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예. 찾으시는 게 있으신가요?”
“그래, 찾는 게 있지. 이 상단에서 제작한 주술서가 있다고 들었다.”
깊이 눌러쓴 후드 너머로 보라색의 눈이 찬란히도 반짝거린다. 조슈아는 잭슨이 주술서를 찾는 이유를 짐작해 보려 애썼다.
주술서. 마정석만 있다면 마법사가 아닌 사람들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최근에 독점 판매를 시작한 주술서는 시장에 내놓자마자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이는 조슈아가 생각해 낸 사업 아이템으로, 주술서를 완성시키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마법에는 문외한인 덕분에 떠올릴 수 있던 획기적인 발명품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주술서를 성공시키기 위해 수도의 마탑주를 찾았지만 응답해 주지 않았었다. 매번 마탑주의 저택에서 쫓겨나야 했지만 그 덕분에 흥미로운 일에는 환장하는 마법사인 오웬이 낚였다.
마법사들은 속세에 허술하다. 조슈아는 마법사들의 특징을 이용하여 오웬의 등을 처먹으려고 했지만 오웬은 빌어먹게도 계약을 잘했다. 덕분에 주술서의 이익을 30%나 뜯겨야만 했다. 그때만 생각해도 피눈물이 났다.
술식은 변형도 불가능했다. 오웬이 일부러 한 짓거리다. 보존시켜 주는 주술서, 보온을 시켜주는 주술서, 등의 생활에 유용한 열 가지만 존재했다. 오웬이 새로운 술식을 만들어 주지 않으면 영원히 열 가지의 주술서만 존재할 것이다.
단 다섯 번만 사용 가능한 주술서는 양피지에 마법사들이 직접 주술을 적어야만 했기 때문에 값이 많이 나갔다. 따라서 주문 제작만 가능하다.
황태자가 생활에 유용한 열 가지의 주술서 중 무엇이 필요하단 말인가. 궁정 마법사도 있으면서!
잭슨이 주술서를 찾는 이유를 도저히 짐작할 수 없던 조슈아는 가볍게 떠보는 듯 질문했다.
“전하께 소속된 마법사들도 있지 않으신가요?”
“궁금한 게 많은가 보군?”
대답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는 뜻이었다. 묻지 말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조슈아는 일그러지는 미간을 겨우 폈다. 그래, 황태자인데 내가 참아야지.
조슈아는 감정을 숨기고 능숙하게 대하는 것에는 도가 튼 사람이었다. 대기하고 있는 종업원에게 손짓을 하자 종업원이 조르르 다가왔다.
“제가 직접 보여드리며 설명해드리고자 하는데, 괜찮으신가요?”
“황태자의 특권인가?”
“그럼요.”
옆에 선 종업원에게 견본으로 제작된 주술서들을 종류별로 전부 가져오라고 지시한 조슈아가 잭슨을 위층으로 안내했다. 잭슨이 후드를 다시금 당겨 깊이 눌러썼다. 검은 머리카락에 가려진 보랏빛의 눈이 벨리타를 향해 은은히 번들거렸다가 수그러든다.
쟤는 왜 저렇게 쳐다볼까. 벨리타는 계단을 올라 사라지는 잭슨을 의아하게 바라봤다. 그래도 가장 골치 아픈 녀석이 사라졌으니 벨리타는 마음 놓고 진열품들을 훑어보았다.
종업원이 옆을 알짱거리며 설명을 해주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소르니가 막고 입을 열 틈을 주지 않았다. 종업원은 울고 싶어졌다.
“이거 예쁘다.”
주황빛이 맴도는 보석이 작게 박힌 단출한 귀걸이였다. 화려하고 예쁜 소르니가 착용하면 참 예쁠 것 같았다. 소르니의 뒤에서 울상을 짓던 종업원에게 귀걸이를 건넸다. 종업원이 살갑게 웃으며 귀걸이를 받아 들고 설명을 해 드릴까요, 하고 물었으나 제 것도 아닌데 굳이 설명을 듣고 싶지는 않았던 벨리타가 칼같이 거절했다.
소르니가 포장을 하러 터덜터덜 돌아가는 종업원을 붙잡았다. 무어라 떠드는 모양이었지만 벨리타는 신경 쓰지 않고 마저 아이들의 선물을 골랐다.
