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82화 (82/150)

82화.

연기 속에 파묻힌 투명한 빛이 반짝거린다.

전과 다름없는 자세로 쭈그리고 앉아 골똘히 고민하는 오웬이 장막과도 같은 쉴드를 거두었다. 깔끔하고 멀끔한 그대로였다.

벨리타는 다리가 풀릴 뻔했다. 식겁했다. 정말로 다쳤을까 봐 걱정했다. 애타게 불렀을 때 대답이나 좀 해 주었으면 이렇게 놀라지도 않았을 텐데.

벨리타가 오웬의 어깨를 거칠게 내리쳤다. 악, 오웬이 맞은 부위를 감싸 쥐고 원망 가득한 눈으로 벨리타를 올려다보았다.

“왜 때려!”

“사람이 불렀으면 대답을 해야 할 거 아니야!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터지는 거면 터지는 거라고 말이라도 좀 해 주지!”

“미안, 미안. 고민하느라 못 들었어. 많이 놀랐어?”

흔적도 없이 타 버린 주변을 둘러본 벨리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자 오웬이 살갑게 미소 지었다.

하얗고 잘 뻗은 손가락이 뻗어져 벨리타의 손을 잡는다. 억울한 기분이 들어 벨리타가 손을 쳐내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손을 잡아 온다. 잡은 손을 힘주어 당겼다. 벨리타가 힘에 못 이겨 오웬의 앞에 붙어 섰다.

얇고 가녀린 손가락에 쪽, 입을 맞춘다. 손끝이 움츠러든다. 벨리타는 부끄러운 감각과 오므라드는 손가락을 어찌할 바 몰라 입술을 꽉 깨물었다. 오웬이 다시 손등에 입을 맞췄다.

“내가 이런 폭발로 다치겠어. 걱정받으니까 기분 좋네. 더 걱정해주라.”

“짜증 나, 너.”

“나는 너 좋은데.”

무슨 말도 못 하게 한다. 진심이 섞였음은 알지만 너무도 쉽게 뱉어지는 말이라 그마저도 짜증이 났다. 설레는 자신이 가장 꼴불견이었다.

벨리타가 신경질적으로 잡은 손을 뿌리쳤다. 오웬이 엉덩이 부근을 탈탈 털며 몸을 일으켰다. 일어섰을 뿐인데 벨리타를 내려다보게 된 오웬이 벨리타의 허리를 붙들었다.

안 쓰러지네? 툭, 뱉은 오웬의 말에 벨리타가 눈을 여러 번 깜빡거렸다. 진짜다. 마법을 쓰려고 하면 족족 기절했는데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마력이 늘었나. 별 차이를 못 느끼겠는데.

벨리타가 당황스러움과 기쁨이 뒤섞인 얼굴을 하자 오웬이 풉, 웃음을 터트렸다. 오웬이 웃건 말건 벨리타의 낯이 환하게 밝아졌다. 드디어 마법을 사용했다.

폭발 마법이기는 했지만 쓰기는 했다. 벨리타는 첫 마법을 시전할 때 꽃을 피우거나, 비를 내리거나 하는 곱상한 마법을 기대했었다. 내심 그랬다. 낭만적이지 않은가. 아니, 처음 시전한 마법도 화려하기는 했다. 화려하게 모조리 불태우고 터트렸다. 화끈하네.

벨리타는 시원섭섭한 마음이 들었지만 기절하지 않고 마법을 사용했다는 것 자체로 기뻐했다.

기뻐하는 건 오웬도 마찬가지였다. 예쁘게 웃으며 벨리타의 허리를 붙잡고 들어 올렸다. 벨리타가 허공에 떴다. 와악, 놀란 벨리타가 오웬의 어깨를 붙잡았다.

벨리타보다 기뻐 보이는 오웬을 보자, 벨리타는 아무렴 어떠냐는 감상이 들었다. 주위가 아직도 불에 타고 있고 연기가 뿜어져 나오지만 오웬의 말갛게 웃는 얼굴이 무척 예뻐서.

벨리타는 오웬에게 입을 맞추었다.

쪽, 잭슨이 수시로 맞춰 오던 것처럼, 어릴 적 딸이 몇 번이곤 사랑스럽게 맞춰 오던 것처럼. 결혼하기 이전 연애 시절 수줍게 나누었던 대로. 봄 꽃잎이 내려앉듯 가볍고 살랑거리는 입맞춤이었다.

오웬은 눈을 크게 떴다. 그날 밤 이후로, 입을 맞춰 본 적 없었다. 그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먼저 다가온 벨리타는.

