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벨리타는 충격적인 발언을 뱉어낸 뒤에도 당당했다. 취해서, 그런 걸 거다.
오웬의 귀와 목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다 큰 아이의 엄마라고 하더니,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수위가 센 듯했다.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겠다.
어색하게 허공을 배회하던 오웬의 손이 주춤거리며 어깨를 붙잡았다. 몸을 일으키며 벨리타를 들어 올렸다. 쉽게 들려 몸이 의자에서 떨어졌다.
“자자, 벨리타. 자야겠다.”
“나 재우고 뭔 짓 하려고.”
능청스러운 붉은 낯이 가까워졌다. 히죽거리며 웃는 게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겼다.
타들어갈 듯 새빨간 살갗을 어찌 숨길 새도 없어 오웬은 고작 고개를 숙이고 눈만 굴려 벨리타를 보는 게 다였다.
어깨가 붙잡혀 까치발을 세워야 바닥에 겨우 닿는 벨리타가 오웬의 팔뚝을 쥐었다. 닿는 부분이 불에 타는 것처럼 뜨겁다.
무슨 짓을 할 생각도 없다. 한다면 이불이나 덮어 주는 게 다다. 휘말리는 일에는 면역이 없는 오웬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벨리타를 든 채 침대에 놓아주었다.
언제나 한발 물러나 관망하는 역할이다. 흥미가 떨어지면 끊어내고 즐거우면 그 자리에 머무르는 비중 없는 역할. 오웬은 그랬다.
그러니 사건의 중심이 되는 건 낯설고 중심을 잡을 수 없는 일이다. 속절없이 휘말려 폭풍에 말려드는 부스러기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폭풍의 눈은 벨리타였기에 오웬은 반항 없이 폭풍에 몸을 싣게 되는 것이다.
푹신한 침대로 벨리타가 무너졌다. 이불이 들썩거리고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향긋한 향유가 코끝에 맴돈다. 넓게 트인 창문 사이로 내린 빛이 벨리타를 둘러쌌다. 그저 누워만 있을 뿐인데도, 빛이 퍼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이 이상 말려들면 사고를 친다. 언제나 그랬듯 물러나서, 적당히 간섭하다 빠져나갈 정도로.
그래야 하는데.
“어디 가.”
옷깃을 붙잡은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오웬은 알 수 없는 기분이 버거웠다.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어려워서, 분석하고자 하면 더 미궁으로 빠지고 만다. 가볍게 옷깃을 당기는 힘에도 속절없이 무너졌다.
벨리타를 사이에 두고 팔이 뻗어졌다. 가두어진 벨리타는 언제 실없이 웃었냐는 듯 감정 없이 오웬을 바라보았다.
처연해 보였고 덤덤해 보이기도 했다. 오웬은 울컥, 차오르는 감정을 납득할 수 없었다.
“너마저 없으면 난 어떻게 버텨.”
“…….”
“가지 마.”
오웬은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언제나 관망하던 자신이 벨리타에게 엮여 달아날 수 없다는 걸. 달아나고 싶지도 않다는 것을.
오웬이 벨리타의 허리를 감싸 여린 몸을 들어 침대에 바로 눕혔다. 벨리타가 오웬의 목덜미에 팔을 두르고 칭얼댔다. 취중진담. 그래. 취해서야 드러나는 솔직한 진심.
벨리타는 의지할 사람이 필요했고 칭얼거림이나마 받아 줄 사람이 필요했다. 오웬은, 벨리타를 가만 두고 볼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베개에 뒤통수를 파묻은 벨리타는 더운 숨을 뱉어냈다. 오웬이 옆에 누워 벨리타의 목덜미 아래로 팔을 밀어 넣었다. 정교한 근육에 뒤통수가 기대어졌다. 벨리타가 고개를 돌려 오웬을 본다.
눈이 마주쳤다.
서로의 시선이 방아쇠라도 된 양, 고개가 가까워졌다. 천천히, 언제든 고개를 빼내어 거절할 수 있도록 둘의 얼굴이 거리를 좁혀 갔다. 입술이 닿았다.
하얀 손이 단정한 얼굴을 쥐었다가 목덜미를 훑었다. 투박하면서도 세심한 손끝이 보랏빛의 머리카락을 헤집고 귓바퀴를 문질렀다. 일련의 자연스러움으로 이루어지는 손길이었다. 피가 머리끝까지 오른다. 자신의 얼굴을 더듬어오는 손길이 자연스럽고 능동적이어서, 목 안이 끓었다. 바보같이 이불만 그러쥐는 게 고작이었다.
