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별 같기도, 달 같기도 했다. 오웬은 손을 끌어 벨리타를 당기지도, 손을 풀어내지도 않았다.
가만히, 자리에 멀거니 서서 벨리타를 바라보았다. 벨리타도 아무 말 없이 오웬을 마주했다. 손이 차갑게 식어간다.
“무슨 일 있어?”
천천히 벨리타를 훑어본 오웬이 걱정이 가득 담긴 낯으로 물어왔다. 눈치가 귀신같기도 하지. 오웬의 앞에서는 숨기려야 숨길 수가 없다. 벨리타가 미소 짓는다.
“왜 그렇게 생각해. 아무 일도 없었는데.”
“너 티 다 나는데 뭘 숨겨. 내가 너한테 얼마나 관심이 많은데, 모를까 봐?”
그러게. 숨길 수가 없네. 벨리타는 작게 중얼거렸다. 바람에 휘날려 흩어지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오웬은 정말로, 거짓 없이 벨리타에게 관심이 많았기에.
“그러니까 숨기지 말고 말해. 여기 우리 둘뿐이잖아.”
술 한잔 기울이며 넌지시 물어볼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벨리타는 자기가 언제 그랬냐며 발뺌하고 넘어가려 들 것이다. 이는 벨리타의 곁에 머무르면서 관찰하고 분석한 결과였다. 그러니 틀릴 리 없다. 그렇기에 당장 물어봐야 했다. 벨리타를 걱정하지 않는 선택지란 오웬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맞잡은 손에 약한 힘이 들어간다. 추위에 떠는 건지, 감정의 탓인지 벨리타의 손이 잘게 떨려온다. 오웬이 성큼, 한 발자국 걸어 벨리타에게 다가섰다. 벨리타의 고개가 위로 꺾인다. 머리카락에 파묻혔던 얼굴이 드러났다.
“왜 울려고 그래, 응?”
단단히 손을 잡았다. 차가워진 손으로, 얼어 있는 볼을 감싼다. 벨리타의 봄과 여름이 섞인 눈이 느릿하게 깜빡였다.
“안 울어. 내가 왜 울어?”
울 것 같은 얼굴을 하면서 그런 말을 하면, 누가 믿을까. 오웬은 엄지로 벨리타의 눈가를 쓸었다. 눈언저리만이 열에 올라 따뜻했다. 오웬은 벨리타의 이마에 제 이마를 기대었다. 어르고 달래는, 상냥함이 어린 말투로 속삭인다.
“너 연기 진짜 못 해. 말해 봐, 벨리타. 응? 괜찮으니까.”
다정하게 대해 주면 녹아 버리고 만다. 벨리타는 얼어붙기 시작한 몸과 반대로,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몇 년간 울 일이 없었는데, 이곳에 오고 나서 울 일만 생긴다.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있으니 약해지고 마는 걸까.
“난 어차피 돌아가야 하는데.”
“응.”
“애들이 나를 너무 따르는 게 겁이 나.”
그랬어? 차분한 대답과 함께 오웬의 손가락이 벨리타의 눈가에서 부드럽게 머리카락으로 넘어가 뒷목을 감쌌다. 천천히, 언제라도 쳐내고 내뺄 수 있게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벨리타의 고개가 힘없이 오웬의 어깨에 파묻혔다. 틈을 비집고 벨리타의 웅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챙겨 준다고 해도, 결국 난 애들에게 상처를 주는 게 아닌가 싶고.”
“그랬구나.”
“언제가 됐든 난 떠나고 애들도, 너도 여기 남잖아. 너는 괜찮겠지만, 애들은 기댈 구석이 나뿐일 텐데. 별 볼 일 없는 나를 저렇게나 좋아하는데. 멀어지려고 해도 불쌍하고 미안해서 그럴 수도 없어. 어떻게 해도 결국 난 아이들에게 상처만 주고 가는 건 아닐까 무서워.”
살벌한 벨리타의 주변을 피해 달아난 터라 벨리타가 어떤 상태였는지 신경 쓰지 못했다.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걸까. 자신이 곁에 있어 주었더라면 진작 달래 주어 도왔을 텐데.
오웬은 벨리타의 둥그런 뒤통수를 일정하게 쓰다듬었다. 차분하고 덤덤한, 애정 어린 손길이었다.