아쉬울 정도로 순식간에 끝났음에도 혼을 쏙 빼놓았는데 환하게 웃는 얼굴에 심장마저 앗아갔다. 오웬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웃는 얼굴에 가슴이 내려앉고, 입을 맞추었다고 혼이 빠지는 이 상황이. 죽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쓰러질 적마다 울고 싶어지는 충동이. 밤마다 침대에 누워 그날 밤을 떠올리는 한심한 스스로가.

돌려보내기 위해 연구를 이어가면서도 한편으로는 연구를 그만두고 싶어지는 욕망. 이 모든 상황이 내린 통계는,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이 감정은.

사랑이었다.

24년간 살면서 사랑이라는 감정은 느껴 본 적 없다. 제대로 느껴 본 감정을 굳이 꼽자면 딱 맞아떨어지는 수식이라든가, 계산, 완벽한 술식 정도다.

오웬은 철저하게도 이성적인 사람이었고 냉철한 마법사였다. 부모마저 타인으로 인식하는 그런 마법사 특유의 냉혈한. 그런 그에게 호불호는 있어도 사랑은 없었다. 그래서 몰랐나 보다.

뇌에 이상이 생겼다고, 가슴께에 병이 들었다고, 그리도 멍청한 오판을 했나 보다. 처음 느껴 보는 감정들이 어색하고 기괴해서 여태 그랬던 것처럼 분석하려고 들고 연구하려고 든 게 바보 같은 짓이었다. 그냥 인정하면 될걸. 이게 사랑이라고. 벨리타를 걱정하고 득이 없어도 챙겨 주고 싶어지는 이 심리상태가 사랑이란 걸 알았더라면.

달라질 건 없겠지. 벨리타는 떠날 사람이었고 오웬은 남겨질 사람이다.

몸 주인이 돌아온다고 해도 오웬은 몸 주인마저 사랑할 넓은 마음씨를 갖고 있지 않았다.

다 큰 아이의 엄마여도, 이미 남편을 잃은 아내일지라도 오웬에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자신의 앞에서 말갛게 웃고 우악스럽게 구는 면모마저 사랑스러워했으니.

자신은 벨리타가 처음이었지만 벨리타는 처음이 아니어도 괜찮았다.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 오랜 세월 긁히고 닳아져 완성된 지금의 벨리타가 좋았다. 단단하고 강인해 보여도 자신의 앞에서만 여리고 연약한 속내를 보여 주는 것도 좋았다. 그냥, 벨리타가 좋아.

오웬은 난생처음으로 감정적인 상태가 되었다.

그럼에도 사랑한다고 입 밖으로 뱉어내지 못하는 건. 벨리타의 처지를 오웬 스스로도 너무 잘 알고 있는 탓이다.

오웬이 벨리타를 내려놓았다. 처음 마법을 성공해 잔뜩 들뜬 벨리타가 드문드문 지워진 술식을 이어 그렸다. 다시 한번 시도해 보고 싶었던 게 이유였다.

오웬은 그런 벨리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흐트러진 주황빛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벨리타의 시선이 오웬에게 향했다. 오웬은 그저, 이루어지지 못할 첫사랑을 삼키고 미소를 지었다.

“그 술식, 내가 만든 거야. 마력은 최소한으로 소모하고 최대한의 효율을 내게끔.”

“진짜? 너 대단하다. 어떻게 했어?”

잔뜩 신이 난 벨리타가 조잘조잘, 오웬의 칭찬을 늘어놓았다. 기분이 좋았지만 그뿐이다. 진흙탕처럼 더럽게 질척거리는 속내를 어찌할 바 몰랐다.

쭈그리고 앉은 벨리타의 앞에 마주 앉은 오웬이 손가락을 들어 술식을 가리켰다.

“호신용이야, 이거. 네가 워낙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고 사고를 치니까 만든 거라고.”

“에이,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것도 아니고. 요새는 잠잠하고 소박하게 잘 살잖아? 어차피 떠날 거고.”

외우기는 외울 텐데 외워서 어떻게 써먹느냐는 벨리타의 질문에 오웬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렇네. 어차피 떠날 거고 죽지도 않으니 불필요했겠다. 이렇게까지 맹목적으로 타인을 위한 적은 없었다.

오웬은 멍청해진 자신이 한심해졌다. 벨리타가 대답을 채근하자 오웬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손가락으로 멀리 있는 곧게 자란 나무를 가리켰다.

“술식을 머릿속에 그리고 마력으로 덮는다고 생각해 봐. 그와 동시에 나무에 그 마력을 쏘아내. 활을 쏘듯이. 마력은 얕을수록 소모가 덜 돼.”

크지 않지만 곧은 나무를 바라보던 벨리타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머릿속으로만 그리면 되는데도 벨리타는 검지손가락을 꿈지럭댔다.

