다. 이해할 수도 없고 납득할 수도 없는 신앙심.

    다름을 인지하고 있는 오웬은 배척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다. 그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아 어려울 뿐. 오웬이 디저트가 가득 담긴 트레이를 베르 쪽으로 밀어냈다.

    베르가 감사하다며 디저트를 집었지만, 섣불리 입에 넣지는 못했다. 오웬이 여느 때와 같은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이었다.

    “오시느라 고생 많았어요. 다름 아니라, 파텔 영애가 신관님을 찾고 있었거든요.”

    “기억해요. 감사하다고 선물과 편지도 받았으니까요. 새해 선물도 잘 받았고요. 무척 씀씀이가 좋은 분이시죠.”

    그런 적이 있나. 하기야 벨리타가 어디 가겠나. 자신과의 첫 만남에 과일 바구니를 들고 온 사람인데. 다시 떠올리면 귀엽기만 했다. 오웬은 신경 쓰지 않고 본론을 꺼냈다.

    “충돌 때문에 마력을 늘리고 있는 중이에요. 다만, 너무 자주 쓰러져서 신력이라도 늘릴까 싶어 찾은 건데.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조금이라도 괜찮으니까요.”

    불쌍한 척, 선량한 척 단정한 얼굴을 써먹는 오웬 때문에 베르는 이제야 과자를 입에 넣었다. 달달함에 경계심도 사르르, 녹아버렸을 터다.

    데이비드는 말을 번지르르하게 하는 오웬을 믿고 가만히 앉아 지켜보았다.

    베르는 크림이 가득 얹어진 파이를 다 삼키고 나서야 대답했다. 자신도 돕고 싶어 신력을 쌓으라고 했더니 거절하셨다고.

    데이비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신도 아는 내용이다. 베르가 차를 한 모금 들이켜고 말을 이었다.

    “신력을 나눠드릴 수는 없지만, 쓰러지신 상태라면 일어나게 해드릴 수는 있어요.”

    어차피 벨리타는 곧 눈을 뜰 테니 정말 필요 없는 도움이었지만, 오웬은 기쁘고 감사하다는 미소를 지었다. 베르를 조금 달래주고 벨리타에게 보여야겠다. 오웬이 손가락을 휘둘러 식은 찻물을 데웠다.

    한 시간가량 후, 창문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신께 기도를 올린 베르는 벨리타의 앞에 섰다. 흑색의 손을 뻗어 벨리타의 이마에 손을 얹는다. 잭슨이 의자에 앉아 베르가 하는 모양새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허튼짓을 하거든 목을 베어내겠다는 듯.

    살기에 질린 베르가 짧게 주문을 외우며 성호를 그었다. 베르의 손에서 뻗어 나오는 하얀 빛이 벨리타를 휘감는다.

    찬란하고 영롱한 빛이었다. 성스러움까지 느껴졌다. 데이비드는 신관이 신력을 쓰는 모습은 처음 보았던 터라 무척 신기해했다.

    은은하게 빛나는 빛이 벨리타의 몸에 스며들자, 앓는 소리와 함께 얼마 지나지 않아 벨리타가 눈을 떴다. 상쾌한 기상이었다. 여느 때보다 가뿐하고 쾌적한 느낌이어서 벨리타는 곧장 상체를 일으켰다.

    “어?”

    눈앞에서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는 베르를 알아본 벨리타가 반가운 기색을 했다. 얼마나 기절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베르를 데리고 올 정도로 시간이 흘렀거니 짐작했다. 돌연 납치당한 베르인 줄도 모르고.

    베르가 벨리타의 손을 쥐고 짧게 기도한 후, 벨리타의 옆에 걸터앉는다. 이를 본 잭슨이 질투심에 일어나려고 하자 오웬이 마법으로 잭슨을 도로 앉혀 놓았다.

    “새해 선물도 감사히 받았어요, 파텔 님. 이렇게 챙겨 주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신세를 졌는데 당연히 드려야죠. 멀리서 오시느라 고생하셨겠네. 밥은 드셨어요?”

    “네, 디저트까지 먹었어요. 영식께서 챙겨 주셔서…….”

    다행이다. 데이비드가 역시 다른 캐릭터들보다 상식적이다. 벨리타는 베르에게 수도에 온 김에 어디 식당이 맛이 좋으니 가 보아라, 어디 디저트가 맛있으니 먹어 봐라, 라는 둥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가만히 벽에 기대어 관망하던 오웬이 벨리타에게 다가갔다. 지는 가면서 왜 자기는 못 가게 하냐는 잭슨의 시선을 무시하고.

    “오신 김에 벨리타의 신력 상태도 좀 봐주세요.”

    받은 게 많으니 흔쾌히 그러겠노라 대답한 베르가 길게 성전을 외웠다. 가는 빛이 벨리타에게 여럿 흘러들어왔다. 불쾌한 감각. 역겨운 감상이 들어 벨리타는 입을 틀어막았다.

    잭슨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언제든 달려들 채비를 한다.

    천천히 벨리타의 몸속을 헤집듯 가늠한 베르가 순식간에 빛을 거두었다. 혼란과 의아함, 미지의 두려움이 뒤섞인 낯이었다.

    갑작스레 끊어진 검사가 당황스러워서 벨리타는 베르를 바라보았다. 벨리타의 손을 뿌리친 베르가 희게 질린 채 더듬거리며 말을 꺼냈다.

    “파, 파텔, 님…… 당신은…….”

    “자, 우리 벨리타는 회복하게 두고 신관님은 나랑 이야기 좀 하죠.”

