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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77화 (77/150)

77화.

벨리타는 씨근덕대며 테이블을 가리켰다.

“저거 당장 다 버려. 부모님한테도 다 이야기드릴 거니까 내일 어디 가기만 해.”

“…….”

“대답 안 해?”

“……네.”

혼나기는 이미 충분히 혼난 것 같은데 벨리타는 분노에 차 있었다.

데이비드는 바닥에 가련하게 주저앉아 벨리타를 올려다보았다. 라빌과 테일러보다 벨리타가 더 무섭다.

벨리타는 흥분한 스스로를 애써 가라앉히며 심호흡을 길게 뱉어냈다. 데이비드가 눈치를 본다.

조금쯤은 진정이 되어, 데이비드의 눈높이에 맞추어 쭈그려 앉았다. 눈을 마주 보고 차분하게 데이비드를 타일렀다.

“네가 술을 마시고 퀘체를 하는 건, 남한테 피해 없이 너 스스로 몸을 망치는 거니까 그나마 다행인데. 나는 나중에 네가 남에게 피해를 입히고 상처를 주는 짓을 할까 봐 겁나. 아니, 스스로 몸을 망치는 것도 화가 나고 슬퍼. 건강했으면 좋겠어, 내 동생이.”

데이비드가 주먹을 그러쥐었다. 걱정받는다. 내 동생이라고 했다. 평생 얼굴도 보지 않을 것처럼 굴었고 가주가 되면 내쫓을 생각까지 했던 누님에게 혼이 났다. 애정이 있고 기대가 있어서 혼이 나는 거다. 정말 무관심하고 아무 신경도 쓰지 않는다면 혼이 나지도 않는다. 데이비드는 울컥, 감정이 차올랐다.

걱정을 끼쳐서 미안하기도 했고 혼이 날 짓을 한 스스로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그것보다 더 짙게 깔리는 감정은 기쁨이었다. 미성년인 나이에 엇나가는 짓을 해서 혼이 났고, 크게 잔소리를 들었다. 애정이 전제하에 이루어진 매타작이었다. 애정이 필요해 몸을 망치는 걸 접했으니, 애정을 확인한 현시점부터는.

“건강하게, 행복하게 오래 살아야지. 너 가주 한다며.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해서 자식도 만들어야 될 거 아니야.”

노란빛이 짙게 도는 주황색의 머리가 작게 주억거렸다. 벨리타는 데이비드의 머리에 손을 얹어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티격태격하지만 착한 아이다. 그저 애정이 필요할 뿐. 가족으로서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일 뿐이다. 더 엇나가기 전에 발견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벨리타는 데이비드의 머리를 투박하게 쓰다듬고는 일어섰다.

불쑥 내밀어진 선물 상자. 데이비드는 눈앞에 드리워진 상자를 보고 고개를 들었다. 벨리타가 옅게 웃는다.

“연말 선물. 끊기 어렵겠지만 누나를 봐서라도 그만해. 알았지?”

“……네, 누님.”

상자를 받아 들었다. 무게는 가벼웠지만 무겁게 느껴졌다. 감정이 담겨서, 자신을 위해 고민한 흔적이 짙게 배어 있어서 묵직했다. 데이비드는 입을 꾹 다물고 눈물을 참아냈다.

“내년에 보자. 잘 자, 데이비드.”

“내일이잖습니까.”

“뭐 어때. 재밌잖아.”

하나도 재미없습니다. 툭, 튀어나온 투덜거림에 벨리타가 맑게 웃음을 터트린다. 무신경하게 머리가 쓰다듬어졌다. 데이비드가 상자를 끌어안고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부모님께 말씀드리는 건…… 참아 주시면, 안 됩니까?”

“어, 할 거야. 너 내일 뒈지게 혼날 거야.”

“살려 주십시오.”

무시한 벨리타가 잘 자라며 손인사를 한 뒤 방에서 나갔다. 데이비드는 비로소 눈물을 터트릴 수 있었다. 내일 죽었다, 난.

무섭지는 않았지만 옆에서 벨리타가 깔짝거리며 약 올릴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열이 받는다. 선물 상자를 양손으로 소중하게 쥐어 품에 안았다. 짜증 난다.

*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오웬이 벨리타의 방으로 찾아왔다. 벨리타는 벌써 옷을 갈아입은 상태였고, 테이블에는 술과 안주들이 놓여 있었다.

오웬도 씻고 나서 곧장 찾아온 듯 머리가 젖어 있었다. 벨리타가 환하게 웃으며 와인 잔을 들고 흔들었다.

“시간 딱 맞춰 왔네.”