화려한 커프스, 깔끔한 색의 크라바트, 등 선물을 받을 사람이 죄 사내놈들뿐이라 데이비드를 옆에 끼고 하나하나 따져가며 골라야 했다. 라빌과 테일러의 선물도 고른 벨리타가 계산을 하러 간 사이, 잭슨과 조슈아가 계단에서 내려왔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데이비드와 오웬은 서로를 곁눈질로 보았다. 이내 둘은 허망하게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인상을 구기던 조슈아가 사람들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일행에게 다가갔다.
“자리를 비워서 죄송해요. 앉아서 기다리시겠어요?”
“아닙니다. 누님도 계산하러 가셨으니 곧 나갈 겁니다.”
“뭐라고요?”
돈을 받지 않고 모조리 선물로 주려고 했던 조슈아가 깜짝 놀라 벨리타를 찾으러 떠났다. 돈을 내려는 중인 벨리타와 옥신각신, 대화가 오고 가더니 벨리타가 조슈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자 조슈아는 사르르 녹아 벨리타에게 져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반값으로 줘 버리는 걸로 결정이 나 버렸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건 반칙이잖아요.
조슈아가 눈썹을 늘어트리며 서운한 체를 해 보았지만 벨리타는 호탕하게 웃을 뿐이었다. 잭슨이 갑작스레 벨리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조슈아, 소르니, 데이비드의 신경질적인 시선이 쏠린다.
로브에 둘러싸여 졸지에 얼굴만 불쑥 튀어나온 벨리타가 미간을 찌푸렸다. 눈앞에서 목도한 조슈아는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영애 귀엽다. 영애 머리에 얼굴이나 비비적거리는 황태자만 아니었으면 정말 귀여워서 발등이라도 핥았을 텐데.
조슈아의 생각을 읽지 못한 벨리타가 잭슨의 팔을 붙들어 떼어내려고 발버둥 쳤다. 잭슨은 집요히 벨리타의 머리에 볼을 기대어 문지른다.
벨리타가 잭슨의 볼을 뜯듯이 잡아당겼다. 악, 비명이 작게 터졌다.
“놔라, 밖에서 이러지 마.”
“나도 머리 쓰다듬어 줘라.”
“네가 뭐가 예쁘다고.”
“예쁘지 않나?”
한껏 순하고 예쁜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들이민다. 예쁘기는 한데. 벨리타는 잭슨의 안면을 손바닥으로 힘껏 눌렀다. 잭슨이 억, 소리를 내며 물러났다.
죽일 듯이 노려보며 미소 짓는 조슈아에게 잭슨이 한쪽 입술을 말아 올려 비웃어 준다. 조슈아는 뒷목을 잡을 뻔했다. 소르니가 벨리타를 낚아채 팔짱을 꼈다.
“살 거 다 샀지? 가자.”
때마침 포장을 마친 선물들이 내밀어졌다. 데이비드가 다가와 작은 선물 상자들을 한 아름 든다. 벨리타는 됐다며 종업원에게 봉투를 요구했으나 봉투가 있을 리 없었다. 선물들이 작아 봉투에 넣으면 딱인데.
잠시 고민에 빠졌던 벨리타는 종업원에게 끈과 튼튼한 종이를 부탁했다. 그리고 만들었다. 직접. 종이봉투를.
척척 빠르고 간결한 손놀림으로 종이를 접어 끈을 매달았다. 작은 상자들이 알맞게 들어간다.
데이비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다 하다 남의 상단에서 피붙이의 종이접기 쇼를 구경해야 하는 자신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창피해 죽을 것 같았다.
벨리타가 하면 뭐든 좋은 효녀, 효자들은 손뼉을 치며 벨리타의 손재주를 찬양했다.
진짜 창피해서 같이 다닐 수가 없다. 지나가는 사람 잡고 물어봐도 창피하다는 대답이 돌아올 거다.
오웬이 입을 가리고 소리 죽여 웃었다. 어깨가 바들바들 떨린다. 우습습니까. 저는 죽을 것 같습니다.
짐을 들어주겠다며 나선 이들을 거절한 벨리타가 다음 행선지를 고민했다. 소르니가 무르펜에 있는 유흥가를 줄줄이 대었지만 거절당했다.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고뭉치들을 데리고 가면 분명 박살이 날 게 뻔했으니까. 쉽게 정해지지 못하는 행선지 때문에 잭슨이 태자궁으로 가자고 했다가 벨리타에게 쌍욕을 들어 먹었다. 데이비드가 툴툴대며 의견을 제시했다.
