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이마가 닿는다. 얇은 편지 봉투 하나를 두고 숨이 섞였다. 허리와 등골이 저릿거린다. 머리카락이 뒤엉키고 맞닿은 이마가 문질러진다. 오웬이 곧게 벨리타를 바라보았다.
“왜 이러세요, 선생님.”
능글맞게 굴던 오웬이 돌연 굳었다. 목 아래부터 천천히 붉은 기가 올라와 귀 끝까지 붉게 물든 오웬이 헛숨을 들이켰다. 이마를 맞댄 채 고개를 숙인다. 편지 봉투에 입술이 닿는다. 종이가 달싹거려 벨리타의 입술에도 닿았다 떨어졌다.
“그 말, 되게 묘하다……. 나 변태인가 봐.”
“알긴 알아?”
“아는 게 어디야.”
그건 그래. 벨리타가 조용히 웃었다. 키득거리는 웃음과 함께 거리가 벌어졌다. 열이 올라 더운 오웬이 셔츠를 펄럭이며 벨리타에게서 떨어진다.
벨리타의 침실에서 묘한 분위기가 생기니 벨리타도 긴장이 되었다. 게다가 편지 봉투로 막았지만 입을 맞춘 것 아니던가. 고작 그 얇은 종이 하나에 기대어서. 울렁이며 가슴께가 쿵쿵 격하게 뛰었다.
마음에 드는 남자와 부대껴서 그렇다. 어쩔 수 없는 거다. 마음을 다잡았다. 다리가 풀리는 감각에 벨리타가 의자에 몸을 기대어 앉았다.
벨리타를 따라 오웬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몸이 멀어지니 그나마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노을이 진다. 하루가 길었다.
“황태자랑은 이야기 잘 끝냈다고 했고……. 공녀랑은 어떻게 된 거야?”
“음, 말해도 되나.”
“우리 사이에 뭘. 네가 아는 건 나도 알잖아.”
남의 치부를 쉽게 말해도 될까 염려가 되었다. 소르니에게는 힘든 시간이었을 테고 벨리타에게 안겨 울었음을 타인이 알게 되는 게 부끄러울 수 있다.
벨리타는 간략하게 설명했다. 소르니가 결혼을 포기해 달라고 했다. 그러겠다 했는데 잭슨을 만날 수 없어 미뤄 두었다가 일이 생긴 거다. 여기까지 이야기했으면 충분하다. 충분한데.
“잭슨이한테 도저히 말이 안 나오더라고. 미안해가지고……. 내가 나 돌아가자고 애한테 하면 안 될 짓을 한 거잖아. 얼마나 상처받겠어. 결혼하자고 꼬드겨놓곤 이제 와 싫다고 내빼는 게 얼마나 얄밉겠어. 말 못 하면 어쩌지, 어떡하나 했는데. 소르니가 복도에서 그러더라고. 살려 달라고.”
그때만 떠올려도 숨이 턱, 막힌다. 자신이 다 망쳤다는 사고밖에 되지 않아 괴로웠다. 벨리타가 테이블을 짚고 억누른 숨을 가늘게 뱉었다.
오웬은 아무 말 않고 진중하게 이야기를 경청했다.
“정신이 확 들더라.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내가 이따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나 싶고……. 애들한테 책임이나 다 떠맡겨 버리는 게 무슨 어른이야. 딸 보기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어.”
진심이다. 딸이 이곳에서, 제 꿈을 빌려 소통하게 된 것도 소설인 덕이다. 그간 자신이 했던 고민과 해결 방안까지 제시한 걸로 보아서 자신의 행적이 기록이라도 되는 듯했다.
벨리타는 무척 혼란스러웠고 부끄러웠으며 수치스러웠다. 지지자, 버팀목이 되어야 할 자신이 낱낱이 까발려지는 치욕스러움은 달갑지 않다.
원하지 않게 이곳까지 왔는데 이렇게 괴로워해야 할까. 회의감까지 든다.
툭, 툭, 침대를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벨리타가 시선을 돌렸다. 오웬이 침대를 두드리며 이리 오라는 시늉을 해 보인다. 주춤, 벨리타가 상체를 뒤로 물렸다. 아직 가깝게 있기에는, 민망했다.
“괜찮으니까 이리 와. 벨리타.”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는 건지, 오웬이 나른하게 웃었다. 그런 얼굴은 정말 반칙 아닌가. 벨리타가 쭈뼛거리며 일어나 오웬에게 다가갔다.
그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다가온 벨리타를 얌전히 바라보다 팔을 벌렸다. 아무 말 없이 그저 기다린다. 선택하여 제 품에 안겨 오기를 기다렸다.
