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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79화 (79/150)
  • 79화.

    언제 씻고 옷까지 챙겨 입었는지. 벨리타는 단출한 드레스를 입고는 먼저 방을 떠났다.

    침대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흔적은 그대로였는데, 벌어진 건 없었다. 섭섭한가.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왜?

    오웬은 제 심리상태에 대해 고뇌했다. 말 그대로 불장난이었다. 무게 따윈 없는. 감정을 느낄 가치도 없는 행위였다.

    이불을 끌어 어깨까지 둘러 감싼 오웬은 잘 꾸며진 선물상자만 매만졌다.

    씻고 옷을 차려입을 시간에 자신도 깨워 줬으면 싶었던가. 그렇다. 그렇다면 함께 아침을 맞이하고 싶었나? 맞는 것 같다. 함께 눈을 뜨고 잘 잤느냐며, 아침 인사를 나누고 간결한 안부라도 묻길 바랐는가? 그랬다. 그러길 바랐다.

    그래서 오웬은 서운했다. 크게 바란 것도 없었다. 사소하고 아주 하찮은 바람이었다. 하늘과 땅이 뒤집힌다거나, 한겨울에 꽃이 피고 새싹이 돋는 것 따위 바라지도 않았다.

    오웬은 자신의 졸렬함과 감성적인 태도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순간의 장난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벨리타와의 관계가 딱 그 정도의 거리였음을 인지했는데도.

    벨리타와의 행위에 의미가 있기를 원했던 걸까. 혹은 의미부여를 하고 싶은 건가.

    오웬은 마른세수를 했다. 복잡한 속내가 어지러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술 탓이겠지. 숙취 때문이다.

    침대에서 벗어난 오웬이 침대 아래에 나뒹구는 옷가지를 주워 입었다. 다 말라 버린 카나페도 한입에 욱여넣었다. 밥부터 먹으러 가야겠다.

    덥수룩한 머리를 대충 빗어 내리며 식당에 도착한 오웬은 헛숨을 들이켰다. 벨리타의 어머니, 아버지가 나란히 앉아 벨리타와 데이비드를 데리고 단란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탓이다.

    현 상황에서 벨리타의 부모와 마주하고 싶지는 않았다. 잘 부탁한다는 요구를 받았는데 너무 잘 대한 나머지 오랫동안 함께했으니.

    고역이었다. 오웬이 슬슬, 뒷걸음질을 쳤다. 벨리타가 고개를 돌려 오웬을 발견했다. 이리 오라는 양, 손짓을 한다. 야이, 네가 그러면 안 되지. 양심도 없냐.

    육성으로 꺼내기에는 라빌과 테일러를 감당할 수 없던 오웬은 얌전히 데이비드의 옆에 앉았다. 라빌과 테일러가 살갑게 인사를 건네 왔다. 오웬은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나눴다.

    “그래, 혼인을 하지 않는다고 하니 무척 다행이구나.”

    오웬이 등장하기 전, 하던 대화를 이어나간 라빌이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벨리타가 멋쩍게 웃었다. 테일러도 정말 다행이라며 동조했다.

    라빌의 말이 끝나자 테일러가 대화를 이었다.

    “데이비드에게 전해 들었다. 황궁에 갈 적마다 쓰러졌다면서. 그건 황태자 전하의 문제 아니니. 네게 어떤 행위를 했기에 네가 그리 다치고 혼절한 거냐. ……황태자 전하의 승전 파티에서 귀족을 죽이겠다고 선언까지 했다지. 가축인 양 질질 끌고 말이다. 본디 황태자란 그리 천박하게 굴 자리가 아니거늘. 황태자의 자질이 의심스럽구나.”

    심각한 대화였다. 오웬은 진심으로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테일러의 묵직한 언사에 놀란 벨리타가 손사래를 쳤다. 데이비드와 오웬, 벨리타는 먹은 것도 없는데 체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원래 제가 자주 아프잖아요. 쓰러지는 시기가 그랬던 거예요. 오해 마세요. 들어 보니까 잭, 아니 전하께서도 이유가 있으셨어요.”

    “글쎄다. 네가 겪은 일도 있으니 곱게 보이질 않는구나. 차라리 2황자를 지지하는 편이…….”

    잭슨을 끌어내리겠다 선언했음과 다름없었다. 벨리타의 머릿속이 하얗게 타들어 갔다.

