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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81화 (81/150)
  • 81화.

    잭슨이 할 줄 아는 칼질이라고는 사람의 목을 베는 것뿐이다. 주방장의 목을 따라는 소리는 아닐 터다.

    잭슨이 엉거주춤 벨리타의 뒤에 바짝 붙었다. 벨리타는 작은 단도를 내밀었다. 본인은 이미 칼을 들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단도를 쥔 잭슨을 본 벨리타가 칼을 그렇게 쥐는 게 아니라며 자세를 고쳐 주었다. 맞는데, 이렇게 해야 목을 단번에 뚫을 수 있는데.

    주방장은 말을 잇지 못했다. 황태자를 주방에 앉혀 놓고 나물 손질이나 시킨다니. 주방장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기절할 것 같았다.

    괜한 불똥이 튀기 싫은 사람들이 주방을 빠져나가자 벨리타와 잭슨 단둘이 남았다. 서걱, 줄기의 끝을 베어낸 벨리타가 살갑게 조잘거렸다. 잭슨은 얌전히 벨리타를 따라 줄기를 다듬었다.

    “장아찌 담가서 돼지고기에 싸 먹으면 맛있어. 명이 나물 비싼 거야. 챙겨 줄 테니까 며칠 푹 익혔다가 먹어야 돼.”

    “……꼭 먹어야 하나?”

    “건강에 좋다니까. 비싼 거야, 비싼 거. 김치는 다 먹었어? 더 챙겨 줘?”

    “……됐다. 아직 한참 남았다.”

    빨리 먹어. 너무 익으면 맛없어. 태평하고 평화로운 잡담이었다.

    손질을 끝마친 나물을 잭슨이 씻어 냈다. 칼질 잘한다고 칭찬한 벨리타가 씻으라고 시켰다. 간장을 졸이던 벨리타의 등에 물기 가득한 손을 문지르던 잭슨이 등짝을 얻어맞으며 대화를 이었다.

    “마력과 신력 둘 다 쓸 일이 없을 텐데, 앓아가면서까지 하는 이유가 뭐냐.”

    “남이사. 신경 끄쇼.”

    새침한 대답에 잭슨은 물기 가득한 손을 벨리타의 볼에 문대었다. 마른 볼이 가득 눌렸다. 튀어나온 입술에 쪽, 입을 맞춘 잭슨이 걱정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벨리타가 간장을 졸이던 주걱을 들어 때리는 시늉을 하려다가 다시 냄비 속으로 집어넣는다.

    “걱정이 된단 말이다. 눈을 뜨지 못할까 봐, 네가 그대로 죽어 버릴까 봐 무섭다.”

    “안 죽어. 걱정도 팔자야.”

    무덤덤한 반응이 더 무서웠다. 자신이 죽이려고 들었을 때에도 초연하게 굴었던 벨리타였으니까.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듯, 두렵지도 않다는 태도로 일관하는 벨리타가 훌쩍 자신을 두고 떠날까 봐 두렵다.

    잭슨은 벨리타의 어깨를 감싸 끌어안았다. 벨리타의 볼에 입술을 문지른다. 벨리타는 귀찮음이 묻어나오는 무표정으로 잭슨에게 볼을 내어주었다.

    조금 나아지나 했더니 앓아눕기 시작한 뒤로 어리광이 늘었다. 벨리타는 잭슨을 밀어내려 몸을 뒤틀었다.

    “자기야, 나 질투 나게 뭐 하고 있는 거야?”

    오웬이었다. 능글맞은 목소리에 일제히 주방의 문으로 시선이 돌아갔다. 잭슨의 미간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성큼성큼 걸어온 오웬이 잭슨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잭슨이 거품을 물 듯 기겁했다. 미쳤냐, 떨어져라, 죽고 싶냐, 소리를 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웬은 잭슨의 머리에 자신의 머리를 기대었다.

    “자기한테 미쳤지. 우리 자기 말도 험해서 어떡해. 고운 말, 예쁜 말 써야 돼.”

    “헛소리 집어치우고 제발 좀 꺼져!”

    벨리타를 놓고 주방 끄트머리까지 달아난 잭슨이 씨근덕댔다.

    오웬이 벨리타에게 윙크를 해 보였다. 귀찮아 보이는 벨리타를 도우려고 잭슨을 떨어트려 놓은 것이다. 꼭 그렇게 징그럽게 굴어야 할 필요는 없는데. 물론 다른 방법으로 한다면 잭슨이 화를 냈을 테니 어떻게 보면 지혜로운 방법이라고 볼 수 있었다.

    오웬이 퍽 즐거워하는 모양새여서 벨리타는 간섭하고 싶지 않았다. 쟤도 성격 참 이상해.