뒤로 젖혀진 로브 사이로 하얀 셔츠가 드러나 있었다. 매듭을 제대로 여미지 않아 틈으로 두드러지는 쇄골과 그 아래가 금단의 영역처럼 느껴졌다.
벨리타는 섣불리 오웬에게 안기지 못했다. 매번, 언제나 오웬이 끌어안았지 벨리타가 먼저 안겨 오지 않았던 탓이기도 했고, 먼저 선택하여 안게 되면 감정을 이기지 못할 것 같아서이기도 했다.
안지 않아도 괜찮다는 반응이 더 갈등하게 한다. 벨리타의 선택을 존중한다고, 원하는 대로 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하는 듯했다.
벨리타는 걸음을 디뎠다. 풀썩, 오웬의 무릎에 걸터앉아 어깨에 기댄다. 오웬이 몸을 짧게 떨었다가 벨리타를 부드럽게 감쌌다. 포근하고, 따뜻하다. 오웬의 머리카락에 벨리타의 색이 섞인다. 노을이 졌다.
“너도 마음고생 많이 했겠네. 그래도 걱정하지 마. 황태자도 그렇고 공녀도 그렇고 널 탓하지 않을 거야. 일도 잘 해결됐고 너도 진심으로 사과했을 거잖아. 넌 좋은 사람이야. 너무 자책하지 마.”
넌 왜 좋은 사람이어서. 내가 듣고 싶은 말만 귀신같이 알아채 속살거려 주는지. 거짓뿐인 이곳에서 너만 현실이길 바라게 하나. 유일하게 기댈 수 있게 한다.
다른 등장인물들이 비참하고 가혹한 과거를 살아 온전하지 못한 탓에 오웬이 더욱 멀쩡해 보여 곤란하다. 버팀목도 닳고 닳게 되면 기댈 곳이 필요하다.
벨리타에게 있어 오웬은 그런 존재였다. 그래서 버겁다. 떠나야 하는데 떠나고 싶지 않아질까 봐. 조금이라도 갈등하게 될까 봐 두렵다.
오웬이 상체를 숙여 벨리타를 한껏 끌어안았다. 허벅지에 걸쳐진 다리가 공중에 흔들렸다. 감당해야 할 일들도 모두 끝냈으니 이제는 돌아갈 일만 남았지.
오웬의 등을 마주 안았다. 드리워지는 노을이 달고 부드러웠다.
*
12월 25일은 성탄절인데 이곳에는 존재하지 않는 휴일이었다. 덕분에 어영부영 넘어가 해의 마지막 날이다. 이곳에 온 지 6개월 남짓 지났다.
그동안 온갖 일이 일어났지만 일사천리로 해결되었고 벨리타는 여전히 서클은커녕 마력을 다루지 못했다.
오웬이 심각한 얼굴로 왜 안 되지? 오류인가? 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간 짬짬이 적어 두었던 일기장을 들추어 보았다. 두꺼웠던 일기장을 채워가는 기분이 썩 나쁘지 않다. 현실로 돌아가게 되면 본래의 벨리타가 일기장을 보고 혼란스러워하지 않길 바랐다. 몸을 빼앗고 멋대로 살았으니 이 정도는 해 주어야 예의라고 생각했다. 갈대처럼 이랬다저랬다 하는 제 과거를 들여다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고.
자신이 빠져 주었으니 결혼도 일사천리로 진행될 줄 알았건만 잭슨과 소르니의 관계는 지지부진했다.
소르니는 태자궁에서 눈물 콧물 쏙 뺀 이후로 종종 벨리타를 찾아왔다. 왜 찾아오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는데 소르니의 방문이 세 번을 넘어가자 알았다. 조슈아 때처럼 코 꿰였구나.
소르니는 며칠 전 벨리타를 찾아와 엉엉 울었다. 잭슨 빌어 처먹을 새끼가 자신에게 벌을 주지 못했으니 대신하여 하나뿐인 친구 같은 하녀를 죽였다고 대성통곡을 했다. 이름이 멜타 라나 뭐라나.
잭슨의 성격으로 보아 많이 인내하여 내린 결론이었다. 소르니도 억울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유일한 친구를 잃은 상실감에서 온 슬픔인 듯했다.
그 탓인지 둘은 사이가 요원했다. 잭슨도 소르니가 남겨 놓은 2황자의 흔적을 이용해 황후와 2황자를 끌어내리려는 준비를 하느라 바빴다. 약속대로 종종 찾아갈 때마다 벨리타를 제 무릎에 앉혀 놓고 일만 했으니 말이다. 애도 아니고, 인형도 아닌데 무릎에 앉혀 어디 가지도 못하게 안고 시간을 보냈다.