그리도 혐오하던 이성을 잃은 본능적인 행위였다. 사건의 당사자, 방관자가 아닌 주요 인물. 짐승과 다름없는 본능에 따른 상황에서의 중심은 오웬과 벨리타였다. 우리 둘뿐. 너와 나.
오웬은 길게 뻗은 손으로 벨리타의 얼굴을 감싸 달아나지 못하도록 붙들었다. 헤집어지는 머리카락만큼 머릿속도 어지러웠다.
숨 쉬는 게 이렇게나 어려웠던가.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오웬은 평소와 다른 자신의 몸 상태에 의문을 품으면서도 강물처럼 당연하게 흘러가는 분위기를 받아들였다.
벨리타의 상체가 오웬의 위를 덮었다. 오웬은 질끈 감았던 눈을 겨우 가늘게 떴다. 흘러내린 머리카락 틈 사이로 벨리타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도 따뜻해 보였던 사람인데 차가운 밤하늘과도 무척 잘 어우러졌다. 오웬은 벨리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얼굴에 드리워지는 속눈썹의 긴 그림자와 핏기 없는 하얀 피부. 술기운에 붉어진 뺨과 이마에 붙은 잔머리까지. 오웬만 아는 벨리타의 모습이다. 그러길 바랐다.
몇 번이고 부딪혔던 입술이 떨어졌다. 이마와 이마가 맞물린다.
“…….”
“…….”
“……벨리타. 난, 나는. 술을 먹고 사고 치고 싶은 생각…… 없어.”
진심이다. 오웬은 지나치게 이성적인 사람으로서 술 따위에 홀려 허튼짓 따위 하고 싶지 않았다. 취해서 서로를 탐하고 본능적으로 행동한다면 짐승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이성을 잃고 행동한 뒤에 따라오는 죄책감과 어색함, 자괴감도 원하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보다 상대에게 피해를 끼치게 될 현 상황에서, 오웬의 선택지는 하나였다.
피하는 것. 감당하지 못할, 책임도 지지 못할 사고는 치고 싶지 않았다. 홀린 듯 입을 맞췄지만 더 이상은 원치 않았다.
오웬이 상체를 일으키려고 팔에 힘을 주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은 이미 숨길 생각도 하지 못했다.
허둥지둥, 멍청하게 달아나려는 오웬의 옷깃을 벨리타가 잡아당겼다. 오웬이 풀썩, 침대로 넘어진다. 드러누운 오웬의 위로 벨리타의 다리가 올랐다.
순식간에 오웬의 위를 점령한 벨리타가 붉게 열이 오른 얼굴로 차분히 그를 내려다보았다. 후우, 가쁜 숨을 토해냈다. 기이하게도 침착하고 멀끔해 보였다.
달빛을 받아 찬란히도 빛나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벨리타가 입을 벌렸다. 입술이 곡선을 그리며 휜다.
“왜 이래. 나 안 취했다니까.”
“……너 취했잖아.”
“다 깼어. 어디 사는 누구가 깰 수밖에 없게 해 줬거든.”
붉어진 피부였음에도 취기는 보이지 않는다. 오웬은 속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정말 취했을지도. 열렬히도 입을 맞추었으니 취기가 달아날 근거도 있었다.
제 위에 올라앉은 벨리타의 하얀 천 너머로 두드러지는 유려한 곡선이. 오웬의 이성을 한 줌 앗아갔다. 내려다보는 시선에 또 한 줌, 가슴께를 지탱해 누르는 작은 손의 감촉에 또 한 줌.
이젠 이성이 남아 있지 않다. 조금씩 빼앗겨 텅 빈 곳간이었다. 철저히 이성으로만 살아온 오웬은 현 상황이 미치도록 적응이 되지 않았다. 이해는커녕 정리도 되지 않는다. 인지조차 불가했다.
벨리타가 길게 늘어진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길 때마다 열이 오른다. 드러난 목선이, 어깨선을 타고 흘러내리는 천 따위가…….
“이건 사고가 아니야.”
아니다. 사고와 다름없다. 연인도, 그와 엇비슷한 관계조차 되지 않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사고뿐이었다. 오웬은 벨리타를 쥘 수 없어 이불을 끌어 손아귀에 쥐었다.
“그냥…… 장난질이야. 언제든 그만둘 수 있고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는.”
질척한 진심을 숨길 장난질. 벨리타는 그리 말하면서 눈을 내리깔았다. 감정을 읽어낼 수 없다. 오웬은 안달이 났다.
