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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71화 (71/150)
  • 71화.

    데이비드가 어리둥절한 낯으로 벨리타를 보았다. 뭐, 왜. 데이비드는 고개를 도리질 치며 말을 꺼냈다.

    “휴가 주는 건 처음 봤습니다. 그래서, 어디로 놀러 나갈 생각이십니까?”

    “쇼핑이나 하는 거지 뭐. 전에 놀았던 게 너무 재밌더라고.”

    돈 걱정 없이 펑펑 써대는 맛도 있었고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선물이라도 쥐여 주고 싶었다. 뒤치다꺼리 해 준 데이비드와 많이 도와준 오웬, 등등. 연말 선물도 돌려야 예의이기도 하니까.

    돈에 관련해서 데이비드와 이야기를 나누어야겠다. 쇼핑하자는 말에 상가를 떠올린 오웬과 데이비드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고로 연말은 다같이, 새해는 가족들과 보내는 게 옳지 않던가. 문득 잭슨과 소르니, 조슈아를 떠올렸다. 마땅한 가족도 없으니 연말을 쓸쓸히 보내지 않을까 신경이 쓰였다. 모르쇠 하려고 해도 자꾸 양심이 찔린다. 몰랐다면 그냥 넘어갔을 텐데 알고 나니 여간 마음이 쓰이는 게 아니다.

    벨리타는 포크를 내려놓고 오웬을 곁눈질했다.

    벨리타의 시선을 모를 리 없는 오웬이 곧바로 눈웃음을 지으며 화답한다. 귀신같은 녀석.

    “저…… 오웬아. 있잖아.”

    “다른 사람들도 부르고 싶어?”

    “오메, 어떻게 알았어.”

    진짜 귀신인가? 벨리타에 대해 잘 파악한 오웬으로서는 당연히 예상한 결과였으나 벨리타는 소름이 돋았다.

    “그럼 나중에 나랑 단둘이 데이트해 줘.”

    “지랄 마라.”

    싸늘하고 차가운 거절에도 오웬은 방긋 웃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데이비드의 낯이 일그러졌다. 주위에 멀쩡한 사람이라곤 오웬뿐인데 변태 조슈아, 쳐죽여도 모자랄 황태자, 죽여도 시원치 않은 소르니를 부른다니. 데이비드는 참으로 속이 마땅치 않았다. 혹시 모른다. 바쁘다고 오지 않을지도. 제발 그랬으면 좋겠는데.

    벨리타가 간간이 하던 말이 있다. 세상 시발 마음대로 되질 않는다. 오웬이 순간이동으로 말을 전하고 온 뒤, 아침에서 낮으로 넘어가는 해가 쨍쨍한 시간에 저택 앞으로 마차 세 대가 당도했다.

    가문의 인장은 없지만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마차들이었다. 창문 너머로 마차를 훑어보던 데이비드는 도망이라도 가고 싶어졌다.

    벨리타와 집무실에 오순도순 앉아 저택 내의 사용인들을 위해 연말 선물은 무엇으로 하면 좋을지 토론 중이었다.

    당일이 연말이다 보니 제대로 된 선물은 준비하지 못하지만 성의를 담아 대량으로 사 오자는 데이비드의 의견에 돈이 최고라며 고개를 내저은 벨리타가 대립했다.

    대량으로 사 오면 그게 무슨 성의냐, 돈이 최고다. 돈만큼 성의 넘치고 완벽한 선물은 없다.

    벨리타가 일갈하자 데이비드는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선물을 사는 것보다 돈으로 챙겨 주는 게 더 싸게 먹힌다는 말은 동감한다. 후작가의 체면을 생각한다면 값이 나가는 선물을 주어야 할 테니 그럴 바에야 돈을 챙겨주는 게 좋다.

    어? 나 이미 설득당한 거 아니야?

    데이비드는 알아챌 새 없이 벨리타와 얼마를 챙겨 주면 될지 토의하고 있었다. 벨리타의 세상에서 만원의 가치가 1실버였으니 10실버씩 챙겨 주자고 말을 꺼냈다가 데이비드의 싸늘한 시선에 입을 다물었다.

    아니, 왜? 그 정도도 낮게 주는 거 아닌가? 데이비드가 종이에 글을 적어 정리하며 설명했다.

    “이 저택에만 50명이 있습니다. 10실버씩 챙겨 주면 500실버, 즉 5골드입니다.”

    “그 정도면 싸게 먹히는 거지. 사람들이 뭘 제일 좋아하는 줄 알아? 돈 잘 주는 사장님이야. 돈 잘 챙겨 주면 충성이 따라온다고.”