오웬의 손이 벨리타의 머리 위로 올랐다. 고개를 숙여 제 손등에 입술을 문지른다. 벨리타는 서러워지는 감정에 휩쓸려 울음을 참는 게 고작이었다.
오웬의 나긋하고 여유로운 낮은 목소리가 조곤조곤 속살거렸다.
“네 덕분에 황태자도, 공녀도, 남작도 변하고 있어. 좋은 변화야. 네가 아니면 해 줄 수 없는 거고.”
아래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오웬은 벨리타의 머리를 감싸 안아 제 품 안에 가두었다.
“어느 누가 황태자를, 공녀를, 뱀 같은 상단주를 연말에 불러 놓고 선물을 주고, 밥까지 챙겨 먹여 보내겠어.”
“…….”
“넌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야. 벨리타. 너무 걱정하지 마. 널 원망할 사람은 없어.”
품 안에서 꿈지럭댄다. 오웬은 모르는 척했다. 벨리타가 무얼 걱정하고 무엇에 괴로워하는지 잘 안다. 다정해서, 마음 씀씀이가 넓으니 불가피하게 겪는 고생이다.
오웬은 벨리타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손가락에 가늘게 얽힌다.
“다들 널 만나서 행복해하잖아. 그러면 됐지. 그리고 하나 단단히 잘못 알고 있는 게 있는데.”
맞잡은 손을 제 얼굴 언저리까지 들었다. 벌겋게 얼은 벨리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차갑고 부드럽다. 벨리타의 어깨가 들썩인다. 오웬은 벨리타의 손등에 입술을 맞댄 채로 말을 이었다. 벨리타가 손을 꿈지럭댄다.
“나도 너 없으면 안 돼. 괜찮을 리 없잖아. 나만 빼고 편애하지 마.”
고백 같지도 않은 고백이다. 오웬은 인지하지 못했다. 벨리타는 낯간지러운 현 상황에 주춤, 몸을 뒤로 물렸다. 어깨에 파묻었던 얼굴이 드러난다.
“…….”
“…….”
“……풉!”
오웬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영문도 모른 채 웃음거리가 된 벨리타가 어리둥절하게 미간을 구겼다. 오웬이 더 크게 웃는다. 배까지 잡아가며 웃기에 벨리타는 왜 웃느냐며 오웬의 어깨를 투닥투닥, 내리쳤다. 오웬이 아프다며 상체를 비틀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벨리타는 억울했고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다정하게 달래 놓고는 얼굴 보고 웃는 건 어느 나라, 어느 세계 법이냐.
한바탕 웃은 오웬이 저릿한 광대를 문지른 후, 옷소매를 들이밀었다. 벨리타의 코 밑을 문지른다.
“안 운다더니, 코로 울었네.”
벨리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울음을 참는다고 참았는데 콧물이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오웬의 옷을 확인해 볼 겨를도 없이 벨리타가 오웬의 손을 치워내고 코를 문질렀다. 이미 콧물은 오웬의 옷소매가 훔쳐 간 뒤였다.
벨리타는 붉어진 얼굴을 가리지도 못하고 부끄러움에 오웬의 가슴께를 콩콩, 두드렸다.
“왜 웃어! 사람이 심각한데 웃겨!?”
“아학, 또 웃기지 마. 나 배 아프단 말이야.”
“웃지 마!”
참지 못하고 또 웃음이 터진 오웬이 벨리타를 껴안았다. 속절없이 갇힌 벨리타가 열심히 버둥거렸다. 웃음기 가득해 갈라진 목소리가 벨리타의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귀여워서 그러지.”
더욱 빨개진다. 홍당무들 틈에 끼어도 벨리타를 찾지 못할 정도였다. 벨리타가 오웬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격한 고통에 못 이겨 오웬이 쓰러졌다. 주저앉은 오웬을 내려다보며, 벨리타가 씨근덕댔다.
“이게 아주 못하는 말이 없어! 빨리 들어가기나 해! 선물 주고 술이나 먹게!”
“어으윽……. 야만적인 사람.”
“데이비드한테 이상한 말 배우지 마!”
앙칼진 말과 함께 벨리타가 홱, 돌아서서 앞장서 걷는다. 아직도 웃음이 가득한 오웬이 비척거리며 일어나 옆구리를 붙들고 벨리타를 쫓았다.
창문 너머로 기다리고 있던 하녀가 문을 열어 반겼다. 밖이 몹시 춥다며 따뜻한 우유를 가져왔다.
