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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68화 (68/150)

68화.

“네가…… 혼인하고 싶지 않다면…… 그렇게 해. 널 붙잡을 수단이 하나 사라지는 것쯤이야, 감당할 수 있다. 그러니까, 제발. 벨리타. 벨리타, 제발.”

“내가 너에게 연심을 갖지 않아도, 옆에만 있으면 괜찮아?”

검은 머리가 품에서 비비적거린다. 위아래로 흔들리는 머리카락을 손안에서 느끼며 벨리타는 울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아껴 주고 싶어지는 마음에 멀어져야 한다는 충동이 든다. 함께 있을수록 서로만 갉아먹어서. 떠난 이를 놓아주지 못하고 붙잡아 두려고 하니까.

좋은 선택이란 뭘까. 최선의 선택은 뭘까. 어떤 대답을 해야 후회 없는 미래가 되는지 모르겠다.

“난 너한테 상처만 준 것 같은데. 내가 밉지 않아?”

목이 갈라진다. 울컥 차올라 목을 적셨다. 그리고 끓어오른다. 잭슨의 손이 벨리타의 팔을 잡았다. 감싸 쥔 손이 뜨겁다.

“……밉지 않다. 내가 널 어떻게 미워할 수 있나. 할 수 있다면 이미 했을 거다.”

그칠 기색도 없다. 잭슨의 눈물이 어깨를 적신다. 벨리타의 몫까지 울어 주길 바랐다. 지금의 벨리타는 울 수 없으니, 잭슨이 대신 울어 주길 원한다.

벨리타는 소파에서 내려와 잭슨의 앞에 주저앉았다. 큰 몸을 가득히 끌어안는다. 부족함 없이 품에 들였다. 이미 상처를 주었다면, 엎질러진 물이라면 그대로 두어도 괜찮을 것 같아서.

“이렇게 하자. 네가 소르니와 결혼하면 우리는 친구를 하는 거야.”

비겁한 결정이다. 언제든 달아날 구석을 마련해 둔, 끊어질 수 있는 틈을 만들어 강요한다. 철저한 갑이다. 잭슨은 거부할 수 없다.

커다란 덩치가 움찔, 떨린다. 축축하게 젖은 보라색의 보석이 벨리타를 담았다. 달라붙은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잭슨의 눈이 혼란에 번들거렸다.

벨리타는 잭슨의 눈가를 성의 없이 문질렀다. 거친 손길이었다.

“친구는 특별한 일이 없어도 같이 있을 수 있고 가족보다, 연인보다 가깝고 깊은 사이가 되기도 하잖아. 결혼한 사이가 아니어도 놀러 갈 수 있고, 가족이 아니어도 시간을 보낼 수 있어. 기대고 의지해도 이상하지 않아.”

잭슨은 벨리타와 친구할 생각이 없다. 고민조차 해 보지 않은 명제였다. 가두어 두고 싶고, 독점하고 싶고 사랑한다 속살거리길 희망하는 애틋한 감정이 우정일 리 없다. 입을 맞추고 싶고 몸을 부대끼고 싶은 욕망이 우정은 아니다. 거절이 입 언저리에 맴돌았지만 삼켰다. 친구마저 되지 않으면 벨리타를 곁에 둘 명분이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해친 죄인과 결혼하면, 혐의를 눈감아 주면 벨리타는 옆을 지켜 준다. 그 외의 선택지는 없다. 억지로 감금해 제 것으로 해 보았자 의미가 없음을 알아버렸다.

잭슨이 사랑하는 벨리타는 망아지처럼 날뛰면서도 어디에도 귀속되지 않아 다정한 사람이니까. 날개를 꺾고 다리를 분지르면 더는 벨리타가 아니라는 걸 알고 말았다.

사람의 호의, 마음을 얻으려면 노력해야 한다는 말. 잊지 않고 있다. 당장에라도 발목에 족쇄를 채워 가두어 두고 싶은 충동을 멀리 묻어 두며 친구 따위로 만족하는 노력.

잭슨은 타들어 가는 초조함과 안달 나는 심정을 깎아가며 버겁게 입술 끝을 올렸다. 눈에서는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리는데, 입만은 겨우 웃고 있다.

옆에 두게 되면 기회는 찾아온다. 근처에 있는 이상 시기가 오게 되어 있다. 잭슨은 참을성을 배웠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틀어쥐는 사냥법은 잭슨의 특기이기도 했다.

“네가 떠나지 않는다면, 어떤 관계든 좋다.”

“그럼 내 부탁 들어주는 거지?”

“내가 어찌 거절할 수 있어. 네 부탁인데.”

