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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74화 (74/150)
  • 74화.

    벨리타가 무성의하게 봉투 속에서 상자 하나를 꺼냈다. 푸른색의 작은 상자. 선물의 주인공은 누구인지, 아이들의 눈이 빠르게 돌아간다.

    “자, 잭슨이.”

    “……조만간 작위를 하사하마.”

    “뭔 헛소리야. 받기나 해.”

    벨리타의 옆에 찰싹 붙어 있던 잭슨이 얼떨떨하게 선물을 받아 들었다. 오롯이 자신만을 위해 받은 선물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자신을 떠올리고 세심하게 따져 골랐을 게 뻔해서, 감정이 벅차오른다.

    잭슨이 벨리타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선물을 자신에게만 주었다면 더 좋았을 테지만 선물 자체가 너무도 기뻐서 질투는 오래가지 못했다. 으응, 잭슨의 입에서 낮게 앓는 소리가 났다.

    “……풀어 봐도 되나?”

    “안 돼. 정신없어. 집 가서 봐.”

    궁금한데. 기분이 몹시 좋아진 잭슨이 벨리타의 볼과 머리에 쪽쪽, 입을 맞춘다. 지켜보던 이들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참다못한 소르니가 벨리타의 팔을 잡아 자신의 쪽으로 힘껏 당겼다. 벨리타의 상체가 속절없이 기울어진다. 포옥, 소르니의 품에 뒤통수가 파묻혔다. 소르니가 앙칼지게 소리친다.

    “나도 뽀뽀할 줄 알거든요? 누군 못해서 안 하는 줄 아나!”

    “하기만 해. 입을 찢어 버릴 테니.”

    “영애, 저도 발등에 살짝만…….”

    정신이 없다. 와중에 조슈아가 끼어들어 헛소리까지 더했다.

    난 여기서 나가야겠어. 데이비드가 정신없는 틈을 타 슬쩍 일어섰다. 오웬도 따라 일어선다.

    소르니가 벨리타의 턱을 붙들고 뺨에 무차별 뽀뽀 폭격을 날렸다. 그 덕에 벨리타는 오웬과 데이비드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무리 중 유일한 이성들이 사라졌다.

    잭슨과 소르니의 뽀뽀 세례를 받던 벨리타가 참다못해 둘을 뿌리쳐 조슈아의 옆에 앉았다. 조슈아가 보이지 않게 주먹을 꽉 쥐었다. 종이봉투는 이미 엉망으로 구겨져 원래의 상태를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벨리타는 봉투였던 것을 한껏 끌어안아 소리쳤다.

    “너희 계속 그럴 거면 가! 아주 그냥 꼴도 보기 싫어, 아주!”

    강경한 대응에 둘은 주저 없이 잘못을 시인했다. 몰골이 엉망이 된 채 씨근덕거리던 벨리타는 신경질적으로 봉투를 뒤져 초록색의 선물 상자를 꺼냈다. 차마 던지지는 못해 손만 뻗는다.

    소르니가 환하게 웃으며 선물을 받았다. 벨리타의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으니 제 선물이 무엇인지 잘 안다. 소르니는 제 품을 뒤져 작은 상자를 꺼냈다.

    같은 색, 같은 모양의 상자였다. 벨리타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소르니가 말갛게 웃으며 품에서 꺼낸 상자를 벨리타에게 건넸다. 설마. 벨리타는 받은 상자를 내려다봤다. 소르니의 의기양양한 대답이 돌아왔다.

    “나도 샀어, 선물. 어쩌다 보니 똑같은 귀걸이지만. 우리 같은 귀걸이 하겠네?”

    기대됐다. 같이 맞춘 것만 같은 귀걸이. 돈독하고 특별한 사이로 보이는! 같은 귀걸이를 하고 만나 오순도순 시간을 보내는 상상을 했다. 게다가 다른 이들은 받아먹기만 할 줄 알지, 미리 준비하는 센스도 없다.

    소르니는 예쁨을 독차지할 생각에 잔뜩 들떠 있었다. 조슈아와 잭슨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는지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선물을 받을 줄 알았다면 자신들도 미리 준비했을 거라며 핑계를 댔지만 핑계일 뿐이다. 소르니는 유일하게 벨리타를 챙긴 착한 아이였다.

    벨리타가 상자를 물끄러미 보았다가 소르니에게 시선을 돌렸다.

    “나 귀 안 뚫었는데.”

    어?

    소르니가 멍청하게 굳었다. 잭슨과 조슈아가 대놓고 비웃는다. 피식, 조슈아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명백한 비웃음이어서, 소르니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이익, 작게 앓는 소리를 내더니 주먹으로 소파를 거칠게 내리쳤다.