    벨리타가 주걱을 저었다. 벨리타의 어깨에 팔을 얹어 기댄 오웬이 잭슨을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윙크를 했다. 잭슨이 기겁을 하며 쌍욕을 뱉어냈다. 오웬은 잭슨과 벨리타를 번갈아 보았다가 여상스럽게 느긋하고 여유로운 태도로 폭탄 발언을 했다.

    “아픈 게 걱정되는 거면, 차라리 신력을 키워. 그건 신앙심 깊은 신관이 도와주기만 해도 쑥쑥 느니까.”

    벽에 달라붙어 있던 잭슨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벨리타는 오웬의 입을 명이 나물로 두들겨 패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신관이 싫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신에 관련된 일은 내키지 않는다고 했던 것 같은데. 하지 않았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오웬과 만난 것도 벌써 4개월은 더 된 일이니.

    눈치가 빠른 오웬이니 말하지 않았더라도 알 거라고 생각했다. 잭슨에게 대놓고 신관을 데려오라는 말을 할 줄은. 황태자인 잭슨이니 추기경을 데려올지도 모른다.

    그건 절대, 결코 싫다. 벨리타가 잭슨을 향해 냅다 소리쳤다.

    “베르 신관이 좋아!”

    다른 사람보다 그래도 안면이 있는 사람이 나았다. 벨리타가 씨근덕대며 오웬의 가슴팍을 세게 내리쳤다. 오웬이 앓는 소리를 내며 바닥을 향해 수그렸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도움이 되질 않는다.

    “에라이, 씨벌 다 꺼져! 안 꺼져?!”

    간장을 휘젓던 주걱을 들어 휘둘렀다. 오웬이 뺨을 얻어맞아 간장으로 얼룩졌다. 잭슨은 맞기 싫어 후다닥 뛰쳐 나간다.

    냄비 안으로 주걱을 던지듯 넣으니 오웬이 고개를 들었다. 갈색 물이 뚝뚝 떨어지고 뺨이 붉다. 벨리타는 할 말을 잃었다. 맞은 꼴도 예쁘고 난리다. 오웬이 뺨을 감싸 쥐며 처연하게 우는 체를 했다.

    “때릴 것까지는 없잖아……. 나 아파, 호 해줘.”

    “지랄 말고 저리 가.”

    하여간 미안한 마음도 사라지게 만든다. 얼굴을 들이대며 단정한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는데 요물이 따로 없었다.

    벨리타가 오웬의 뺨을 손등으로 문질러 주었다. 오웬의 눈가가 사르르, 접혔다.

    “신관이 싫어도 어쩌겠어. 효자가 눈물 나게 걱정하고 있는데 나라도 도와야지.”

    “신이고 나발이고 난 싫다니까.”

    “왜 이래, 애기 엄마. 엄마 돕는다고 신난 아들 좀 봐. 한 번만 봐줘.”

    “아들은 핑계고 애기 아빠는 신관이 필요한 거잖아.”

    헛소리를 받아주네.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어서 오웬은 조금 어안이 벙벙했다. 근래 들어 벨리타가 많이 유해진 것 같다. 여유가 생겼다. 돌아갈 수 있는 방법도 찾고 속 썩이는 일도 없어서인 듯했다.

    가장 가까이에서 오래 보아온 오웬은 벨리타의 여유로움을 좋아했다. 투박하지만 다정한 면도 좋았다. 작고 하얀 손으로 조물조물 움직여 음식을 만들어 내는 것도 신기했다.

    새해의 밤, 불장난을 한 뒤로 잠시 어색해졌지만 불장난은 두 번 다시 없었다. 마치 실수인 것처럼.

    그 탓에 오웬은 조금, 아주 약간 안달이 나곤 했다. 그래서 지금도 말장난인 체하며 은근히 몸을 붙여왔다.

    벨리타가 샐쭉하게 웃었다. 눈치가 좋은 벨리타이니 오웬의 사심을 모르진 않을 터였다. 그러니 몸을 맞대 오는 오웬을 밀어내지 않고 간장만 졸이는 게 아니겠는가.

    “맞아, 신관이 필요해. 혼을 이동시키는 술식이 엉터리였거든. 최소한 대사제의 의견이 있어야 해.”

    그럴 줄 알았다. 장난스럽게, 능청맞게 말을 해도 예리하게 자신의 뜻대로 상황을 만들곤 했다. 능구렁이다.

    벨리타는 오웬이 자신의 편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척을 졌다면 분명 골치 아픈 사람이었을 테니. 애초에 만날 일이 없으니 척을 질 일도 없겠지만.

    벨리타는 오웬의 허리를 팔꿈치로 툭툭 건드렸다. 오웬이 벨리타를 들여다보았다.

