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그,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진짜입니다. 가르쳐 준 사람도 없습니다.”
거짓말이다. 눈 굴리는 소리가 다 들릴 지경이다. 챙겨온 선물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데이비드의 시선이 선물로 돌아가기에 벨리타가 눈 굴리지 말라며 소리쳤다. 데이비드가 소스라치게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친구가 알려 줬어? 네가 무슨 재주로 퀘체를 구해. 거짓말하지 마. 다 알아.”
다 알 방법도 없다는 걸 안다. 벨리타가 겁을 주기 위해 하는 말인 것도 안다. 그럼에도 데이비드는 겁이 났다. 라빌에게 들켜도 이렇게 무섭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거짓말이 나오지 않는다.
데이비드가 우물쭈물, 잔뜩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거짓말, 아닙, 니다. 제가 구했습니다.”
“……됐고, 너 이거 왜 했어. 이유가 뭐야.”
그렇게 으름을 놓으며 캐물을 것처럼 굴더니 바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데이비드는 움찔, 몸을 떨었다. 피운 이유를 설명하기에는 무척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데이비드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벨리타가 대답 안 해?! 라고 소리치자, 그제야 더듬거리며 답을 내놓았다.
“힘, 들어서 그랬습니다.”
“뭐가 힘든데.”
그 이유를 말하기가 부끄럽다니까요. 데이비드는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대답을 기다리던 벨리타가 마지못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회초리 어디 있어. 회초리 가져와.”
데이비드는 결단코 가족에게 맞아 본 적이 없었다. 벨리타가 사랑의 매랍시고 등짝을 두들겨 패는 둥의 손찌검을 제외하면 라빌에게도, 타일러에게도 혼이 나지도 않았다.
원체 잘했던 아이니까, 알아서 몸을 사리고 버려지지 않기 위해 착실하게 굴었으니까. 무관심할지언정 혼은 나본 적 없었다.
데이비드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얘기, 얘기하겠습니다. 할게요.”
“해 봐.”
수치심과 겁에 질려 붉어진 낯을 숨기며 데이비드가 입을 열었다.
“……가족이, 되고 싶었는데…….”
“가족이잖아.”
“제발 말을 좀 하면 끝까지 들어 주시면 안 됩니까?”
“요놈이 뭘 잘했다고. 그래, 해 봐.”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음을 느낀 벨리타가 의자를 끌어와 데이비드의 앞에 마주 앉았다. 데이비드의 목까지 붉어져 있었다. 물론 벨리타의 관심은 퀘체에 있었다. 데이비드는 제 바짓단을 꾹 쥐었다.
“누님이 황태자비가 되겠다고 하셨을 때였습니다. 어머님께서, 저를 부르셔서 하시는 말씀이……. 누님이 바란다면 물심양면으로 돕겠다고 하셨고 체르핀 공작가에 패하여 가문이 위태로워지면……. 돌아보지 말고 달아나라고, 하셨, 습니다.”
떠올리기만 해도 서러운 일이었는지 데이비드는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벨리타는 섣불리 달래주지 않았다. 데이비드는 잘못을 했고, 그 잘못의 이유를 답하고 있었으니까. 다 혼낸 후에 달래주어도 늦지 않다.
벨리타는 다리를 꼬았다. 데이비드가 곁눈질로 벨리타를 흘겨보았다.
“저는, 전……. 가문이 몰락하게 되는 순간에도 끝까지…….”
숨을 들이켰다. 데이비드는 삼킨 숨을 뱉어내지 못하고 호흡을 잠시 멈추었다. 숨소리가 자잘하게 떨린다. 데이비드가 눈을 질끈 감았다.
“가족이 되지 못……하는구나. 친 가족에게 돌아가도 내쳐질 입장이고, 이곳에 있어도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니……. 괴로, 괴로워서…….”
역시 부끄럽다. 쥐구멍이 있다면 머리라도 들이밀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벨리타가 들으면 어떤 반응을 할지 상상이 가니 더 부끄러웠다. 라빌과 테일러에게 알려지는 것도 무섭지 않다. 언제나 그랬듯이 무관심으로 대할 테니까.
데이비드는 바지에 주름이 지도록 힘주어 쥐었다. 어깨가 이따금 들썩거렸다.
