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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80화 (80/150)
  • 80화.

    몇 번이고 진심을 가득 욱여 담아 감사를 전하고 황급히 달려가는 라빌과 테일러를 뒤로한 벨리타는 오웬을 찾았다. 저 셋은 가족의 대화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을 테니.

    문을 두드리고 열었다. 오웬은 서적을 뒤적이고 있었다. 식사 후부터 줄곧 바쁘게 연구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벨리타는 익숙하게 소파에 걸터앉고 오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일에 열중한 남자. 참 섹시하고 좋다. 한참을 기다려도 벨리타를 인지하지 못하기에, 벨리타는 벽을 쿵쿵 두드렸다. 오웬이 화들짝 놀라 돌아본다.

    “아까부터 와 있었어.”

    언제부터 와 있었느냐는 질문을 하려던 오웬은 멋쩍게 입을 다물었다. 벨리타는 옆에 앉으라며 소파를 두드렸지만 오웬은 연구가 진행 중이라며 거절했다.

    벨리타의 손이 갈 곳을 잃어 소파를 문질렀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알 수 있다. 오웬은 밤의 일로 어색해하고 있다는 걸. 벨리타가 몸을 일으켜 오웬의 뒤에 섰다.

    몸이 빳빳하게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벨리타의 고개가 책상으로 들이밀어졌다. 긴 손가락이 서적을 뒤적이다 멈춘다.

    “무슨 연구야? 나 돌아가는 거?”

    “응, 맞아.”

    “나 빨리 돌아가고 싶어. 얼마나 했는데?”

    펜을 쥔 손에 잉크가 가득이었다. 그마저도 묘한 분위기가 있어, 벨리타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애써 서적에 집중하려는 오웬이 가볍게 대꾸한다.

    “반쯤. 그나저나 오늘 음식은 네 세계에서 먹던 거야?”

    “맛있지? 옛날에 딸이 빨리 어른이 되겠다면서 세 그릇을 꾸역꾸역 먹는데, 배가 올챙이처럼 빵빵해져가지고. 자기 배 터진다면서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어.”

    “귀엽네. 음식도 맛있었고.”

    자연스럽다. 벨리타는 안도했다. 불장난을 하긴 했지만 데면데면해지면 벨리타만 손해였다. 자신을 현실로 돌려보내 줄 유일한 방법이 달아나면 큰일이다.

    평소와 다름없는 대꾸하는 걸 보니 며칠 두고 보면 원래의 관계가 될 듯했다. 사각, 펜이 종이 위에서 휘저어졌다. 언제 봐도 오웬은 참 글씨를 못 썼다. 지렁이가 기어가는 것처럼.

    “네가 1서클만 되어도 억지로 연결할 수 있을 것 같긴 해.”

    아니 그 중요한 연구 결과를 아무렇지 않게 말하면 어떡하느냐고. 벨리타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마력 운용은 터무니없이 모자라지만 1서클만 쌓아도 돌아갈 수 있다. 대박 중에 대박이었다. 새해부터 운이 좋다. 올해 운을 다 끌어다 쓴 건 아닐까 싶을 정도의 기쁜 소식이었다.

    기쁨에 못 이겨 벨리타가 오웬을 덥석 껴안았다. 오웬의 몸이 굳는다.

    시선이 마주쳤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술이 닿았다.

    *

    화려한 집무실, 쌓인 서류들 틈에 잭슨이 펜을 휘둘렀다. 노타가 쌓인 문서들 틈으로 두꺼운 서류뭉치를 내밀었다. 잭슨이 서류를 받아 들었다.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집무실을 울렸다.

    역시. 글을 읽어 내리던 잭슨은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미소 지었다.

    어제 낮, 조슈아와 잭슨은 조슈아의 상단에서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잭슨은 조슈아를 알고 있었다. 조슈아도 마찬가지일 터다. 고작 남작 따위를 황태자가 파악하고 있는 이유는 잭슨이 귀족에 대해 사사로운 관심이 많아서가 아니었다.

    대화가 샐 틈 없는 밀실 안, 테이블에 놓이는 찻잔을 밀어낸 잭슨이 조슈아를 향해 이를 드러냈다.

    “네 녀석이 2황자, 에르테의 자금줄이라지.”

    기백에 짓눌린다. 제 손으로 직접 사람을 죽이며 자라온 자의 살기는 몸을 떨게 만들었다.

    조슈아는 손톱이 박혀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고양이 앞에 쥐, 아니, 호랑이 앞에 놓인 다람쥐 꼴이다. 긴장하여 돌아가지 않는 머리에 한껏 집중했다.