해방감에 터지는 웃음이다. 결국 책임지는 것은 없으면서 해결되었음에 개운함을 느꼈다. 스스로에게 역겨움이 느껴졌지만, 머물러 준다는 답변 하나로 행복해지는 잭슨을 보니 아무렴 좋다는 기분이 든다.

미안하고 또 미안한 아이다. 마음고생만 시키고 제멋대로 군 탓에 상처만 받게 했다. 벨리타는 각오를 다졌다.

돌아가기 전까지, 잭슨이 좋은 사람으로 성장하길 응원해 주자고.

물기 가득 어린 눈을 거듭 닦아준 후, 잭슨을 힘주어 안았다. 뭐라 정의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정확하게 자르듯 확립된 감정이 아니어서 잭슨은 벨리타에게 아픈 손가락이 되었다.

“미안하고 고마워. 아가, 이해해 줘서 고마워. 대단해…….”

“……더 칭찬해 줘.”

응석. 잭슨이 벨리타의 등을 틈 없이 안았다. 잘 짜인 근육이 벨리타를 지탱한다. 잭슨의 가슴팍에 볼을 기대어 등을 천천히 토닥거렸다. 대견해, 착해. 점점 나아지는 모습이 너무 멋있어.

나긋나긋하게 이어지는 칭찬 세례에 그칠 새 없는 눈물을 비집고 말갛게 웃음이 피었다. 벨리타도 마주 웃었다. 겨울임에도 햇살이 따사로웠다.

울음이 그칠 기미가 없는 잭슨을 어르고 달래 진정시킨 벨리타는 꼭 또 올 테니 일 마무리 잘하고 밥 잘 챙겨 먹으라는 인사를 남기고 집무실을 벗어났다.

오웬이 복도 창문에 손가락을 문지르며 낙서를 하고 있었다. 벨리타의 머리 하나 이상을 넘을 만큼 큰 장신의 남자가 공들여서 창문에 낙서나 하고 있는 꼴이 꽤 귀여웠다.

오웬이 살갑게 웃으며 벨리타를 반겼다. 축축하게 젖은 드레스를 아는 체하지 않고 짧게 주문을 읊어 말끔하게 원상 복구시켜 놓는다. 언제 봐도 신기하다.

촐랑거리며 멀끔해진 차림새를 둘러보는 벨리타와 창문을 번갈아 보던 오웬이 말을 꺼낸다. 낙서가 완성되지 않은 모양이다.

“잘 해결됐어?”

“어. 소르니랑 결혼하는 대신 나랑 친구 하기로 했어.”

떨떠름한 반응이다. 잭슨의 성깔로 보아서 쉽게 넘어가기 어렵다 생각했는데 얼마나 잘 조련해 두었으면. 황태자의 속도 어지간히 뒤집혔겠거니 예상한 오웬이 여상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어찌 됐든 잘 해결되었으면 된 거다. 결혼 문제도 해결이고, 황제가 될 황태자와 친구 먹어서 나쁠 것도 없다. 물론 황태자는 결코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겠지만.

낙서를 끝낸 오웬이 몸을 돌렸다. 벨리타가 낙서를 보고 웃음을 터트린다. 딸이 다섯 살 때 그린 그림보다 못 그렸다. 저게 네발짐승이야, 짚신벌레야.

오웬이 멋쩍게 부끄러워하며 뒷목을 긁적인다.

“벨리타, 넌데.”

웃음이 뚝 그쳤다. 지랄 마라. 저게 어딜 봐서 나냐.

벨리타가 손바닥으로 벅벅 창문을 닦아 낙서를 없앴다. 오웬이 우는 시늉을 한다. 매정해, 나빴어. 능청스레 손등으로 눈가를 가리며 과하게 어깨를 들썩거렸다. 꼴값한다.

벨리타가 오웬의 어깨를 팡, 두드렸다. 소리만 크고 아프지 않은데 왜 마음이 아프지. 그렇게 못 그렸나. 오웬의 앙증맞은 연기가 끝났다.

“벨리타, 자기야. 이제 돌아갈 거야?”

“소르니 얼굴 한번 보고 가려고……. 누가 네 자기야? 주둥이가 자유분방하다?”

“공녀 얼굴 한번 보고 가게? 얘기도 전해 줘야 하니까, 그러지 뭐.”

말 돌리기는 아주 수준급이다. 떨떠름한 반응을 한 벨리타가 먼발치에서 다가오는 노타를 발견하고 아는 체를 했다. 벨리타가 먼저 불러 준 적은 한 번도 없었던 탓에 노타가 잔뜩 신이 나 다가왔다.

