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듯한 통증을 참으며 손을 들었지만 허공을 배회하다 치맛자락만 쥔다.
벨리타가 쯧, 혀를 찼다. 옷을 쥔 손을 떼어내고 제 손으로 단단히 감싼다. 수더분하게 잡은 손에서 벨리타의 얼굴로 시야가 이동한다. 붉지도, 노랗지도 않은 어중간한 주황색의 머리.
밉다가도 견딜 수 없게 따뜻한 저 머리. 바다처럼 차갑지도, 숲처럼 온화하지만은 않은 저 눈이. 짜증 나리만치 좋아져서.
소르니는 벨리타가 궁금했다. 좋은 사이가 되리라는 예상조차 하지 않았다. 서로를 짓씹고 깎아내리거나 얼굴 보기도 역겨운 사이가 될 거라 생각했다. 첫 만남은 말다툼, 그 이후는 차분한 대화, 다음은……. 어쩌다 이렇게 됐지. 사랑을 방해한 자신에게 왜 살갑게 굴까.
어린 나이에 미쳐버린 불쌍한 후작 영애. 건강하지 못해 남들 다 해 보았던 것도 하지 못하고 칩거했던 불우한 사람. 미쳤다는 소문을 등에 업고 귀족 남자들이나 끼고 다닌다는 여우 같은 여자. 귀족 남자들로 부족해서 약혼자가 있는 황태자에게 치근덕대는 엉덩이 가벼운 계집. 벨리타의 소문들이다.
이 중에 자신이 경험한 벨리타에게 걸맞은 소문이 있나? 어제까지만 해도 모든 소문이 진실인 줄 알았다. 물론 진실일지도 모른다.
다만 소르니가 겪은 벨리타는 불쌍하지도 않았고, 불우해 보이지도 않았으며, 남자들에게 살랑거리지도 않았다. 치근덕대며 매달리는 건 황태자 쪽이었다.
썩 괜찮은 사람인데 평가절하되고 있는 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벨리타와 소르니는 서로에게 잘한 짓은 한 적 없었지만 피장파장이었다. 서로 하나씩 잘잘못을 주고받은 셈이다.
극악으로 치달을 수도 있었던 관계성에 먼저 온기를 불어넣고 손을 내민 건 벨리타였다. 소르니는 내밀어진 손을 잡아도 될지 번뇌하고 있었다. 신뢰할 수 없는 지옥에 살아왔기에.
“……나에게 이리 해 주면, 네게 돌아가는 건 뭐니. 얻는 게 뭔데.”
갈라지고 메마른 목을 달래서 버겁게 지껄였다. 이익이 있어야 관계는 지속된다. 바라는 것 없이, 얻는 것 없이 이어지는 관계란 있을 수 없다. 벨리타가 얻는 이득이 무언지 알아야 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뭘 그런 걸 따져.”
퉁명스럽고 뻔뻔한 대답이었다. 소르니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감각이 들었다. 벨리타는 감싸 쥔 소르니의 손을 가볍게 주무르며 헛웃음을 뱉었다.
“굳이 따지자면 내 마음 편하자고 하는 거죠. 미안해서, 답답해서 그러는 거예요. 나 좋자고. 그러니까 더 헛소리 말고 잠이나 주무세요.”
잡았던 손을 침대에 내려놓는다. 온기가 옅어지는 순간, 소르니가 벨리타의 손을 붙잡았다. 일어나던 벨리타가 뒤를 돌아보았다. 소르니의 낯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나 잘 때까지만 있다가 가렴.”
“내가 왜요?”
무슨 소리를 하냐는 당연한 거절에 소르니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꾸욱,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벨리타가 인상을 찌푸렸다.
“있으라면 있어! 하녀도, 아무것도 없이 그냥 홀로 와서 그러니까!”
이 뭔……. 떫은 표정을 짓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놓아주지 않은 소르니 때문에 벨리타는 이내 포기했다.
얘도 어리광쟁이인가. 높은 신분의 아이들이 뭐가 부족하다고 사람을 놓아주질 않는지.
다시 소르니의 옆에 앉은 벨리타가 제 품을 뒤적거렸다. 막무가내로 굴어서 열이 받아 독을 먹인 복수를 하는 건가?
소르니가 긴장과 경계를 품으며 벨리타를 올려다봤다. 절그럭, 협탁에 동전이 놓인다. 얼핏 보아 5실버 정도 되었다. 갑작스러운 돈 구경에 소르니의 낯이 멍청해졌다.
“뭐니?”