벨리타는 하녀에게 12시에 맞추어 제 방에 술상을 준비해두라고 지시했다. 오웬에게는 12시에 맞추어 제 방으로 오라는 말을 남기고 엘라의 후배인 하녀를 불렀다.
오웬이 흥얼거리며 떠나고 앳돼 보이는 아이가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최대한 빨리 선물을 보내고 싶은데, 웃돈을 얹어 주고라도 빠르게 보내 줘.”
“아, 예, 예! 알겠어요!”
오웬을 두고 엉망이 되어 버린 종이봉투를 찾았다. 봉투 안에서 네 개의 선물을 꺼내 주소를 불러주며 건넸다.
하녀가 앗, 아앗, 소리를 내며 못 외웠으니 다시 이야기해 달라며 울상을 짓기에 벨리타는 친히 한 번 더 불러 주었다.
하녀가 허리까지 숙여 인사하고는 사라졌다. 선물상자에 제 이름을 적어 두었으니 알아볼 터다.
벨리타는 남은 선물들을 확인했다. 오웬과 가족들의 몫이다. 데이비드의 것을 따로 꺼내 쥐고 다른 하녀에게 제 방에 가져다 놓으라고 이르니 냉큼 받아 들고 사라진다. 시켜 먹으니까 너무 편하다. 최고다.
벨리타는 현실에 돌아가도 이 편한 맛은 잊지 못할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다른 건 하나도 안 부러워도 편한 것만큼은 부럽다.
선물을 들고 데이비드의 방을 찾았다. 노크 없이 문을 열 뻔했는데 뇌에 힘을 주고 참았다. 아이들은 문 벌컥벌컥 열면 화내니까.
데이비드가 직접 문을 열어 벨리타를 맞이했다. 다급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머리도 흐트러진 채였고 옷매무새도 단정하지 못했다. 씻고 나온 지 조금 되어 보였는데.
데이비드의 앞에 서니 퀴퀴한 냄새가 났다. 안절부절못하는 데이비드에게 얼굴을 들이밀어 킁, 냄새를 맡았다. 벨리타는 이윽고 낯설지 않은 향을 감지했다. 인상을 팍 찌푸리고 데이비드의 팔을 붙잡아 안으로 들어섰다. 쿵, 문을 닫는다.
“누, 누님…….”
당황하는 데이비드의 양팔을 붙들었다. 데이비드의 낯이 창백해졌다. 벨리타는 짐짓 엄한 태도를 취하고 데이비드의 방을 둘러봤다. 무얼 했는지 물을 필요도 없었다.
“너 뭐야?”
“누님,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 담배 피웠어?!”
“네?”
아차. 벨리타는 간과했다. 현실에서는 담배라고 부르지만 이곳에서는, 다른 명칭을 쓴다는 걸. 퀘체였다.
데이비드가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듯 겁을 먹으면서도 의아해하고 있었다. 벨리타는 속이 탔다. 데이비드의 멱살을 틀어쥐고 까치발을 들어 얼굴을 들이밀었다. 데이비드가 난처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피해 봤자 냄새는 난다. 방 안에서도 냄새가 짙다. 벨리타가 데이비드의 방을 찾지 않으니 안심하고 있었을 터였다. 데이비드는 잔뜩 긴장해 꼬리를 말고 있었다.
“너 퀘체 피웠지.”
“…….”
“말 안 해? 어디서! 발랑 까져가지고, 어?!”
항의하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이 말을 한다면 분명 뒈지게 얻어터진다. 데이비드는 입을 꾹 다물었다.
벨리타는 화가 잔뜩 났다. 어디서 못된 걸 배워 와 가지고. 몸에 좋은 거나 하지. 전에 보니 술도 몰래 마시는 것 같던데.
대체 어디서 이런 못된 것만 배워 와. 보통 친구들에게 배워 오던데. 벨리타의 가족은 아니지만, 본래의 벨리타 가족 아니던가. 누나로서 충분히 타일러야 한다. 지금의 탈선을 눈감아 주면 나중에는 어떤 사고를 칠지 모른다.
벨리타는 데이비드를 의자에 앉혔다. 좌불안석인지라 데이비드는 벨리타의 눈치를 살피며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벨리타는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한숨이 다 나온다.
“……언제부터 했어. 누가 가르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