    베르의 말을 끊어 가로챈 건 오웬이었다. 바로 옆에서 지켜보다가 살갑게 웃어 보였다.

    혼란 그 자체인 베르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냐는 표정들. 그리고 유일하게 평온한 태도의 오웬. 베르는 오웬만이 알고 있음을 눈치챘다. 대놓고 이야기를 할 수도 있었지만, 오웬의 미소 너머로 보이는 깊은 심해의 것과 닮은 서늘함에 입이 다물렸다.

    고개를 끄덕인 베르가 오웬을 따라 오웬의 연구실로 향했다. 데이비드와 잭슨은 서로의 눈치를 보다가 이내 벨리타를 향한다.

    평온하고 무던한 분위기의 벨리타와 하얗게 질린 베르. 눈치가 빠르다면 빠른 데이비드와 잭슨은 무언가가 있음을 알아냈다. 그 무언가는 자신들이 알면 안 된다는 것도.

    탁, 연구실의 문을 닫았다. 베르는 안절부절못하며 오웬을 따라 들어와 문이 닫히자마자 아연실색한 얼굴로 소리쳤다. 오웬은 태연하게 문서들을 정돈했다.

    문 앞에 선 베르가 자신의 옷가지를 양껏 그러쥐었다. 혼란이 가득했다.

    “대체 무슨 일인 거죠?! 당신은 알고 있는 건가요? 작년, 작년에는……. 언제부터……!”

    당황스러워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머리에 둘러진 천을 잡아당기며 숨을 들이쉬었다. 진정이 되지 않는다.

    작년에는 두드러지지 않았다. 벨리타의 신력을 확인할 때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음에도 마력이라 치부했다. 자신은 마법사가 아니었고 다룰 줄 아는 거라곤 신력뿐이었으니까. 왜 작년에는 몰랐을까.

    이렇게 큰 이질감과 분리된 혼을 알아차리지 못한 이유가 뭘까. 분명 다른 혼이었다. 육체와 결이 다른 혼. 어딘가에 이어진 외부의 것.

    베르는 처참하게 일그러진 낯으로 오웬을 바라보았다. 악마이거나 몬스터일지도 모른다. 불쌍한 어린 양이 몸을 빼앗겨 괴로워하고 있는 중이라고, 살려 달라고 티를 낸 거라고, 베르는 생각했다.

    구해야 한다. 구해야 했다. 신의 힘을 빌려 사는 사제로서 곤경에 처한 이를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당혹감으로 안절부절못하는 베르와 다르게 흐트러짐 없는 태도의 오웬은 문서를 한데 정리하여 베르에게 다가왔다. 여러 장의 문서가 앞에 내밀어졌다.

    베르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문서를 받아 들었다. 혼에 관한 문서였다.

    “도와주고 싶죠? 구해주고 싶죠?”

    글을 읽어 내리던 베르가 고개를 들었다. 은은한 미소를 띤 오웬이 당연한 듯 질문했다. 그렇다는 대답이 나올 걸 안다는 태도였다.

    베르는 문서가 구겨지는 것도 모르는 채 손에 힘을 주었다.

    “네, 구해드리고 싶어요. 당신은 무언가를 아시나요?”

    “자, 그럼 소파에 앉으시고~ 읽으면서 설명해 줄게요.”

    태평하다 못해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베르는 오웬의 속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말려드는 것 같기도 했다. 미묘한 불안함.

    오웬과 베르는 소파에 마주 앉았다. 베르가 문서를 읽어갔다. 이건, 역시.

    “혼을 이동시키려는 건가요?”

    “정답.”

    대화가 빠르겠다며 기뻐하는 오웬이 꺼림칙하다. 베르가 문서를 마저 읽었다. 금기와 다름없는 혼의 이동. 신전에서는 금지되어 있는 의식이었다. 먼 옛날에나 신의 아이로 추종받던 인간을 붙잡아 두기 위해 사용했던 의식이었으나, 이제는 사라진 것. 흑마법과 비슷한 유의 더럽고 역겨운 의식이다. 베르는 이 의식을 들어 본 적 있었다.

    신성한 의식임에도 피가 필요한 미개한 방법. 계속 느껴지던 불쾌한 감상이 무엇이었는지 알겠다. 본능적으로 기피한 것이다. 사람인지, 동물인지 모를 생명을 희생시켜야 하는 이 의식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혐오를 느낀 거다.

    베르가 문서를 더 읽지 못하고 내려놓았다. 속이 울렁거려 글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은 탓이다.

    가만히 베르를 지켜보던 오웬이 턱을 괴었다.

    “확인해 봤으니 알겠지만, 벨리타는 다른 곳에서 왔어요. 다른 세계. 무슨 원리였는지는 알아내지 못했고, 벨리타도 왜 다른 몸에 들어왔는지 모르고요. 벨리타는 평범한 사람이에요. 자기 세계에 가족도 있고 애도 있다던데.”

    다른 세계. 이곳이 아닌 다른 차원의, 아득히 먼 어딘가에서 온. 메스꺼웠다. 기어오르는 불안감이 역겹게 속을 긁었다. 혹시라도 정말 악마라면, 다른 무언가가 이곳을 해치기 위해 온 거라면.

    베르가 자신의 입을 틀어막아 헛구역질을 했다. 오웬은 다른 조치 없이 눈썹만 까딱거렸다.

    “돌아가고 싶어 해요. 정말 그것만 바라더라고요. 딸이 그렇게 보고 싶다나.”

    가족이 있다. 딸이 있다. 누군가의 부모이면서 누군가의 몸을 점령한 이질적인 존재. 베르는 처박힌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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