    원래의 소설도 이런 전개였을까. 가족이 남자 주인공이 아닌 대적자를 지지한다고 나서는 이 상황이 맞는 걸까.

    벨리타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테일러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 잘못된 일도 아니었다. 어느 아버지가 제 딸이 놈팡이만 만났다 하면 앓아눕고, 크게 다쳐서 돌아오는 데다 뜬금없이 결혼을 하겠다고 선포하는데 곱게 볼까.

    심지어 놈팡이 때문에 독까지 먹었는데 제대로 된 수사도 끝마치지 않고 어영부영 넘어갔다. 결혼을 한다니 입을 다물고 지켜보았을 뿐이다. 아무 사이도 아니게 된 이상, 결코 제 딸의 전 애인이라고 넘어갈 상황이 아니었다.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놈. 후작가의 귀한 딸을 엉망으로 대했으면 제국민에게는 얼마나 악독하게 굴까 걱정이 되었을 터였다.

    벨리타는 이해했다. 제3자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잭슨은 결코 성군이 될 재목은 아니었다. 미성숙한 데다 인간성도 결여되어 있다. 정치를 잘한다고 하더라도 따뜻한 성군은 되지 못할 것이다. 차라리 멍청한 2황자를 황좌에 앉혀 놓고 섭정을 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테일러의 말에 라빌도 다른 언질 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벨리타는 이미 라빌과 테일러가 마음을 굳혔음을 깨달았다. 벨리타가 아무리 잭슨에 대해 떠들어도 바뀌지 않을 거다. 정치에 관여하는 후작가의 입장에서는 쉽게 휘두를 수 있는 황제가 달가울 테니.

    벨리타는 입씨름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떠날 입장, 번거롭고 싶지 않다.

    문이 열리고 하녀들이 들어왔다. 테이블에 놓이는 그릇의 수가 많았다. 새해를 시작하는 첫날의 아침이기 때문이다.

    테이블에 나열된 음식을 본 벨리타를 제외한 전부는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음식들이었다. 라빌이 손가락으로 입가를 가렸다. 당혹스러움을 감추기 위한 노력이었다.

    “이게 무어니. 처음 보는 음식들뿐이구나.”

    제대로 음식을 만들어 오라는 라빌의 부드러운 회유에 벨리타는 설명하려는 하녀의 말을 가로챘다. 스푼을 든 벨리타가 살갑게 웃는다.

    “책에서 먼 나라의 새해 음식들이라고 하니까 먹어 보고 싶어 부탁했어요.”

    “벨리타, 그렇다고 해서…… 아니다. 그래, 먹자.”

    제 딸이 미쳤었다는 사실이 이제야 떠오른 라빌은 입을 다물었다. 벨리타는 자신이 미쳤다는 소문과 인식을 요긴하게 써먹었음에 기뻤다.

    벨리타가 반찬들을 하나하나 짚으며 설명했다. 전, 당면이 아닌 잡채, 김치 등 조리법 하나하나 주방장들을 들들 볶아 연습시킨 결과였다. 추석이 언제인지 몰라 그냥 넘어갔지만 새해는 챙겨야 한다.

    느글느글한 음식을 새해 첫날부터 먹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한국인이라면 새해 아침상은 제대로 챙겨야 하는 법이기도 하고.

    반찬을 설명한 벨리타가 덩그러니 사람들 앞에 놓인 큰 그릇을 가리켰다.

    “이건 떡국이에요. 사골로 육수를 냈으니까 기가 막힐 거예요. 이거 먹으면 한 살 더 먹는대요.”

    제 아이에게 설명해 줬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떡국을 왜 먹느냐는 질문에 떡국을 먹으면 한 살 더 먹는 거라는 대답을 해줬었다. 그랬더니 열 그릇 먹고 열 살 먹겠다던 딸의 귀여운 말을 들었다. 딸이 스물둘 먹고는 더는 나이를 안 먹겠다며 떡국 끓이지 말라고 말장난을 했던 기억도 덩달아 떠올랐다. 지금쯤 딸도 새해를 맞이했을까.

    사골로 육수 내주면 그렇게 잘 먹었는데. 고기 고명을 그리 찾았는데. 씁쓸하다.

    벨리타가 고기 고명이 가득 담긴 그릇을 가리키며 간이 맞지 않으면 추가해서 먹으라며 조언했다.

    오웬과 데이비드는 벨리타의 먼 나라 이웃 나라 음식 잔치에 익숙해진 덕에 군소리 않고 스푼을 들었다. 데이비드는 평소와 다르게 먹기 편하다며 칭찬까지 했다.