마주 앉은 오웬에게 벨리타가 반갑게 인사했다. 오웬이 낮게 웃는다. 잔뜩 들떠 보였다. 술 마시는 게 그리도 신이 날까.

벨리타가 와인 잔에 와인을 들이붓고는 오웬의 앞에 놓았다. 마시고 죽자는 소리인가? 벨리타의 잔을 보니 제 잔에 채워진 양보다 배는 많았기에 꼬투리를 잡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정성껏 준비된 카나페를 마땅치 않게 보던 벨리타가 혀를 찼다. 술에는 탕인데.

탕이라니? 오웬은 알아듣지 못했다. 벨리타의 요구대로 짠, 을 하고 잔의 반을 비웠다.

흥이 오른 벨리타가 얼마나 술이 그리웠는지 떠들었다. 오웬은 다른 내색 없이 벨리타의 주절거림을 귀에 담아 들었다. 카나페를 삼킨 벨리타가 화제를 돌렸다.

“데이비드 퀘체 피우는 거 알고 있었어?”

“응? 응.”

알고 있었구나. 왜 말 안 했어, 이 새끼야.

차분했다가 서서히 분노를 표출했다. 오웬은 벌써 벨리타가 취했나, 걱정이 들었다.

오웬이 카나페를 들어 벨리타의 입 안에 넣어줬다. 분노가 수그러들고 눈이 순해졌다. 먹이면 얌전해진다. 언제나 그랬다. 술을 마셔도 변하지 않는 불변의 법칙이다.

“오늘 안 거야? 많이 놀랐겠는데.”

“그걸 알면, 씨이팔, 말을 해 줘야 할 거 아니야.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엄청 혼냈잖아.”

카나페를 또 먹여 줬다. 다시 얌전해진다. 오웬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볼 가득 채워 음식을 씹던 벨리타가 왜 웃느냐며 오웬의 잔에 와인을 따랐다. 잔이 비는 걸 두고 보지 못한다.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벨리타가 주는 잔을 거절하지 못하는 오웬은 주는 족족 술을 받아 마셨다.

쉬엄쉬엄 마시라는 말과 함께 벨리타는 마저 쏟아내지 못한 분노를 쏟아냈다. 벨리타가 짙은 향유의 향이 남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헤집었다.

“애가 술을 마시고 퀘체를 피워대는 것도 여태 몰랐어. 이게 말이나 돼? 같이 사는 사람인데, 내가 오죽 관심이 없었으면 애가 나쁜 짓을 하는 것도 몰랐다는 게 말이 되냐고.”

“몰랐을 수도 있지. 데이비드가 워낙 티를 안 내는 애잖아.”

“알려면 알 수 있었어. 그냥, 내가 관심이 없었던 거야. 내 애도 아니고, 내 진짜 가족도 아닌데…….”

아이에게 무관심했던 자신에게 향한 분노였다. 벨리타는 그래도 정이 들었고, 현실로 돌아가기 전까지 본래의 벨리타를 위해 챙겨 주고자 했던 아이에게 철저히 무심했다. 제 친동생이 일탈을 했을 때는 귀신같이 알아챘는데도. 애정의 차이고 관심의 차이다.

벨리타는 제 탓임을 알았다. 데이비드가 자기 몸을 망치고 있는데도 몰랐던 건, 벨리타의 탓이다.

“내 친동생과 닮아서, 더 화가 났던 거야.”

오웬은 맞장구를 쳤다. 더 자세한 내막에 대해 질문을 얹지도 않았고 해석하려 들지도 않았다. 덤덤한 반응이다. 벨리타는 오웬의 그런 태도를 썩 좋아했다. 대답이 돌아오는 대나무 숲에 비밀을 토해내는 기분이라.

벨리타는 와인을 음미할 틈도 없이 단번에 들이켰다. 쓰다. 혀끝이 알싸하고 속이 쓰렸다. 오웬이 벨리타의 잔을 채웠다.

“내 동생이, 문철이가, 일탈하는 걸 알았어. 말렸지, 물론 말렸는데. 내가 제대로 못 말려서……. 애가 술 먹고 다른 애들과 몸싸움을 벌이는 바람에…….”

혹시 죽은 걸까. 오웬은 조금 긴장이 되었다. 깊고 어두운 이야기가 나올 걸 알고 있었지만 누군가의 목숨에 관한 이야기는 무겁다. 위로해 줄 말도 여의치 않았다.

오웬은 다정한 체하지만 본질은 파란 피가 흐른다고 여겨질 정도로 매정한 마법사였기에.

