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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72화 (72/150)

72화.

역시 다른 이들보다 오웬이 가장 성숙하다. 데이비드는 마차를 함께 타기 위해 으르렁대던 셋을 떠올렸다. 그에 비해 오웬은 양반이다. 평소에 붙어 있는 꼴을 보면 연인과 다름없어 보이는데, 질투도 나지 않나 보다. 오웬이 데이비드를 향해 상체를 기울이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게다가 저 틈에서 어떻게 있어. 숨 막혀서 죽을걸?”

맞다. 저 살벌한 사람들 틈에서 어떻게 있으랴. 데이비드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오웬도 낮게 웃었다. 대화도 잘 통하고 좋은 사람이다. 벨리타가 오웬과 사이가 멀어지게 되더라도 데이비드는 오웬과 가까이 지낼 수 있으리라 어렴풋이 생각했다.

이어서 오웬이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벨리타의 몸 상태를 설명했다. 마력은 있지만 재능은 없어 곤란하다는 말과 많이 나아지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말. 데이비드는 덤덤한 오웬의 태도 덕에 무리 없이 벨리타의 상태를 받아들였다.

한편, 오웬과 데이비드가 살기 위해 벗어난 마차 안은 살얼음판이었다. 저들끼리는 단 한마디도 주고받지 않으면서 벨리타에게만 살가운 대화가 이어졌다.

잭슨은 벨리타의 옆을 꿰차서 손을 꼭 잡고 있었고, 조슈아는 벨리타의 눈치를 살펴 얌전히 입 다물고 있었다. 소르니는 방싯 웃으며 벨리타에게 열심히 말을 걸었다.

“말이 많군.”

체면을 차리던 잭슨이 넌지시 시비를 걸었다. 소르니의 낯이 찌푸려졌다.

“달갑지 않으시다면 다른 마차를 타셔도 좋으셨을 텐데요.”

시비를 넘기지 않고 받아들인 소르니가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잭슨이 얼굴을 구긴다. 둘은 워낙에 사이가 좋지 않으니 당연한 상황이기도 했다.

조슈아는 이 상황에 말을 얹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게 벨리타에게 밉보이지 않을 최선의 방법임을 알았다. 그저 얌전히 걱정 가득한 낯으로 둘을 바라봤다. 벨리타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싸우지들 마라. 혼난다.”

“그렇지만 벨리타, 전하께서 먼저…….”

“어허.”

누구 편을 들어주지도 않고 으름장을 놓았다. 소르니는 대놓고 억울해했고 잭슨은 심드렁하게 벨리타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분위기 참 살벌하다.

벨리타는 짜증 가득하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가만히 눈치만 보던 조슈아가 순한 미소를 지으며 벨리타에게 말을 돌렸다. 이때 끼어들면 최소한 탓은 듣지 않을 수 있다.

“하고 싶으신 게 있으신가요, 영애? 연말이라 볼거리도 꽤 있을 거예요.”

“뭐가 있는데?”

“아이들을 위한 작은 연극도 있을 테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도 있죠. 무척 즐거우실 거예요.”

밝아진 벨리타의 반응을 본 조슈아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바보 같은 녀석들. 예쁨은 이렇게 받는 거다. 라고 생각하며 조슈아는 자신이 안내하겠다고 나섰다.

꽤나 기뻐하는 듯 벨리타의 반응을 본 잭슨과 소르니는 벨리타를 빼앗길까 봐 하나씩 말을 얹었다.

“그까짓 연극과 공연을 보고 싶은 거라면 태자궁에 극단을 들여놓겠다.”

“벨리타, 수준 낮은 거 말고 오페라를 보자. 표도 구해 놓을게.”

“둘 다 필요 없어.”

깔끔하고 확실한 거절이었다. 잭슨과 소르니는 시무룩해졌고 조슈아는 의기양양해졌다. 흔들림 없는 평온한 표정 관리를 한 조슈아는 소르니와 잭슨의 시기 질투를 받아야만 했다.

셋을 말리기도, 달래기도 귀찮아진 벨리타는 달리는 마차에서 뛰쳐나가면 다치려나, 따위의 생각을 하며 창문 너머를 바라봤다.

덜그럭, 마차가 멈추는 소리가 났다. 마차를 타면 그리 먼 거리도 아닌데 억겁의 시간이 지난 것처럼 느껴지는지. 이게 다 사이 안 좋은 셋 때문이다.