벨리타는 간단했던 그 술식을 머릿속으로 되새겼다. 마력을 얇게, 실처럼 뽑아내어 술식을 그렸다. 오웬의 특별 훈련 덕에 가능한 방법이었다. 목표를 눈에 담아내며 터트린다, 라는 생각을 하자마자 나무가 터져나갔다.

쏘지도 않았다. 그저 노려보면서 터트리고자 했을 뿐인데 나무는 굉음을 내며 불에 타올랐다. 벨리타는 어안이 벙벙했다. 성공했으면 장땡이지만, 오웬이 가르쳐 준 방법과는 달랐다. 나 재능 있나?!

들뜬 벨리타가 오웬을 돌아봤다. 눈이 반짝거렸다. 오웬은 손가락을 휘둘러 불길을 잡고는 엄지를 척, 들었다. 와악, 칭찬받았다.

수업을 할 때에는 욕만 했지 칭찬은 들어 본 적 없었다. 처음 받아 보는 칭찬이었다. 벨리타는 작은 주먹을 꾹 쥐고 하늘 높이 팔을 치켜들었다. 해냈다. 몇 년 만에 느껴 보는 짜릿한 성취감이었다. 배우는 것이 이렇게 즐거웠던가.

이야악! 비명 같은 환호를 내지른 벨리타가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머리카락이 공중에 나부끼며 바닥을 향해 뒤통수가 곤두박질쳤다.

오웬이 화들짝 놀라 벨리타를 향해 달려가며 마법으로 여린 몸을 받아내 천천히 바닥에 눕혔다. 또 기절이다. 그래도 마력이 늘고 있어 기절하는 시일이 짧아졌으니 다행이었다.

눈을 감고 고르게 숨만 내쉬는 벨리타를 품에 안은 오웬이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눌렀다. 쓰러져서 차라리 잘됐다. 충동에 휘둘려 섣부른 실수를 할 뻔했으니까.

‘그림 내기에서 내가 이기면, 돌아가지 마.’

나랑 있어. 차마 육성으로 뱉어내지도 못했다. 벨리타가 애달프게 그리워하고 있음을 알아서. 같잖은 제 바람은 벨리타의 죄책감만 붙들고 늘어지는 꼴이어서.

듣게 될 벨리타의 표정이 어떨지 상상이 갔다. 그런데도 어떻게 말을 해. 이 위태로운 관계마저 다 망치고 싶지 않았다.

오웬은 한참을 벨리타를 끌어안고 가쁜 숨만 몰아쉬었다.

사랑이 참 뭣같이 어렵다.

*

이틀 뒤, 잭슨이 다짜고짜 저택으로 쳐들어왔다. 베르를 포박한 채로. 오웬과 데이비드는 하얗게 질려서 기겁했다. 아무리 황태자라지만 안하무인으로 신관을 결박하여 데려오는 건 어느 나라 법도인지.

데이비드가 급하게 뛰어나와 베르의 손목과 가려진 눈, 틀어 막힌 입을 풀어주었다. 두려움에 덜덜 떨던 베르가 데이비드를 알아보았다.

“……작년에 찾아오셨던…….”

너무 놀라고 겁에 질려 말도 끝마치지 못했다. 초췌한 꼴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데이비드가 하녀들에게 손님을 맞이하라고 이른 뒤, 베르를 조심스럽게 인도해 응접실로 데려갔다. 잭슨의 옆에 서서 지켜보던 오웬이 대수롭지 않게 말머리를 던졌다.

“비밀스럽게 납치해 와야만 할 이유가 있었나 봐요. 보는 눈이 신경 쓰였나?”

“말 걸지 마.”

“우리 사이에 섭섭하게 굴기예요? 나 운다?”

“울든가.”

뒷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긁은 잭슨이 벨리타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오웬이 잭슨의 어깨에 팔을 얹어 늘어진다. 잭슨이 사납게 오웬을 쳐냈다. 짜증이 역력했다.

“벨리타는 또 쓰러졌답니다~ 오늘 안에 깨겠죠.”

“넌…… 아니, 말을 말자.”

말도 섞기 싫은 티가 났다. 오웬은 기분 상한 눈치도 없이 그저 어깨만 으쓱였다. 잭슨이 무어라 하려고 했는지 짐작이 간다. 벨리타가 쓰러졌는데도 태평하느냐는 유의 말이겠지. 걱정이 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오늘만 해도 손을 붙잡고 종일을 곁에 있었다. 생색을 내기에도 바보 같지 않은가.

오웬은 잭슨의 오해를 정정해 줄 마음이 없었다.

벨리타를 보러 계단을 오르려는 잭슨을 막아섰다. 거슬리게 하지 말라는 의미가 만연한 잭슨의 살기 어린 시선에, 오웬은 물러나지 않고 잭슨의 앞에 제대로 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