벨리타가 또 잔을 비워냈다. 오웬은 잔을 채워야 할까 고민했다.

“깜빵에 갔어. 집구석에 돈이 있나, 빽이 있나. 줫도 없어서……. 내가 제대로 말렸더라면 그런 일도 없었는데…….”

깜빵이라면, 역시 감옥인 걸까. 오웬은 벨리타의 언어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빽은……. 뭐지. 오웬은 대답도 하지 못하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벨리타가 쾅, 테이블을 내리쳤다. 오웬이 깜짝 놀라 벨리타를 바라봤다. 볼이 붉었다. 핏기 없는 하얀 얼굴이라 붉은빛이 더 두드러졌다.

“벨리타, 취했어?”

“아~니. 전혀?”

흐느적, 벨리타가 의자에 늘어졌다. 오웬은 확신했다. 벨리타는 이미 취해 있었다. 그리 목을 열고 들이부었으니 취할 수밖에 없었을 터다. 몸이 다르니 주량도 다를 거고.

오웬이 일어나 자진모리장단으로 상모를 돌리는 벨리타의 머리를 받쳤다. 큼지막한 손안에 복슬복슬한 머리카락이 흐트러진다. 손이 간질거렸다.

벨리타가 퍼뜩 고개를 올려 오웬을 바라보았다.

히죽, 미소를 짓는다. 손안에 얽혀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달빛을 받아 묘하게 빛났다. 하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처진 눈매가 사르르 사랑스럽게 접혔다.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린다.

손아귀에 다 들어오는 얼굴이, 귀엽다 못해 심장이 저릿해서. 오웬은 그만 벨리타의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왜 가려, 왜애.”

“그만, 마시고 이제 자는 게 좋겠어.”

칭얼거린다. 맥도 못 추리는 손이 오웬의 팔뚝을 긁어내렸다.

오웬이 조용히 웃었다. 세상 귀여운 짓은 혼자 다 하고 있다.

오웬이 타이르듯, 조곤조곤하게 속삭였다.

“너무 빨리 마셔서 취했나 봐. 자자, 벨리타.”

“나 치워 버리려고? 어?”

너어는, 그러면 안 되지. 벨리타가 오웬의 품으로 무너졌다. 작은 몸이 어깨에 얹어진다. 오웬은 벨리타의 등을 감싸 안고 헛웃음을 지었다. 술 먹고 사고 치고 싶지는 않은데. 한다면 맨 정신이 좋다.

오웬이 벨리타를 안아 들기 위해 팔을 움직이려는 순간, 벨리타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쭈그려 앉은 오웬의 얼굴 앞에 벨리타의 얼굴이 드리워졌다.

가깝다. 오웬이 고개를 뒤로 물리자 하얗고 작은 손이 오웬의 볼을 덥석 잡아 쥐었다. 단정한 얼굴의 볼이 눌려 입술이 튀어나왔다.

어안이 벙벙해 오웬은 눈만 끔뻑거렸다. 풀린 눈이 오웬의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뜯어 살핀다. 이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오웬의 뺨을 툭툭 쳤다.

“요놈 참, 잘도 생겼다.”

흥미로운 발언이었다. 대충 침대에 얹어 재워 두려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오웬은 이 상황이 무척 재미있게 느껴졌다. 취중진담이라고 하던가. 벨리타가 오웬의 생김새를 무척 좋아하고 있음을 알았지만 육성으로 들어본 적은 없었다. 취한 사람을 데리고 놀리는 짓은 나쁜 짓임을 알지만, 재미있잖아. 어쩔 수 없다.

오웬이 장난기 가득한 낯을 해 보였다. 단정한 눈매가 가늘어졌다.

“나 예뻐?”

“응, 너어무 예뻐. 이눔 새끼. 잘생긴 새끼.”

떡 주무르듯 가느다란 손이 오웬의 뺨을 주물렀다. 차지게도 감긴다. 표현과 스킨십은 언제나 제 몫이었다. 먼저 다가가면 피하거나 못내 받아주는 반응.

그런 반응도 썩 즐거웠지만 벨리타가 먼저 해주는 표현은 새로웠다. 그렇기에 흥미로웠고 재미있다.

오웬은 얌전히 얼굴을 내주었다. 얇은 손가락에 의해 얼굴이 구겨지지만 상관없다.

“나 얼마나 예뻐? 뽀뽀해 주고 싶을 정도야?”

“입술만 비비적거린다고 되냐. 진도를 더 나가야 성에 차지.”

……뭐? 내가 잘못 들었나? 오웬이 혼란과 충격, 혼돈 그 자체가 가득한 얼굴로 벨리타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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