마차의 문이 열렸다. 벨리타는 자신이 제일 먼저 내려서 탈출하고자 발을 내밀었다. 벨리타의 앞으로 손이 뻗어져 나왔다.

“멀미 안 했어? 마차 타면 멀미한다며.”

오웬이었다. 뒤에서 따라오는 줄 알았는데 벌써 도착한 모양이었다. 손을 내미는 탓에 로브가 걷어져 있었다. 그 틈으로 제대로 여미지 않아 벌어진 셔츠가 보인다. 야해 빠져가지고!

벨리타의 시선을 즐기는 듯 오웬이 능글맞게 웃었다. 저거 노리는 거야, 분명. 벨리타는 오웬의 손을 잡아 마차에서 내렸다.

“정신없어서 멀미할 틈도 없더라.”

“그럴 것 같았어.”

에스코트도 모자라서 살갑게 대화를 하고 있다. 벨리타를 에스코트하려고 먼저 내리려던 잭슨과 조슈아가 들리지 않게 이를 뿌득 갈았다.

그를 지켜보던 소르니가 비웃으며 둘을 제치고 벨리타의 뒤를 따라 내렸다. 소르니가 자연스레 벨리타의 팔짱을 낀다. 오웬이 눈치껏 벨리타의 옆에서 떨어져 주었다.

한 발짝 물러서서 모든 걸 지켜보던 데이비드의 옆에 선 오웬이 장난 가득 담아 말을 건넸다.

“너는 안 가 봐도 돼? 누님 옆자리 빼앗길라.”

오웬의 장난을 들은 데이비드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됐습니다. 저 사이에 끼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건 그래.”

후드를 뒤집어쓴 잭슨이 벨리타의 오른쪽을 차지했다. 소르니는 왼쪽을 차지해 바짝 붙었다. 조슈아는 한 발 물러서서 섞이지 못하는 불쌍한 아이인 체를 했다.

앞서 걷던 벨리타가 오웬과 데이비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살려 달라는 신호가 가득한 낯이었다. 오웬과 데이비드는 사르르,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무리.’

벨리타도 사르르, 마주 부드럽게 웃었다.

‘두고 보자.’

세르트제 제국의 수도 내에서 상가가 가장 밀집되어 있는 번화가인 ‘무르펜’은 수도에 처음 온 벨리타와 데이비드가 거닐었던 번화가였다. 연말이라고 사람들이 나와 북적거렸다.

이 세계치고는 높은 건물들과 모여 있는 사람들, 길거리 음식들에 드문드문 자리를 잡고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벨리타는 기묘하게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명동인가? 홍대? 낯선 곳에서 익숙한 느낌이 든다.

벨리타는 눈을 가늘게 떴다. 소르니가 벨리타의 팔을 끌었다. 연주하는 이들을 보던 벨리타의 시야가 소르니에게로 돌아갔다. 소르니가 말갛게 웃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간지러워서 몸을 움츠리자 기분 좋게 바스러지는 웃음소리가 들린다.

“너와 이러고 있으니 너무 좋다.”

연말에 다 같이 모인 게 그리도 좋을까. 벨리타는 잭슨을 돌아보았다. 푹 눌러쓴 후드 사이로 반짝거리는 잭슨의 눈이 보였다. 길거리에 장식된 작은 천들이 바람에 나부끼고 가족이 다함께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본다. 잭슨이 무얼 바라는지 알 것 같다.

벨리타는 잭슨의 손을 잡아주었다. 가족이 되어 줄 수는 없지만 손은 잡아 줄 수 있으니까.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단단히, 놓칠세라 힘주어 쥔다. 잭슨이 벨리타를 힐긋 바라보곤 배시시 아이처럼 웃었다. 벨리타도 마주 웃었다.

졸지에 정면으로 잭슨의 웃는 얼굴을 본 소르니의 낯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벨리타가 뒤를 돌아보았다. 조용히 바짝 뒤를 따라오는 조슈아가 시선에 화답하듯 미소를 짓는다.

“로틀 남작이 추천해 주는 가게가 있나요?”

질문이 올 줄은 몰랐는지 조슈아가 순간 멍청하게 굳었다. 얼마 가지도 않아 여상스러운 낯짝이 되었지만. 조슈아는 자신을 잊지 않고 챙겨 주는 벨리타에게 큰 감동을 받으며 질문으로 대답했다.

“영애께서 원하시는 가게가 무엇인가요? 무얼 사고 싶으세요?”