벨리타가 간섭할 일은 아니었고 벨리타도 할 일이 따로 있었으니 잠잠한 기간이었다. 그리 편지를 쓰고 쫓아다니기 바빴던 조슈아마저도 잭슨이 2황자를 쳐내려는 준비를 하는 동안 연락이 오지 않았다. 조슈아는 장사꾼이니 연말이라고 바쁜 모양이었다. 덕분에 데이비드와 오웬을 옆에 끼고 느긋한 일상을 보냈다.
해의 마지막 날 아침인데 고요하다. 벨리타는 일기장을 서랍 안에 깊숙이 밀어 넣고 식당으로 내려왔다. 오웬과 데이비드가 애피타이저를 느긋하게 먹고 있었다.
데이비드가 연말이라고 신랄한 시비를 걸었지만 벨리타도 방긋 웃으며 맞대응했다. 남매의 투닥거림이 익숙해진 오웬이 책을 넘기며 사과 조각을 씹었다.
“다들 오늘 뭐 해? 바빠?”
책에서 시선을 뗀 오웬이 살갑게 웃었다. 데이비드의 옆에 앉으니, 데이비드가 저리 가라며 툴툴댄다.
벨리타는 꿋꿋이 데이비드의 옆에 앉았다. 데이비드의 입꼬리가 슬금슬금 위로 올라온다. 쟤는 꼭 좋으면서 튕긴다.
“내 옆자리도 비었는데, 벨리타.”
“바쁘냐고.”
“난 너밖에 없는데 바쁠 리가.”
책갈피를 끼운 뒤, 책을 내려놓았다. 오웬의 눈이 가늘게 접혔다. 자기 예쁜 것도 잘 알고 죽여주는 목소리로 달달한 말을 하면 심장이 남아나지 않게 한다는 것도 잘 안다. 여우 같기는.
식탁에 음식들이 놓인다. 데이비드와 오웬, 엘라의 시선이 벨리타에게 쏠렸다.
“연말이니까 놀러 나갔다가 저녁에 맛있는 거 먹자. 다들 시간 되지? 부모님도 만나야 하는데 거리가 너무 머네.”
“오신답니다.”
뭐? 온다고? 마법 걸린 마차로 이틀이나 걸리는 거리인데 온다고?
벨리타는 깜짝 놀라 데이비드의 팔을 붙잡았다. 데이비드가 벨리타의 손을 쳐내지 않은 채 샐러드를 입에 넣었다. 오웬도 놀란 눈치였다. 데이비드가 물을 한 모금 넘기며 말을 잇는다.
“당일에 가신다고 하셨지만, 내일 즈음에 도착하실 겁니다. 새해니까요.”
“정말?”
“제가 왜 그런 걸로 거짓말합니까? 제가 누님인 줄 아십니까.”
짜악, 등짝에서 경쾌한 소리가 났다. 데이비드가 등을 지고 상체를 웅크려 바들바들 떨었다. 샐쭉하게 고개를 돌린 벨리타가 고깃덩이를 썰었다. 오웬이 낮게 웃는다. 평화로웠다.
“엘라는 어때? 네 집에 돌아가지 않아도 돼? 휴가 줄게.”
예상하지 못한 부름에 놀란 엘라가 눈을 크게 떴다. 대놓고 휴가에 관해 의사를 물어본 건 처음이었다.
벨리타는 제 뒤에 서 있는 엘라를 돌아보았다. 대답을 채근하는 눈치였다. 엘라는 할 말을 고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아, 아가씨, 가도, 되나요……?”
“안 될 게 뭐 있어? 내가 붙잡고 가지 말라고 했던 적도 없는데.”
틀린 말은 아니다. 여태 벨리타는 혼자였고, 안타깝고 따르고 싶은 마음에 떠나 본 적이 없었던 것뿐이다. 엘라는 가족과의 사이도 그리 살가운 편이 아니니 괜찮기도 했고. 그래도 가족을 보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엘라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크게 기뻐했다. 벨리타는 멋쩍었다. 본래의 벨리타가 뭘 알겠냐마는, 종업원에게 휴가도 주지 않는 건 너무한 일이다.
당장 짐을 싸서 가족과 만나고 오라는 말을 하니 엘라는 쭈뼛거렸다. 주인의 식사 시간에 냉큼 나가 버리는 건 옳지 못했으니. 벨리타는 고개를 까딱거리며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일주일 정도는 쉬어. 여태 휴가도 못 갔을 거 아냐. 지금 안 나가면 안 보내준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사랑합니다!”
“사랑은 넣어 두고. 새해 복 많이 받아.”
아가씨도요! 일주일이나 쉴 수 있다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엘라는 여태 본 적 없는 미친 속도의 백스텝으로 종종 식당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