그런 데이비드를 보는 벨리타는 한 가지의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어딜 보아도 라빌이 데이비드라도 살리기 위해 미리 당부하는 말 아니던가. 애정이 있으니, 아끼고 있으니 할 수 있는 말이다. 아끼지 않았더라면 이용이나 하고 자신들 대신 죽음으로 밀어 넣었을 거다. 이미 가족으로 대우받고 있는 것도 모르고.
벨리타는 헛웃음을 뱉었다. 애초에 라빌과 테일러가 충분히 표현을 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라는 게 우스웠다. 눈치 빠르고, 계산도 빠르면서 가족에 대해서만 알아채지 못하는 것도 웃겼다. 얼마나 혼자 마음고생 하며 끙끙 앓았으면 오죽 그랬을까 싶기도 했다.
워낙에 자격지심이 있고 드러나는 애정을 받지 못한 채 자라 이렇게 되어 버렸는지 모른다. 불쌍한 것. 라빌과 테일러가 내일 찾아오면 슬쩍 언질을 주어야겠다, 다짐했다.
한껏 움츠러들었던 데이비드에게 벨리타가 말을 건넸다. 데이비드는 고개를 처박고 귀만 열었다.
“너는 꼭 이상하게 그런 쪽으로만 눈치가 없더라.”
“무슨, 말씀……이십니까.”
“널 아끼니까, 사랑하니까 그런 말을 한 거잖아. 네가 다치거나 힘들어하는 모습 보고 싶지 않아서. 아들내미 발목 잡고 싶지 않다고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이 멍청아.”
예? 데이비드가 고개를 들었다. 길게 찢어진 눈이 동그랗게 뜨여 멍청해졌다.
멍청이 맞네, 맞아. 벨리타가 혀를 찼다.
벨리타의 대답이 예상하지 못한 답이었는지 데이비드는 혼란스러운 낯을 했다. 벨리타는 옅게 미소 지으며 테이블에 턱을 괴었다.
“어머니가 표정 변화도 없고 무뚝뚝하시잖아. 티를 내는 법도 없고. 그래도 내 눈엔 다 보여. 널 얼마나 아끼고 있는지. 아들로 여기지 않고서야 사랑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못 보지. 아버지도 마찬가지고.”
“…….”
“넌 너무 혼자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이 집구석 사람들은 왜 죄다 티를 안 내는 거야?”
눈치를 살피던 데이비드가 슬쩍 끼어들었다.
“누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상상도 하지 못한 대답이다. 벨리타는 미간을 찌푸리면서까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닌데, 난 다 말하면서 사는데. 나같이 솔직하고 바다에 던져 놓으면 주둥이만 둥둥 뜰 사람이 어디 있다고.
데이비드는 손을 꿈지럭대며 몸을 들썩거렸다.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주위만 배회하던 시선이 벨리타를 곧게 향했다.
“힘든 일이 있어도 티 내는 법 없고, 혼자 몰래 울고 털어내시지 않습니까.”
“……어?”
모를 줄 알았다. 혼자 온전히 감당하고 묵혀 두어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줄 알았다.
벨리타는 표정도 잃은 채 데이비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데이비드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가 혼잣말하듯 말을 이었다.
“솔직히 서운합니다. 황태자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결혼을 하려고 하셨는지……. 그 외의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한테는 말씀도 안 해 주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다 말씀하십니까? 제가 못 미덥습니까?”
말문이 막혔다. 벨리타로서 솔직히 대답하자면, 잊었다. 잊어버려서 말하지 못했다.
데이비드가 벨리타에게 의존하고 기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벨리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서서 해결하려고 드는 것도 안다. 다만 너무 정신이 없어서 잊어버리고 있었을 뿐이다. 서운해할 줄은 몰랐다. 조금만 생각했어도 데이비드가 섭섭해하는 걸 알 수 있었을 텐데.
무심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데이비드에게 무관심과 무심한 태도는 상처가 될 걸 알고 있으면서도.
벨리타는 대놓고 잊었다고 말하기에 눈치가 있었고, 상처를 주지 않을 책임이 있었다.
벨리타는 상냥하게,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데이비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데이비드가 손을 움찔거렸다. 벨리타는 데이비드가 손을 잡을 때까지 그대로 기다렸다.
데이비드가 못내 손을 잡자, 그제야 벨리타가 대답을 했다.