“목적 없이 돌아다녀도 좋지 않겠습니까. 길거리 음식들 주워 먹고 좋아하셨잖습니까.”
“귀여워.”
저도 모르게 튀어 나간 말에 조슈아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길거리 음식들을 먹으며 행복해하는 벨리타를 상상했더니 그만.
잭슨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오웬이 등을 돌려 어깨를 들썩거렸고, 벨리타는 듣고 씹었다. 벨리타에게 조슈아는 가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는 변태 같은 아이로 치부된 지 오래였다.
데이비드의 의견이 수락되어 상단을 벗어나 정처 없이 그저 걸었다.
노점들이 즐비한 길목은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소르니는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이따금씩 평민들과 부딪히는 것이 기분 나쁜 듯했다. 벨리타의 팔을 힘껏 끌어당기며 자신은 걷고 싶지도 않고 사람 많은 곳은 질색이라는 둥의 불만을 투덜거렸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딸과 함께 나왔을 때 칭얼거리던 것과 비슷했다.
살 거 다 샀으니 이제 돌아가자, 더 둘러봐도 다 똑같다, 이제 지쳤다. 투덜거리는 것도 똑같다. 아이들은 다 똑같은지. 딸과 함께 장을 보는 게 좋았던 건데. 싸고 더 좋은 걸 사 주고 먹여 주고 싶어서 그랬던 거지만 딸은 알 리 없겠지. 굳이 알려 주고 싶은 마음도 없다. 나이 좀 먹고 철이 드니, 같이 다녀 주는 날이 늘었으니까. 그걸로 만족한다.
벨리타는 고개를 뒤로 돌려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그새 흥미가 떨어져 심드렁한 잭슨과 무르펜에 직장이 있는 조슈아, 오웬과 데이비드를 살폈다. 즐거운 건 자신뿐인가 보다. 벨리타는 흘러내린 소르니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며 속삭였다.
“그렇게 싫어요? 돌아갈까?”
소르니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재밌자고 불렀는데 즐기지 못하니 내심 섭섭한 마음은 어쩔 수 없나 보다. 팔에 끼워진 소르니의 팔을 당겼다. 소르니가 얌전히 벨리타의 옆에 찰싹 붙는다. 선물도 샀고, 돌아가서 맛있는 거나 먹여야겠다.
벨리타가 집으로 돌아가자고 하니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에잉, 못난 놈들.
돌아가는 길도 오는 길 못지않게 살벌했다. 길거리 음식을 먹고 싶었는데 먹지도 못한 벨리타가 투덕대는 소르니와 잭슨을 무시하며 창 너머를 보았다.
애들에게 뭐 먹이지. 밥해 주는 동안 싸우는 거 아닐까. 따위의 생각을 하니 저택에는 금세 도착했다. 설마 바로 보내려는 건 아니겠지, 안절부절못하는 아이들을 끌고 응접실로 향했다.
사람이 많으니 시끌벅적하다. 자리를 뜨려는 데이비드와 오웬을 붙잡아 앉혀 뒀다. 지금 선물을 주지 않으면 잊을 것 같아서.
벨리타는 직접 만든 종이봉투에서 선물 상자를 하나씩 꺼냈다. 시선이 쏠린다. 찬란하게 붉은색의 작은 상자를 조슈아에게 건넸다. 조슈아가 잔뜩 긴장하여 양손으로 조심스레 받아 든다. 조슈아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연말 선물.”
“저, 저한테요? 영애, 저는 준비도 못 했는데……. 제가 받아도 되나요?”
예상하지 못한 선물은 무척 기쁘다. 자신이 파는 물건을 자신이 받게 된 꼴이었지만 벨리타가 주었다는 의미가 컸다.
조슈아는 양손으로 소중하게 상자를 쥐었다. 이로써 세 번째 선물이다. 언제나 받기만 하고 주지 못했는데. 조슈아는 조만간 제 상단에서 가장 값비싸고 아름다운 선물을 준비하리라 다짐했다.
소르니와 잭슨이 죽일 듯 노려보았지만 조슈아는 행복했다. 자신을 생각해 직접 고른 선물. 어찌 감동이지 않을 수 있으랴. 여태 선물은 많이 받아 보았지만 이토록 행복한 적 없었다.
조슈아가 잔뜩 들떠 상자를 소중하게 코트 안주머니에 모셔 두었다. 다음의 순서는 누구인지, 잔뜩 기대하는 시선들이 벨리타에 쏠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