“안 정했어요. 남작이 추천해 주는 곳으로 가려고요.”

감동이 휘몰아친다. 자신에게 행선지를 맡겨준다니. 조슈아는 날아갈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무조건 최고의 가게로 모셔야 한다.

아니다, 너무 과하게 비싼 곳으로 가면 벨리타가 당황할 수도 있다. 가성비가 끝내주는 곳이 어디더라! 역시 제 상단밖에 없다.

추천해 주는 곳이랍시고 자신이 운영하는 상단으로 데려가는 건 너무도 장사꾼 같아 보이긴 하겠지만 어쩔 수 없다. 다른 상단보다 제 상단이 낫다. 가성비도 최고일 것이다. 벨리타에게 모조리 무상으로 안겨 줄 테니까.

조슈아가 살갑게 웃으며 일행을 이끌었다. 조슈아를 따라 일행이 줄줄이 소시지처럼 따라갔다.

높은 건물을 열고 들어서니 화려하고 깔끔한 건물 내부가 벨리타 일행을 반겼다. 종업원들이 일제히 벨리타 일행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고객 응대가 확실하다. 확실해서 벨리타는 긴장했다. 이런 곳은 대체로 턱 빠지게 비싸다.

어색하게 고개를 돌려 조슈아를 바라보니 부끄럽다는 듯 웃는다. 왜 처웃어. 웃겨? 내가 돈 없는 게 웃겨?

벨리타는 일행들의 선물을 사 주려고 했다. 조슈아에게 가게를 추천해 달라고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조슈아라면 좋은 가게를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으니까. 확실히 좋은 가게이기는 하다. 더럽게 비싸 보여서 그렇지. 벨리타는 제 수중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를 떠올렸다. 음. 무리다. 나가자.

절대 감당 못 한다. 일행의 선물을 다 사 주고 나면 벨리타는 길거리에 나앉을지도 몰랐다. 개인적인 선물이라 되도록 벨리타가 모아 온 용돈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파텔 후작가에 청구하면 면이 살지 않는데.

종업원들이 조슈아를 향해 일제히 고개를 다시금 숙인다. 벨리타가 조슈아를 돌아보았다. 조슈아가 멋쩍게 웃는다.

“좋은 가게가 떠오르지 않아 제 상단으로 모셨어요. 괜찮……으시죠?”

“싸게 주나요?”

“네? 아, 그럼요. 물론이죠. 원가로 드릴게요.”

살았다. 원가면 싸게 먹힌다. 벨리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진열된 물건들을 훑어보았다. 물건들은 확실히 좋아 보이는데, 가격표가 없다. 이러면 십중팔구 비싸다. 조슈아의 가게라니 팔아주지 않을 수도 없다. 의리가 있지 하나 정도는 사 주어야 했다.

벨리타는 최대한 싸 보이는 것을 둘러보았다. 벨리타의 시선이 한 곳에 머무른다.

벨리타가 구경하는 동안 소르니는 부채를 펼쳐 입가를 가렸다. 조슈아를 비웃는 티가 역력했다.

“장사치는 역시 장사치로군요?”

이런 때에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손님으로 데려오다니. 소르니는 불쾌한 기색도 숨기지 않았다.

오웬과 데이비드는 벨리타를 따라 구경을 나섰고, 잭슨은 아무 말 없이 조슈아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조슈아가 입꼬리만 가볍게 끌어 올린다. 눈을 서늘하게 소르니를 바라보며 머릿속에서는 손익을 따졌다. 감정에 치우치는 것보다 미래의 고객에게 살갑게 구는 편이 좋다.

“영애께서 가시는 곳은 최고여야 하니까요. 전 제 상단에 자신 있답니다. 공녀님께서도 그리 말하지 마시고 한번 둘러보세요.”

“대단도 하셔라.”

역력히 비꼬는 말투였다. 더는 조슈아와 말을 섞고 싶지 않은 소르니는 부채로 얼굴의 반을 가리며 벨리타의 뒤를 따랐다.

잭슨은 미동도 않고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짙고 집요한 시선에 조슈아는 불쾌함을 감추고 살갑게 미소 지었다. 순간 잭슨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사냥하기 직전의 짐승과도 같은 섬뜩함이 들었다.

조슈아는 뒷목까지 기어 올라오는 소름을 드러내지 않으려 눈까지 접어 웃어 보였다. 잭슨이 입매를 비틀었다. 나른하고 거친 목소리가 작게 울렸다.

“네가 소이트 상단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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