    바들바들, 수치심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소르니의 반응을 본 잭슨이 꼴사납다며 비아냥댔다. 신나게도 놀려댄다. 싸움이 시작될 기미가 보이면 말릴 생각이었던 벨리타에게 소르니가 소리쳤다.

    “까짓것 귀 뚫어버리면 그만이지! 벨리타, 귀 뚫자!”

    “뭐?”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인가. 현실에서는 이미 뚫은 귀였지만 굳이 또 뚫고 싶지는 않았다. 남의 몸이니 조심스러운 탓이다. 몸에 손을 대려면 몸 주인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벨리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절대 싫다며 상체를 뒤로 젖혔다. 귀를 뚫으라는 소르니와 결코 뚫지 않겠다는 벨리타가 대립했다.

    불필요한 말다툼에 관심이 쥐뿔도 없는 잭슨이 벨리타를 제 무릎에 앉힐 타이밍만 재고 있었다. 조슈아가 가만 바라보다 방긋 웃으며 소르니와 벨리타에게 제의했다. 시선이 조슈아에게 쏠렸다.

    “정 그러시면, 제가 아는 세공사에게 맡겨 드릴게요. 귀걸이를 목걸이나 반지, 다른 장신구로 만들면 되지 않겠어요?”

    벨리타의 예쁨도 받고, 소르니 공녀의 호의도 얻으려는 조슈아의 속셈이었다. 빠른 계산을 마친 덕에 벨리타는 너무 좋은 생각이라며 말갛게 웃었다.

    조슈아는 충동에 휩싸였다. 발닦개가 되어도 되냐고 묻고 싶은 충동이었다. 다행히도 조슈아는 감정보다 이성이 우선이어서 헛소리는 참아냈다.

    같이 귀걸이를 하고 싶었던 소르니도 입을 다물었다. 벨리타가 저리 기뻐하는데 부득불 귀에 구멍을 내라는 요구를 할 수 없었던 탓이다. 귀걸이보단 목걸이나 팔찌가 더 오래 착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소르니는 자기 위안을 하며 조슈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벨리타가 조슈아에게 선물 상자를 건넸다. 잘 부탁한다며, 예쁘게 해달라고.

    반드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신구를 만들어 선물하겠다는 각오를 다진 조슈아는 벨리타의 손에 닿았던 선물상자를 소중히 쥐어 안주머니에 모셨다.

    소르니가 조슈아를 보고 소름 끼친다며 팔뚝을 문지른다. 그러건 말건 잭슨은 냉큼 벨리타에게 다가가 번쩍 들어 올리고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소르니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여기에 다 이상한 놈들 밖에 없어~! 벨리타, 이리 오렴! 저런 변태들 말고 나한테 와.”

    벨리타라고 가고 싶지 않을 리 있나. 변태와 몸만 큰 어린아이 사이에 있느니 뽀뽀를 퍼부은 소르니가 나았다.

    그럼에도 소르니 옆으로 가지 못한 이유는 벨리타가 몸을 들썩거릴 때마다 흉흉하게 얼굴을 굳히며 허리를 끌어안고 놔주지 않는 잭슨 때문이었다. 벨리타는 체념하고 잭슨의 가슴께에 볼을 기댔다. 잭슨이 눈에 띄게 기뻐했다.

    이 녀석들 저녁만 먹이고 쫓아내야지. 벨리타는 굳게 다짐하며 나름 평화롭고 단란한 시간을 보냈다.

    *

    아이들 틈에 둘러싸여 저녁도 만들어 주지 못했던 벨리타는 식당에 도란도란 앉은 아이들에게 김치를 먹였다.

    조슈아는 이미 익숙해진 덕에 고기에 얹어 잘도 먹었고 소르니는 이걸 꼭 먹어야 하느냐며 반찬 투정을 했다. 잭슨은 김치 한 입, 물 한 컵을 번갈아 먹으며 억지로 삼켰다.

    잘 먹는 조슈아에게 칭찬하니 아이들이 또 투덕거리기 시작하여 밥상머리 앞에서 싸우면 다 뒈지는 거다, 라며 선포한 덕에 조용히 넘어갈 수 있었다.

    다짐한 대로 저녁만 먹이고 아이들을 쫓아냈다. 더 오래 있고 싶다며 매달리는 아이들을 뿌리친 벨리타가 억지로 마차에 태웠다. 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기에 사이좋게 한 대씩 등짝을 때려주니 얌전히 올라타더라.