    잭슨이 매섭게 웃는다.

    “머리 굴리지 마라.”

    마른침을 삼킨 조슈아는 잭슨의 의도를 파악하려 애썼다. 잭슨은 주술서에 관심이 없을 터다. 그저 조슈아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했던 것뿐이다. 벨리타의 앞에서는 그리 멍청한 강아지처럼 굴었으면서.

    잭슨이 자신의 무릎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일정한 소음이 소름 끼친다.

    “2황자 에르테의 편을 자처해 황제 폐하로부터 지지를 받고. 전쟁에 도움을 주었다는 명목으로 권력을 부여받았다지. 내가 전쟁에 나가 있는 틈에……. 약삭빠르기도 하군.”

    “…….”

    “네가 상단을 굴리며 에르테의 자금을 세탁한다는 것도 안다. 그러기 위해 폐하가 네 상단을 키워준 것도 알아.”

    잭슨의 말이 맞다. 조슈아는 2황자를 지지하는 황제와 황후의 덕을 보고자 2황자를 돕겠노라 나섰고, 그 덕에 상단을 키울 수 있었다. 애초에 군수 물자도 황제의 것이었다.

    조슈아의 상단은 황제와 2황자를 위해 운영되었다. 2황자의 세력 중심부만 겨우 아는 정보인데, 어떻게 알았는지. 조슈아는 뒷목이 서늘해졌다.

    이렇게 단둘이 마주하는 것도 잭슨의 관용인 걸까. 이미 죽일 수 있는 위치다. 비명횡사로 처리가 되어 누구도 찾지 않게 만들 수 있는 힘이, 잭슨에게는 있었다. 더러운 짓도 서슴지 않는 길드도, 상단도 발밑에 두고 있는 황태자 전하이시니. 이야기를 나누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알 수 없어서 두려웠다.

    조슈아는 초조함을 감추려 차를 들이켰다. 잭슨이 낮게 웃었다. 조슈아 자신은 먹이였고, 잭슨은 포식자였다. 본능적인 공포감.

    조슈아가 발끝을 움츠렸다. 혀에 설탕을 문 듯, 말로 구슬릴 생각도 들지 않는다.

    “네가 보기엔, 에르테가 황제가 될 것 같았나 보지. 네 안목 하나 참 처참하군. 상단주라는 자가…….”

    눌러쓴 후드 너머로 명백한 비웃음이 내비쳤다. 조슈아는 자존심이 상한다는 감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두려웠다. 모든 걸 꿰뚫어 보고 있는 잭슨이, 여태 그랬던 것처럼 대화의 흐름을 주도하려다 살해당할 것만 같은 예감이 전부 공포였다.

    잭슨은 얕게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오만하고 고고한 낯짝이다.

    “널 회유하고자 하는 마음도 없다. 파텔 후작에게 전해라. 2황자는 황제가 되지 못한다고. 고작 내 약혼녀의 가문에도 대항하지 못할 수준이라면 얌전히 웅크리고 벨리타나 잘 챙기라 전해.”

    토악질이 나올 만큼 소름 끼쳤다. 잭슨이 알고 있는 정보는 어디까지인지. 벨리타가 독을 먹고 쓰러진 후, 테일러는 2황자의 편에 섰다. 얼마 되지 않은 소식인데도 잭슨은 훤히 꿰고 있었다. 정보가 새고 있나.

    조슈아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잭슨을 바라보았다. 잭슨이 덤덤하고 감정 하나 깃들지 않은 얼굴로 찻잔을 툭, 건드린다.

    “황태자 체면에 아무것도 사지 않고 나온다면 우습겠지. 주술서를 1000장씩 주문하겠다.”

    값비싼 주술서 10가지를 1000장씩. 값을 치러도 남을 만큼 금전적으로도, 정보로도 우세하다는 걸 내세우고 있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식은땀이 흐른다.

    조슈아는 주먹을 힘껏 쥐었다. 툭, 잭슨이 건드리던 찻잔이 넘어져 테이블을 적신다. 잭슨이 사납게 웃으며 일어났다.

    “2황자에게도 전해라. 내가 주술서를 1000장씩, 구매했다고. 그 되지도 않는 대가리 굴리며 열심히 추측해 보라고 말이야.”

    잭슨은 2황자의 손에 있는 상단에서 마정석 하나로 사용할 수 있는 주술서를 대거 구입했다. 조슈아는 어렴풋이 느껴지는 예감을 애써 모르는 체했다. 티를 내서는 안 되었으니.