    현실에서 가게를 운영하며 느낀 점이었다. 보너스를 잘 챙겨 주면 오래 일하고 더 열심히 한다. 노력의 결실이 돈으로 돌아오니 얼마나 정확하고 확실한 보상인가. 5만 원은 안 주느니만 못하고 20만 원은 미리 준비해야만 하는 큰 지출이다. 10만 원 정도가 적당했다.

    벨리타는 데이비드를 열심히 꼬드겼다. 요지부동이던 데이비드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가에 그 정도 돈도 없을까. 벨리타는 연말 선물이 뭔지 들떠 있는 하녀장에게 지시했다. 연말 보너스로 10실버씩 얹어 주라고. 하녀장은 기쁘게 끄덕거리며 전달하러 떠났다.

    비꼬지 않고 점잖게 토론만 하느라 진이 다 빠진 둘이 소파에 늘어지자 곧바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데이비드는 긴장했다.

    손님이라며 찾아온 사람이 긴 로브를 두르고 나타났다. 이야, 저건 어딜 봐도 그거지. 그거네. 맞네.

    데이비드와 벨리타는 조곤조곤 로브의 주인을 두고 소곤거렸다. 저게 가린다고 가린 거냐, 티가 다 나는데 웃기지도 않는다.

    장본인을 두고 열심히 돌려 까는 벨리타 덕에 로브가 바로 걷혔다. 잔뜩 토라진 잭슨이었다.

    인상을 찌푸리고 성큼성큼 걸어온 잭슨이 벨리타의 허리에 손을 얹었다. 큰 힘 들이지 않고 벨리타를 들고서는 제 무릎에 앉혀 놓는다.

    데이비드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뭐 하는 짓이지? 은은하게 웃으며 눈으로 잭슨에게 온갖 욕을 퍼부은 벨리타가 체념하고 잭슨의 무릎에 얌전히 앉는다. 자주 구겨졌던 잭슨의 편지처럼 데이비드의 얼굴이 구겨졌다.

    “빨리 왔네. 오웬이 얘기해 주자마자 바로 온 거야? 안 바빠?”

    “놀러 간다기에 미뤄 두고 왔다. 한 번도 가 본 적 없잖나.”

    연락책이 되어 준 오웬 덕에 벨리타가 독을 먹고 쓰러진 사건에도 데이비드와 잭슨은 만난 적 없었다. 그 말은 즉, 서로 안면은 튼 건 오늘이 처음이라는 뜻이었다. 다만 둘은 서로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뒷조사를 열심히 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는 공손히 인사를 올렸고, 잭슨은 퉁명스레 고개만 까딱거려 받아줬다. 벨리타가 잭슨의 귓바퀴를 잡아당겼다.

    아, 아아!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아픔에 잭슨이 버둥거렸다. 벨리타가 잔뜩 짜증이 난 태도로 꾸짖는다.

    “인사 똑바로 안 해? 다시 해.”

    “무얼 더 하라는 말이냐.”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잭슨입니다. 해, 빨리.”

    데이비드는 너무 놀라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다. 뼈가 말랑말랑했다면 분명 튀어 나가서 굴러갔을 거다. 누님이 막 나가는 건 알았지만 황태자의 귀를 잡아당기며 혼을 내는 건 참으로 간담이 서늘하다. 잭슨과 만났을 때마다 벨리타가 크게 다쳐서 오거나 쓰러지는 이유가 서열 싸움을 해서 그런 건가, 싶기도 했다.

    서열 싸움에 이긴 벨리타가 저렇게 잭슨을 혼내고 있는 걸지도. 우리 누님, 역시 대단하십니다. 기가 막혀요. 진짜 미치셨냐고요.

    데이비드는 잭슨이 제발 화내지 않기를 바랐다. 벨리타가 시키는 건 당연히 안 할 거라 생각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잭슨입니다.”

    이걸 하네. 어이가 없다. 진짜 서열 싸움 했나 보다. 등짝 때릴 때부터 알아봤다. 죽여주는 매운 손으로 잭슨을 이겼나 보다.

    데이비드는 얼떨떨하게 잭슨의 인사를 받았다. 시키는 걸 곧이곧대로 해낸 잭슨에게 착하다, 잘했다 칭찬해 주는 벨리타를 보고 데이비드는 현실감을 잃었다. 잭슨이 벨리타를 끌어안고 그르릉 댔다.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일제히 문으로 시선이 돌아갔다. 조슈아와 소르니였다. 나란히 들어온 둘은 벨리타를 무릎에 얹어 놓고 물고 빠는 잭슨을 보았다. 눈으로는 세상 쌍욕을 다 하는데 표정 관리가 완벽했다.