    “태자궁에 오지 않을 때, 내가 찾아와도 되나?”

    “안 돼.”

    미련이 함빡 담긴 잭슨이 마차 창문에 얼굴을 내밀고 울상을 지었다. 벨리타는 매몰차게 거절했다.

    잭슨의 투정이 끝나자마자 소르니가 끼어들었다. 마차 창문틀에 손을 얹은 소르니가 살갑게 웃는다.

    “조만간 또 올게.”

    “넌 좀 적당히 와.”

    얼마 오지 않았다며 억울해하는 소르니를 가볍게 무시했다. 소르니가 서운하다며 부채 끝으로 창문을 두드린다.

    잭슨과 소르니의 말이 끝나길 기다렸던 조슈아가 비로소 말을 꺼냈다. 곱게 묶은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어깨 너머로 넘겼다. 곱다.

    “영애가 꼭 만족할만한 장신구로 만들어 올게요.”

    “예쁘게 해 줘.”

    “당연한 말씀이세요.”

    더 지체하면 마차에 내릴 기세여서, 벨리타는 마부들에게 빨리 출발하라며 소리쳤다. 덜그럭, 말이 움직이며 마차가 굴러간다. 벨리타는 마차가 사라질 때까지 자리에 서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문 너머로 벨리타가 들어오길 기다리던 오웬이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벨리타를 데리러 나왔다.

    코와 볼이 빨갛게 언 벨리타가 하염없이 길목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웬으로서는 알 수 없는 행동이었고 표정이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에 날려 아지랑이처럼 부스러질 것 같은 분위기에 오웬은 황급히 벨리타의 어깨를 붙잡았다.

    벨리타가 오웬을 돌아보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아무 일도 없는 태도로 그렇게.

    “추운데 왜 나왔어. 안에 있지.”

    “네가 기다려도 안 들어오니까.”

    “부르면 됐잖아.”

    그럴 걸 그랬나. 깊지 않은 사이처럼, 가깝지 않은 관계처럼 따뜻한 안에서 이름만 부를 걸 그랬나.

    오웬은 대답 없이 벨리타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문 쪽으로 끌었다. 벨리타도 별 저항 없이 따랐다. 시린 바람이 목덜미를 훑고, 볼을 스친다.

    벨리타의 손이 어깨에 걸쳐진 오웬의 손을 잡았다. 받기만 했지 해 준 적 없는 스킨십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행동 때문에 놀랐지만 티를 내면 손을 떼어낼 것 같았기에, 말없이 벨리타의 손을 쥐었다. 이미 도착하고도 남았을 거리인데, 둘의 걸음은 느렸다.

    “네 선물도 샀어.”

    “알아. 나도 옆에 있었잖아. 예쁜 걸로 골랐더라?”

    “아, 그랬지. 나 12시 땡 하면, 술 먹고 싶어.”

    벌써부터 술 마실 생각에 행복해 보이는 벨리타를 보니 웃음이 났다. 벨리타의 세계에서는 술꾼이었나 보다. 그간 어떻게 참았는지. 이따금 맥주를 조금 마시는 걸 몇 번 보았으니 참지는 않았나.

    오웬이 벨리타의 머리에 볼을 기대었다. 벨리타는 무겁다면서 치워내지는 않았다. 문까지 서른 걸음도 남지 않았다. 걸음이 더욱 느려졌다. 오웬이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내가 술친구 해 줄게. 혼자 마시면 외롭잖아.”

    “좋지.”

    오웬이 고개를 숙였다. 얼굴이 가까워졌다. 능글맞은 목소리로,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

    “나밖에 없지?”

    “오냐, 너밖에 없다.”

    웬일로 순순히 대답해 주지? 평소라면 허튼소리 말라며 어깨에 손바닥이 내리꽂혔을 텐데.

    상상과 다른 반응이 거슬린다. 묘한 기분이 들어 오웬은 벨리타를 빤히 바라보았다. 벨리타가 뭘 쳐다보냐며 오웬의 뺨을 밀어냈다. 지금은 보통의 벨리타와 똑같았지만 미묘하게 축 처진 느낌도 들었다. 오웬이 걸음을 멈추었다.

    이를 모르는 벨리타가 걸음을 이어가니 어깨에 두른 팔이 풀렸다. 맞잡은 손 덕분에 벨리타가 치마폭을 넓게 퍼트리며 몸을 돌렸다. 춤을 추는 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손을 붙잡은 채 마주 본다.

    어두운 저녁, 오웬의 호박색 눈동자가 유일하게 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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