사고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동의도 인지도 필요 없이 뜻밖에 벌어지는 일이다. 둘은 술을 마셨으나 맨 정신이었고 현 상황에 대하여 인지도 가능했다.
해를 입지 않느냐 하면, 글쎄. 장난질에도 해를 입곤 하니까. 그래, 장난질이었다. 짓궂게 하는 못된 짓이다. 너무도 짓궂고 못되어서 사고와 다름없이 피해를 입는다.
오웬은 속이 쓰렸다. 술을 마셨어도 주량을 넘기지 않을 정도였는데, 기이하게도 뱃속이 시큼거렸다. 그저 장난질일 뿐이라 일컫는 벨리타의 태도가 덤덤하고 유난스럽지 않아서. 오웬은 위가 뒤틀렸다.
차라리 사고라면 뒷수습을 위해서라도 돌아보게 될 텐데 장난질은 실컷 해 놓고 돌이킬 필요도 없다.
짐작이 되었다. 감정을 나누기가 껄끄러워, 어차피 떠날 사람이니까 선을 그어두는 것이다. 정을 주고 마음을 내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언제든 달아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오웬은 벨리타를 볼 때마다 위태로움을 느꼈던 이유를 알아챘다. 그 멍청이들이 그리도 절절하게 매달리던 근원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한껏 쥐고 있던 이불을 놓았다. 벨리타의 팔을 잡아끌어 당기고 허리를 붙들었다. 벨리타의 상체가 앞으로 쏠려 오웬의 앞에 고꾸라졌다. 닿을 듯, 가까워진 거리에 오웬은 피하지 않고 되레 눈을 가늘게 뜨고 입술에 곡선을 그렸다.
“오늘처럼 네가 얄미웠던 적이 없어, 벨리타.”
“하지 않을 것처럼 이야기하네.”
“그럴 리가.”
어떻게 벨리타를 거절할 수 있을까.
벨리타의 고개가 깊이 숙어져, 오웬의 입술 끝에 입을 맞췄다. 조련에 능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저 또한. 오웬이 벌어진 입 틈새로 갈라진 목소리가 토해졌다.
오웬은 이 밤을 무의미하게 넘기고 싶지 않았다. 이성을 버린 지금 상황에 어떠한 의미라도 부여하고 싶었다. 오웬이 벨리타의 어깨를 가볍게 밀어냈다.
“이름이 뭐야?”
“벨리타.”
“그거 말고.”
코가 맞닿은 상태로 눈만 깜빡거리던 벨리타가 미소를 띠었다. 오웬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는 문장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알 필요 없어.”
다정하면서도 인정 없는 겨울의 햇볕 같은 자. 따스하게 녹여줄 듯 굴면서도 결국은 차디차고 시린 바람에 내버려 두는 얄궂은 겨울의 태양. 피해 달아날 수도 없고 조금의 온기나마 안달 나게 만드는 사람이다. 양극의 이면마저 따를 수밖에 없다.
다시 맞닿는 입술에 오웬은 눈을 감았다. 가볍게 느껴지는 벨리타의 무게가 겁이 나서 오웬은 벨리타의 팔을 붙들었다.
섞이는 숨이, 달면서도 썼다.
*
부스럭, 거슬리는 소리에 오웬은 떠지지 않는 눈을 비볐다. 시야에 아른거리는 따스한 색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유려한 곡선을 이루는 하얀 신체가 바르작거리며 옷을 꿰어 입는다. 침대 아래로 널브러졌을 천 쪼가리가 아니었다. 오웬이 비척대며 상체를 일으켰다. 인기척을 들은 벨리타가 뒤를 돌아보았다.
한참을 마주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적막이었다. 착실히 마저 옷을 입은 벨리타가 선물을 건넸다.
선물을 받기에는 과히 요사스러운 상황이었으나, 잠에서 덜 깬 상태의 오웬은 고분고분 선물을 받아 들었다.
침대에서 일어난 벨리타가 밤새 방치되어 말라비틀어진 카나페를 한 입 집어 먹었다. 오웬에게서 잔뜩 갈라지고 낮아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선물, 어, 고마워.”
“됐어, 너한테 받은 게 많잖아. 옷 입고 내려와, 밥 먹자.”
변한 건 없었다. 해가 서쪽에서 뜬다든가, 마른하늘에 비가 내린다든가, 하는. 자신이 이리도 감성적이었던가?
혼란스러운 오웬에게 퍽 다정하게 말을 건넨 벨리타가 여상스러운 태도로 대응했다. 오웬은 어젯밤부터 이어지는 시큼한 속을 이해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