“넌 어리잖아. 불쾌한 거, 불안한 거 보지 않을 의무가 있어, 넌. 난 그걸 보여 주지 않을 의무가 있고.”
이야, 나 너무 잘 둘러댔다. 백 점 만점의 대답이었다. 벨리타는 스스로가 대견해졌다.
뿌듯하고 장하다며 스스로를 다독이는 벨리타를 데이비드는 아니꼽게 바라보고 있었다. 데이비드가 결국 툭, 말을 뱉었다.
“한 살 터울이잖습니까, 우리.”
맞네. 그랬네. 벨리타는 다시 할 말이 없어졌다. 뭐라도 생각해야 한다. 변명해야 한다. 타당하게 논리로 이겨먹을 수 있는 대답이 뭐가 있을까.
벨리타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열심히 머리를 굴린 것에 비해 답변은 가당치 않았다.
“내 눈엔 넌 애야, 애.”
싸늘했다. 눈으로 사람을 얼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벨리타는 쾅, 테이블을 내리쳤다. 맞잡은 데이비드의 손이 크게 떨렸다.
“지금 그게 중요해? 그래서, 얼마나 피웠어. 매일 이렇게 방에서 몰래 했던 거야? 냄새는 어떻게 뺐어.”
“…….”
데이비드도 머릿속으로 핑계와 변명을 필사적으로 찾고 있을 터였다. 그 대답은 벨리타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 것도 아니었고 대답을 듣고 싶어 한 질문도 아니었다.
벨리타가 잡고 있던 손을 떼어냈다. 데이비드의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벨리타의 손을 쫓았다. 벨리타가 데이비드의 손등을 가볍게 내리쳤다.
“가서 다 가져와. 하나도 빼놓지 말고. 내가 찾아서 나오면 한 대씩 맞는다.”
깡패도 아니고 무슨 말을 그렇게 합니까, 라는 군소리는 하면 죽는다. 데이비드는 여상스럽게 뱉었던 시비들에 익숙해진 탓에 온 힘을 다해 참아야만 했다.
벨리타가 빨리 가져오라며 소리치자 데이비드가 황급히 일어나 서랍을 뒤졌다. 테이블에 퀘체가 한 덩어리 얹어졌다. 벨리타는 눈을 가늘게 떴다. 밑장빼기 하는 건가?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나?
다리를 꼬고 고압적인 자세로 덜렁 한 덩어리 놓인 종이봉투를 내려다봤다. 데이비드가 안절부절못하며 눈치를 살핀다. 반응을 보면 분명 이게 끝인 것 같았다. 정말 손만 대본 거였구나. 벨리타가 손짓하자 데이비드가 잔뜩 긴장해서 다가왔다.
아직 이곳은 종이에 말린 담배가 개발이 되지 않아 파이프로 피우고 있었다. 그 탓에 바짝 말린 잎들이 봉투에서 우수수 쏟아졌다.
기껏 잠재웠는데 왼손에 잠든 사랑의 매가 울부짖고 있었다. 아니, 이건 맞아야지. 최소한 등짝 정도는 맞아야 한다.
정말 너무 힘이 들고 고단해서 나쁜 짓에 손을 댄 거라고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나쁜 건 나쁜 거니까.
벨리타는 벌떡 일어나 데이비드의 등짝을 후려쳤다. 아악, 데이비드의 상체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한 대로 끝나지 않았다. 벨리타는 데이비드의 등을 내리치면서 소리쳤다.
“네가, 미쳤지, 정신이, 있어, 없어! 저게, 다, 뭐야!”
“악, 아프, 아픕, 아악!”
“아주, 폐가 썩어라, 썩어! 일찍 죽으려고, 작정을, 했어, 아주! 부모 가슴에, 대못을 박아도, 유분수지!”
데이비드의 단말마가 울려 퍼졌다. 살려 달라는 비명과 매타작 소리가 연기와 함께 방 안에 퍼져나갔다.
소리에 깜짝 놀란 하녀가 문을 빼꼼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가 테이블에 놓인 퀘체와 얻어터지는 데이비드를 보고 스르르, 문을 닫았다. 저건 혼날 만했다. 아가씨, 더 때려 주세요.
한참을 두들겨 맞은 데이비드가 눈물을 삼켰다. 등짝이 얼얼해서 화끈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