“돈이잖아요.”
“내가 그걸 몰라서 물어보니?”
“아무것도 없이 왔다면서요. 여자가 돈까지 없으면 안 돼. 오만 원, 아니, 실버라도 갖고 있어야지.”
이런 말 해 주는 사람은 처음이다. 돈이고 권력이고 명성이고 다 가진 가문의 공녀에게 이런 말을 할 사람이 있을 리 없었지만. 걱정 받았다.
간질거리고 몰캉하게 흐물흐물해져 버리는 기분이 생소해서 소르니는 입을 꾹 다물었다. 가만히 있으려니 입이 근질거리는 벨리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결혼도 그래. 해야 하는 거라니까 어쩔 수 없다 치는데, 솔직히 잭슨이 걔가 이렇다 할 신랑감은 아니잖아? 안 그래요? 나야 뭐, 잠깐 미쳤었다 하는데.”
갑자기 황태자의 험담을 한다고? 소르니는 어이가 없었다. 전하라는 존칭도 없이 이름을 턱턱 부른다. 가깝기는 가까운 사이인가.
선뜻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한 데다 매달리는 건 잭슨이었으니 사랑하는 연인 사이라고 해도 깊지 않은 줄 알았다. 그래서 자신과 결혼하고 싶으면 파혼하라고 한 것은 첩이 되기 싫은 자존심 탓이라고 은연중 생각했다.
“걔는 남편 구실시키려면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쳐야 될 거예요. 어우, 그게 애지 남편이야? 원래 결혼하면 다 큰 애 키운다 하지만은. 잭슨 걔 봐요, 애가 막무가내에 성깔이 또 얼마나 더러운데. 부부 싸움 하면 나라가 뒤집히고 하늘이 무너지고~”
아닌가?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나? 연인이라고 생각한 것도 헛다리였나? 소르니는 점점 알 수 없어졌다.
“그래도 애가 착해요. 가르쳐 주면 열심히 해. 노력하는 게 또 얼마나 예뻐 보이는지……. 귀여운 구석도 있어요, 나름.”
하나만 해. 욕을 하는지 칭찬을 하는지 모르겠다. 칭찬을 하기 위한 큰 그림이었나? 말의 뜻을 알아채는 것도 어렵다.
끙, 소르니가 인상을 찌푸리고 벨리타를 보았다. 잔잔한 호수 같은 벨리타의 낯이 애틋했다. 연인 사이가 맞았을까. 짙은 감정이 흘러넘치는 미소였다. 벨리타는 제 연인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참고 살라는 말은 안 할게요. 결혼 초장부터 기를 싹 잡아놔야 편해. 하나하나 가르치는 게 귀찮더라도 막상 배우면 잘하니까 초반에만 좀 고생해요. 남편은 여자 하기 나름이라는 말도 있잖아. 아, 이런 말은 너무 늙은이 같나? 돈 관리는 자기가 맡아야 돼. 그래야 좀 기 펴고 살아.”
그것도 아닌가? 연인을 부탁하는 대화도 아니었나? 결혼 조언이 갑자기 나와? 근데 왜 겪어봤다는 듯이 얘기하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대화의 흐름에 핀트도 잡지 못하겠다. 이해하려 치면 다음 화제로 넘어가 버리는 통에 정신이 없다. 눈은 감기는데 대화를 따라가기에 벅차 잠도 오지 않는다.
“결혼해도 걔는 걔고, 공녀님은 공녀님이에요. 자신을 잃으면 안 돼. 결혼하고 나면 너무 쉽게 사라지더라고. 남편이라고 내 인생을 살아 주진 않잖아요. 그러니까 스스로를 지켜요. 지켜야 돼.”
아. 이게 본론이었구나. 남편이 될 사람을 헐뜯고 칭찬한 뒤, 조언을 얹어 긴 서론을 조잘거렸다가 끝내는 아내가 될 사람을 걱정한다. 겪어 본 사람이 하는 조언 같았다. 생생한 날것이었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다. 미쳤다기에 온전하고 평범하다기에 범상치 않다. 소르니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꽃을 피워냈다.
“……그래. 명심할게.”
“내가 너무 오지랖 부렸네. 자야 되는데. 밥은 먹었어요?”
“……먹었어.”
“잘했네. 그럼 이제 빨리 잠이나 자요. 나 바쁜 사람이야.”
웃기는 사람이다. 소르니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천천히 시야에 드리워지는 손바닥이 끝내 눈을 가렸다. 벨리타의 손이 따뜻해서 눈이 감긴다.