    조슈아가 순하고 살갑게 웃으며 벨리타에게 다가갔다. 순간 조슈아의 앞을 가로막은 소르니가 선수를 쳐 벨리타에게 향했다.

    “오늘 옷 너무 예쁘다, 벨리타. 나들이하러 간다며? 짐꾼이 많은 건 좋지만 이렇게까지는 필요 없는데.”

    일행이 많은 게 싫다는 불만이었다. 사이 안 좋은 황태자, 음흉한 뱀 같은 상단주를 버리고 가자는 뜻이다.

    잭슨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태평한 태도로 벨리타의 목덜미와 어깨에 얼굴을 박았다. 가만히 뒤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던 조슈아가 슬쩍 벨리타의 옆에 섰다. 무해하고 순한 낯으로 웃는다.

    “오랜만에 뵈니 기뻐요, 영애. 사고 싶으신 게 있다면 저를 통해서 구하셔도 좋으실 텐데요.”

    자기와 단둘이 가자는 소리다. 어째 다들 서로 인사도 안 하고 이렇게 따로 놀 수가 있는지.

    데이비드는 흐릿한 눈으로 벨리타를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이 꼴인지 나중에 반드시 설명하라는 낯이었다.

    벨리타는 허허 웃었다. 이거, 이대로 나가도 괜찮을지 걱정이 된다. 사이가 안 좋다 못해 서로를 없는 취급 하지 않나.

    “다들 모였으면 가죠. 제자님이 연말이라고 다 같이, 즐겁게, 놀기를 바라시네요.”

    로브를 꿰입은 오웬이 반쯤 열린 문을 비집고 들어섰다. 순식간에 현 상황을 파악한 오웬은 방긋 웃으며 능청스레 이들에게 눈치를 줬다. 트러블 없이 얌전히 놀라고. 벨리타의 이름을 끼워 반박도, 거부도 할 수 없게 원천 봉쇄까지 해 버렸다. 견제하며 날을 세우던 분위기가 차분해졌다. 서로가 눈치만 본다.

    같이 있기는 소름 끼치게 싫은데 벨리타가 다 같이 즐겁게 놀기를 바라니 자리를 박차고 나가기도 뭐하고 시비를 걸기도 뭐하다.

    벨리타는 오웬을 향해 엄지를 들어 보였다. 엄지가 불쑥 솟아 있는 벨리타의 손을 본 오웬도 한쪽 눈을 감으며 받아쳤다.

    슬쩍 고개를 든 잭슨이 오웬의 윙크를 보고 혐오감 짙은 낯을 해 보였다.

    허벅지에 안정적으로 앉아 있던 벨리타가 헛기침을 했다. 모두의 시선이 벨리타에게 쏠린다. 벨리타는 부담스러워졌다. 유치원 선생님도 아니고. 이제 와 인사를 나누라고 해도 서로를 마땅치 않아 하는 기색이 역력해 강요하기도 민망하다.

    벨리타는 출발하자며 부둥켜안은 잭슨을 떼어내고 오웬의 옆에 섰다.

    자연스럽게 벨리타의 어깨에 팔을 두른다. 오웬이 능청스럽게 웃으며 이들을 돌아보았다. 데이비드를 제외한 셋의 낯이 사납다.

    셋의 반응에 무척 즐거워 보이는 오웬까지 본 데이비드는 이 일행에서 제외되고 싶다는 바람이 간절해졌다.

    *

    마차를 둘로 나누어 이동했다. 화려하고 번쩍거리는 일행들의 마차는 부담스럽다며 비교적 평범한 벨리타의 마차를 나누어 탔다.

    벨리타의 곁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은 삐약이들이 한곳에 욱여싸 타려고 버둥거린 탓에 사이가 좋은 오웬과 데이비드가 빠져 단둘이 마차를 탔다. 앞서 달리는 마차를 창문 너머로 바라본 데이비드가 오웬을 흘겨본다.

    “섭섭하지 않으십니까.”

    “뭐가?”

    “누님과 각별한 사이이지 않습니까.”

    넌지시 물어오는 질문에 오웬은 잠시 할 말을 고르는 듯하더니 웃어넘겼다. 여유가 흘렀다. 무얼 그런 걱정을 하느냐는 반응이기도 했다.

    오웬이 등받이에 등을 기대어 로브 안에 파묻힌 손을 꺼낸다. 제대로 정리하지 않아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단정한 생김새가 두드러진다.

    “저 사람들도 네 누님을 엄청 좋아하는데, 나만 독점할 수야 없지. 이런 걸로 섭섭해하는 것도 웃기고 말이야.”

    “그렇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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