    에르테는 고민하지 않을 거다. 생각이라는 걸 곧잘 하는 편이 아닌 황자였으니까. 황제와 황후에게 전하라는 뜻이 되겠지.

    조슈아는 버석하게 마른 입술을 문질렀다.

    선전포고다. 황궁 파티에서 했던 선전포고와는 결이 다르다. 조슈아는 늘 해 오던 표정 관리도 할 수 없었다.

    어제의 기억을 회상한 잭슨은 낮게 미소 지었다. 지금이면 황후와 황제의 귀에도 들어갔을 소식이다. 2황자의 세력 중심부도 접했을 것이다.

    자신을 죽이거나 끌어내리려는 수작질이 거세지리라 예상한 잭슨은 의자에 등을 기댔다. 이미 벨리타의 독살 사건을 이용하여 태자궁에 심어진 첩자들도 제거했다. 사람도 더 들이지 않는다.

    슬슬, 때가 된 듯했다. 노타에게 받은 2황자의 실질적 세력이 적힌 문서를 훑어 넘기며 잭슨은 연신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

    가족의 일원으로 완벽히 받아들여졌음을 안 데이비드는 티를 내려고 하지 않았지만 무척 기뻐 보였다. 영지로 편지와 선물을 자주 보내기도 했다.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 큰 사건 없이 시간이 흘렀다. 1서클만 되어도 현실로 돌아갈 가능성을 찾은 벨리타는 오웬과 마력 다루기를 연습했다.

    흐름을 다루는 건 마력을 사용하는 것과는 다른 이치였으니 몸에 무리가 되지 않았으나 늦겨울이 될 무렵, 흐름을 깨우친 벨리타가 술식을 이용하여 마법을 사용하려고 하자 곧장 쓰러졌다. 신력과 마력이 충돌한 탓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놀란 잭슨과 조슈아, 처음 안 소르니는 당연히 뒤집어졌다.

    벨리타는 여러 번 쓰러지길 반복했다. 짜증이 역력했지만 쓰러질 때마다 마력이 늘어가는 것이 보여 그만둘 수도 없었다.

    효자, 효녀들은 우리 벨리타 아프지 말라며 안달을 냈지만 브레이크 없는 불도저 벨리타는 허구한 날 쓰러졌다. 마법을 사용하려다가, 서클을 쌓으려다가 며칠을 앓았다.

    잭슨이 적당히 시키라며 오웬의 멱살을 잡은 건, 봄이 될 무렵이었다.

    푸른 새싹이 돋아나고 따뜻한 햇볕과 느슨해진 추위에 벨리타는 산을 오르는 일이 잦았다. 벨리타는 4월이 된 오늘도 여념 없이 산에 올라 풀을 잔뜩 뜯은 채 돌아왔다. 봄이라 나물이 많다며 신이 났기 때문이다. 산이 가까워 다행이었다.

    벨리타는 아침 일찍 떠나 낮에 돌아왔다. 갑자기 방문한 잭슨이 볼을 부루퉁하게 부풀렸다.

    “넌 또 여기 왜 왔어.”

    “……몸도 안 좋은데 자꾸 어딜 돌아다니나.”

    새해가 되고 영지로 돌아가려던 벨리타를 잡고 늘어져 수도 저택에 붙들어 놓은 잭슨은 심통이 가득 났다. 벨리타가 종종 태자궁으로 가곤 했지만, 최근에는 잭슨이 몸소 찾아왔다. 얼마나 자주 찾아오는지, 데이비드와 정치에 관해 논하기도 했다.

    인재라면 환영인 잭슨이었고, 벨리타의 동생인 데이비드와 가까워지면 득을 볼 수 있다는 계산을 했으리라. 그 외의 의도가 있는지도 모르고.

    잭슨이 벨리타의 안색을 살폈다. 곧잘 쓰러져 몸이 더 마른 벨리타가 몹시도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도 건강에 대해 잔소리를 들어서 귀에 딱지가 앉은 탓에 무덤덤해진 벨리타가 잭슨을 무시하고 주방으로 향했다. 잭슨이 졸졸 따라왔다. 데이비드가 있었다면 잭슨을 말렸을 텐데, 데이비드는 아카데미에 있었다.

    주방 한편에 천을 펼쳐 산에서 캐온 명이 나물을 정리하던 벨리타가 뒤에서 꿍얼거리는 잭슨을 돌연 돌아보았다. 잭슨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벨리타는 말갛게 웃으며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와서 칼질 좀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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