“영애가 먼저 절 불러 주시다니 기쁘네요.”

“소르니 공녀 어디 있어요?”

“역시 목적이 있으셨군요.”

실망이라며 눈썹을 늘어트린 노타는 기억을 되짚었다. 태자궁에 들이닥쳐 내내 석고대죄를 하고 있느라 소르니에게는 방도 필요 없었다.

잭슨에게 매달리고 애원하는 소르니를 보는 것도 고역이었는데 집무실이든 침실이든 가는 곳마다 무릎 꿇고 처량하게 기다리고 있어 심히 곤란했던 차였다. 다행히도 벨리타가 달래준 덕에 막 방을 내어주고 그 외의 일을 마치고 온 길이었다.

그러니까 소르니가 숨 돌리고 있는 방이 어디더라. 황태자비 침실이었다. 남들의 시선에는 아직 소르니는 예비 황태자비였으니까.

노타가 답하자마자 벨리타는 뻔뻔하게 안내하라며 짝다리를 짚었다. 노타는 밀린 일을 떠올리며 벨리타를 바라보았다. 그래, 안내 한 번 해 주는 거 얼마나 걸린다고.

따라오라며 몸을 돌린 노타를 쫓았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복도를 거니는 동안, 오웬은 벨리타의 옆에 바짝 붙어 제 그림이 정말 못 봐줄 정도냐며 캐물었다. 차마 아니라는 말은 못 한 벨리타가 입을 꾹 다물다가 결국 폭발했다. 발가락으로 그려도 제가 더 잘 그리겠다며 짜증을 내었다가 내기하자는 말에 냉큼 넘어가고야 말았다.

트리플 악셀을 돌면서 봐도 오웬의 손보다 벨리타의 발가락이 더 우수했기 때문이다.

둘의 투닥거림을 잔잔히 듣던 노타는 허허 웃었다. 역시 유쾌한 영애다. 그 덕에 요새 잭슨이 생기가 돌았으니 노타에게 벨리타는 은인이었다. 황태자비 침실 앞에 선 노타가 문을 열기 전, 조심스레 말을 꺼낸다.

“사실, 이 방은 벨리타 영애를 위해 준비했던 곳이에요. 들뜬 전하께서 직접 가구들을 고르기도 하셨고요.”

순식간에 숙연해졌다. 어림짐작하여 벨리타가 잭슨과의 혼인을 무효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래도 해 주어야 할 것 같아서 꺼낸 말이었다.

오웬도 벨리타도 할 말을 잃고 아……. 하게 만들었다. 미안해서 어쩌지. 신나서 사랑하는 사람의 방을 꾸몄을 잭슨을 생각하니 안쓰러워졌다. 노타가 큼, 짧게 헛기침을 하곤 문을 두드렸다.

답은 없었지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벨리타는 노타와 오웬에게 자신이 들어갈 테니 밖에서 기다리라고 부탁을 남긴 후, 홀로 방 안으로 들어섰다.

덩그러니 남겨진 일면식도 없는 노타와 오웬의 눈이 마주친다. 저희 집 제자가 막 나가서 죄송합니다. 아, 아니요, 저희 전하 잘 챙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적당히 예의 차린 대화를 주고받은 후, 노타가 바쁜 일정을 소화하러 떠났다.

허락도 받지 않고 벌컥 들어간 벨리타는 소르니가 대답할 기운도 없어 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며칠 무리한 몸이 바짝 긴장한 덕에 버텨 주었던 모양이었다.

침대에 겨우 누워 숨만 내쉬는 소르니에게 다가갔다. 몸살이 온 듯했다. 벨리타가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힘겹게 씻고 왔는지 머리가 축축하다.

“씻고 누워야죠. 감기 걸릴라.”

“…….”

“잘 해결됐다고 얘기해 주러 왔어요. 그러니까 마음 놓고 푹 자요.”

숨소리만 들렸다. 소르니의 시야는 온통 벨리타였다. 하얗고 얇은 손이 젖은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 치워냈다. 베개가 축축했다. 부은 눈이 느릿하게 끔뻑거리고 바짝 마른 입술은 앙다물려) 열릴 새 없었다.

벨리타는 길게 한숨과도 같은 웃음을 흘렸다. 푸석해진 볼에 따뜻한 손길이 닿는다.

“……미련해가지고. 그러게 왜 한겨울에 무릎 꿇고 찬 바닥에 앉아 있어, 앉아 있길. 얼마나 그러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다음부터 그러지 마요. 자기 몸은 스스로 챙겨야 돼, 누가 챙겨주지 않아.”

볼에 닿는 손의 온도가 데일 듯 뜨거워서. 화상을 입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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