    마법으로 간장 좀 식혀 달라는 말에 오웬은 불만 가득하게 투정을 부리며 손가락을 휘둘렀다. 자신은 액체나 식히는 일을 하려고 5서클을 쌓은 게 아니라고.

    벨리타는 물론 듣고 씹었다. 잘 손질된 나물 바구니를 마법으로 끌어온 오웬이 벨리타의 손에 쥐여 줬다. 벨리타가 병에 나물을 넣고 마늘 등등을 넣고 졸인 간장을 부었다.

    “오늘은 수업 안 해? 돌아가기 전에 마법 한 번은 해 보고 싶은데.”

    “그럼 오늘은 쉬운 거 할까?”

    허리를 끌어안고 벨리타의 어깨에 턱을 기댄 오웬이 낮게 속삭였다. 어찌 된 게 순수하고 건전한 문장도 야하게 들리도록 만드는지. 재능이라면 재능이었다.

    요리를 끝낸 벨리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방을 나오니 잭슨은 신나서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마 베르를 찾으러 떠난 모양이다. 명이 나물 줘야 하는데. 다음에 줘도 된다며 오웬이 벨리타의 허리를 감싸고 순간이동 했다.

    전에 왔던 공터. 벨리타는 썩 좋은 기억이 있지 않았기에 오만상을 찌푸렸다. 오웬의 마력에 눌려 죽을 뻔했으니까.

    왜 또 왔냐는 시비 가득한 시선을 보냈으나 오웬은 바닥에 뒹구는 나뭇가지를 주워 흙바닥에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그림은 참담할 정도로 못 그리는데 술식은 기가 막히게 깔끔하다. 아, 그러고 보니.

    “너 나랑 그림 대결하기로 했잖아. 까먹고 있었네.”

    “아~ 그랬지? 오늘 돌아가서 대결할까?”

    “내기하자. 내가 이기면 술 사 줘.”

    바닥에 간단한 술식을 그린 오웬이 벨리타를 올려다보며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었다.

    “너무 쉬운데. 후회 안 하겠어?”

    간단한 모양새를 바라보며 벨리타가 후회 안 하다고 대꾸했다. 술식이 간단해서 벨리타도 쉽게 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오웬이 껄렁한 자세로 쭈그려 앉은 채 벨리타를 올려다보았다. 손바닥에 턱을 괴고, 장난스럽게 웃는다.

    “그럼 내가 이기면 나랑 데이트해.”

    능구렁이에 툭툭 요상한 말을 뱉지만 허튼 말은 하지 않는다. 벨리타는 오웬의 말 속에 숨은 뜻을 짐작하기 위해 인상까지 찌푸려야 했다. 데이트라고 하지만 용을 잡으러 가자든가, 다른 의미가 있을 거다.

    고민하는 벨리타에게 오웬은 상처를 받았다. 데이트 하나 하자는데 인상까지 찌푸려야 할 일인가. 자신이 싫은가.

    오웬이 시무룩하게 나뭇가지로 바닥을 들쑤셨다. 흙이 움푹 파이길 수십 번, 벨리타가 조심스럽게 대답 아닌 질문을 했다.

    “설마 진짜 데이트, 하자는 건 아니지?”

    “맞는데.”

    어이가 없었다. 허무하기도 했다. 벨리타는 길게 한숨을 뱉어냈다.

    “그런 거라면 그냥도 해 줄 수 있어. 진짜 그거면 되는 거야?”

    진심이었다. 오웬에게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같이 시시덕대며 동네 마실이나 가는 건 얼마든지 환영이었다. 용돈도 통 쓸 일이 없어 쌓여만 가고 있는 처지인 데다 며칠을 쓰러져 있기 대수였던 터라 나갈 일도 없었다.

    긍정적인 벨리타의 대답을 들은 오웬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럼 취소! 기다려 봐, 다시 생각해 볼 테니까.”

    그러던가. 짧게 대꾸한 벨리타가 오웬이 그어 놓은 술식을 향해 마력을 흘렸다. 분명 이 짓을 하면 기절할 게 분명하지만 기다리고만 있기에는 벨리타의 성격이 급했다.

    일렁이는 마력을 천천히 흘려 술식을 감싸자 흙바닥에 그어져 있었을 뿐인 도형들이 빛을 뿜었다. 그리고 펑. 주변을 울리는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주위가 터져나갔다.

    폭탄과 같았다. 바닥이 불에 휩싸이고 나뭇가지나 잡초들이 재가 되어 타올랐다.

    갑작스러운 폭발에 놀란 벨리타가 뒷걸음질을 쳤다가 술식의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오웬이 떠올라 오웬을 소리쳐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어떡하지. 죽었나? 다쳤나? 거대한 폭발 속에서 다치지 않을 리 없다.

    하얗게 질린 벨리타가 매캐한 연기를 손으로 휘저으며 달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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