오매불망 붙잡고 있는 손에 점점 힘이 풀리고 의식이 아득해졌다. 일정하게 오르내리는 가슴팍과 호흡 사이로 조곤조곤 작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를 끝으로 잠에 끌려 들어갔다.
옳지, 착하다.
푹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
집에 도착하니 편지가 와 있었다. 샤를로트 영지에서 보내진 편지였다. 로엘린인가?
편지를 뜯어보니 두 장의 편지지가 들어 있었다. 하나는 로엘린, 하나는 타린.
벨리타는 흐리멍덩해진 타린의 얼굴을 떠올렸다. 말랑하니 귀여운 아이였다는 기억만 난다. 아랫부분이 성치 않다는 기억도 함께.
등 뒤에 찰싹 붙어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배배 꼬며 손장난을 치는 오웬을 무시하고 편지지를 펼쳤다. 샤를로트 백작 부인인 로엘린이 구구절절, 이런저런 소문이 들려오는데 여간 걱정이 되는 게 아니다. 잘 지내고 있냐, 등등 수다스럽게 안부를 물어왔다. 아따 귀여운 여편네. 편지도 앙증맞게 잘도 썼다.
오늘 내에 답장을 써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타린의 편지도 펼쳤다. 오웬이 더욱 가깝게 붙어오는 통에 벨리타가 찰싹, 찰싹 오웬을 쳐냈다. 이놈의 집구석은 사람을 가만두는 법이 없다. 오웬을 밀어낸 벨리타가 타린의 편지를 읽었다.
[벨리타, 잘 지내지? 겨울바람이 시리네. 감기 조심해. 어머니께서 네 걱정을 무척 많이 하시더라. 널 정말 좋아하셔서 그런가 봐. 나도 네 걱정이 많이 돼. 안 좋은 소문이 여럿 들려서 말이야. 물론 아니라는 걸 알지만 네가 상처받을까 봐 마음이 쓰여. 조만간 볼 수 있으면 좋겠어. 어머니께서도 널 자주 찾으시고 나도 네가 많이 보고 싶어. 그럼 또 편지할게.]
대략 줄여 저런 내용의 편지였다. 제 엄마를 빼다 닮았다. 상냥하고 다정하다. 단어 하나하나마다 배려가 담겨 있고 애정이 묻어난다. 사랑스러운 사람들은 사소한 것까지 사랑스럽다.
벨리타는 가슴 안쪽이 뜨끈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방금까지도 황궁에서 황태자와 공녀를 엉엉 울리고 오느라 마음이 좋지 못했는데 몽글몽글해졌다.
모자가 쌍으로 귀엽고 난리다. 어느새 오웬이 다시 벨리타의 뒤에 찰싹 붙어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타린의 편지를 본 오웬이 벨리타의 어깨에 턱을 얹는다. 심통이 난 듯 장난스러운 말투였다.
“이 남자는 또 누구야, 자기야? 우리 자기는 왜 이렇게 남자가 많지?”
“지랄을 해라, 지랄을.”
면박에도 뻔뻔하게 머리를 기대어 비비적거린다. 개도 아니고.
벨리타가 고개를 옆으로 빼내 물리자 오웬이 팔을 뻗어 어깨에 두른다. 꼼짝없이 오웬의 품에 갇혔다. 단단하고 유려한 팔이 벨리타의 턱을 지탱했다. 부담스러운데 좋아서 문제다. 좋지만 않았어도 싸다구를 왕복으로 갈겨 주는 건데.
“글씨 되게 예쁘네. 벨리타, 너도 글씨 예쁜 남자가 좋아?”
“보기에는 좋지. 글씨 예쁜 게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니고.”
“그럼 밥 먹여 주는 남자가 좋아?”
또 이렇게 훅 들어온다. 벨리타는 편지지를 곱게 접어 편지 봉투에 잘 끼워 넣었다. 오웬이 고개를 들이밀며 대답을 채근했다.
“돈 잘 버는 남자가 좋다. 왜.”
“그럼 나는?”
귓가에 낮고 달큼한 목소리가 쏟아졌다. 등줄기부터 오싹하게 소름이 끼쳤다.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능글맞은 대사를 치는 건 정말 태생인가 노리는 건가.
벨리타는 달아오르는 얼굴을 편지 봉투로 가려 보았다. 당황스러워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 부끄럽고 간질거려서 열이 오른다.
편지 봉투 너머로 드러난 벨리타의 눈을 곧게 바라보던 오웬이 가늘게 웃었다.
“나도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