    익숙하지 않은 이들의 반응과 새로운 음식에 당황하면서도 제 딸의 노력을 보아 라빌과 테일러는 열심히 먹었다. 새롭지만 단란한 가족의 식사 시간이었다.

    *

    식사를 마치고 벨리타는 라빌과 테일러를 불러냈다. 테일러의 집무실에 둘러앉은 셋은 간단한 안부를 주고받았다. 내심 라빌과 테일러는 무척 기뻤다. 딸과의 시간은 언제라도 즐거운 법이니까.

    벨리타는 라빌과 테일러에게 연말 선물로 준비했으나 새해 선물이 된 선물을 건넨 후 기뻐할 틈도 주지 않고 본론을 꺼냈다.

    “데이비드 퀘체 피워요!”

    라빌과 테일러는 소중하게 끌어안던 선물을 일제히 떨어트렸다.

    “뭐? 다시, 잠시만. 이해가 되질 않는구나. 다시 말해 보렴.”

    평생을 무뚝뚝한 얼굴로 살아오던 라빌도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벨리타는 또랑또랑한 낯으로 다시금 소리쳤다.

    “동생 퀘체 피운데요!”

    테일러의 낯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미간을 짚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라빌의 반응도 다르지 않았다. 저들 딴에는 금지옥엽, 어화둥둥 키운 아들이었다. 그런 아들이 퀘체를 피우는 일탈을 벌였다니.

    라빌은 눈앞이 아찔해졌다. 어떻게 혼을 내야 할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착하고 의젓하며 속 썩일 일 없었던 아들이다. 결코 단 한 번도 혼날 짓을 한 적도 없다. 라빌과 테일러는 혼란에 빠졌다.

    벨리타는 역시 데이비드는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사랑하는 아이가 아니라면 이런 반응이 나올 리 없으니까. 이렇게까지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질려 있지 않을 거다. 벨리타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혼은 제가 어제 실컷 냈어요. 눈물을 쏙 빼놨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 그래, 그렇……. 후우……. 너무 놀라서 어쩔 줄 모르겠구나. 데이비드가 일탈을 한다니. 우리가 뭘 잘못했나? 라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나.”

    “…….”

    “앉은 채로 기절했나.”

    테일러는 손을 덜덜 떨었다. 벨리타가 손을 뻗어 라빌과 테일러의 손을 붙잡았다. 잔뜩 긴장하고 놀란 눈. 다 제 탓인 것 같고 걱정만 되는 안색.

    벨리타도 모르지 않는다. 제 딸도 종종 속을 썩여오곤 했으니까. 가슴이 까맣게 타들어 가고 머리가 하얗게 비워지는 초조함도 안다. 벨리타가 둘을 다독였다.

    “혼은 제가 냈으니까 두 분은 그냥, 데이비드랑 깊게 이야기해 주세요. 애가 아직도 자기가 가족이 아닌 줄 알더라고요.”

    가슴이 무너지겠지. 세상이 뒤집히는 감각이겠지. 벨리타는 둘의 심정을 짐작할 수도 없었다. 사랑해 마지않는 제 아들이 가족이라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걸 알면 얼마나 심장이 찢어지겠는가.

    벨리타는 둘의 손을 힘주어 쥐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위로는 이따위 것밖에 없었다.

    “더 표현해 줘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있다는 거, 속에만 꽁꽁 숨겨두고 있지 마시고. 말을 해 줘야 알아먹지 표현 안 하면 어떻게 알겠어요. 애정표현은 숨기면 숨길수록 손해예요. 말할 수 있는 건 하는 게 좋아요.”

    “…….”

    “자, 들으셨으면 이제 데이비드 찾아가서 사랑한다고 백 번 말해 주고 오세요.”

    이루 말할 수 없는 참담함과 찢어지는 고통이다. 라빌과 테일러는 벨리타의 손을 마주 잡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은 입을 열었다.

    “벨리타, 고맙다. 데이비드도 그렇지만, 우리는 너도 무척 사랑하고 있단다.”

    “알아요. 그러니까 아는 나보다 모르는 바보한테 가서 말해 주고 오세요.”

    표현을 하지 않는 사람일수록 표현을 했을 때에 전해지는 무게감은 묵직하다. 벨리타는 쓰게 웃었다. 이 둘이 전하는 사랑의 대상은, 자신이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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