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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67화 (67/150)
  • 67화.

    서두도 없다. 결론부터 내놓는다. 너무도 담백하고 매정하다. 어떻게 해 볼 새도 주어지지 않았다. 잭슨이 구겨지는 낯을 애써 평온하게 유지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든다. 팔뚝에 힘줄이 불거졌다.

    “……네가 하자고, 했다. 안 된다고 해도 네가 하자 졸랐지 않나.”

    “그랬지. 내가 성급하게 굴었어. 사과할게, 미안해.”

    사과마저 깔끔하다. 차라리 미안해하지 말지. 진심으로 사과하지나 말지.

    벨리타는 소르니와 구른 덕에 헝클어졌던 머리를 정돈하며 차분히 말을 골랐다. 벨리타라고 쉽게 말이 나온 건 아니다. 애정을 갈구하는 어린아이를 가지고 논 스스로가 혐오스럽고 고스란히 상처를 받게 될 아이에게 미안해서 몇 번이고 번복하려 했던 말이었다.

    오늘도 말하지 못할 뻔했다. 알면서도 외면하려고 드는 아이의 얼굴을 보니 차오른 말이 자꾸만 아래로 숨었다. 벨리타라고 달아나고 싶지 않았을까. 불행한 과거를 살아 그 시간에 머물러 있는 아이들 틈에서 유일하게 벨리타만이 어른이었다. 벌인 일을 수습하고 책임져야 하는 어른이었다.

    짓누르는 죄악감과 지긋지긋하게 기어오르는 자기혐오까지 조용히, 알아서 추슬러야 하는. 제 몫을 아이에게 전가하지 않아야 할 어른이다. 벨리타는 소르니를 마주하고 나니 빠져나갈 곳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벨리타가 숨어버리면 그 책임은 고단한 아이들이 짊어져야 했다. 다 자라지 못한 미성숙한 아이들이.

    불우한 환경은 아이의 탓이 아니고 자라지 못한 것도 아이의 탓이 아니다. 벨리타는 그들을 보듬고 성장시켜 줄 의무는 없었지만, 자신이 벌인 일에는 책임질 의무가 있었다. 그래서 벨리타는 끝을 내기로 했다. 숨을 크게 들이쉰 뒤, 길게 뱉어냈다. 할 수 있다. 자기 최면을 걸었다. 으레 그랬듯.

    “소르니 공녀를 황태자비로 들이는 게 맞아. 독살을 하려고 했지만 어쨌든 난 살았고, 공녀가 벌을 받는 것도 싫어. 내가…….”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잭슨이 불쑥 다가와 벨리타의 입술을 집어삼킨 탓이다. 굵은 손이 갸름한 턱을 쥐었다. 우악스레 억지로 입을 맞춘다. 벨리타의 주먹이 잭슨의 어깨를 밀어내고 손목을 잡아 흔들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잭슨의 얼굴을 눌러 바쁘게 밀어내는 손을 잡아채 붙든다.

    힘으로 이길 수 없다. 벨리타는 하얗게 질려 고개를 도리질 쳤다. 그 탓에 맞물린 입술이 잠시 떨어졌다. 잭슨이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잭슨을 피한 벨리타가 자신의 입술을 모아 짓씹었다. 온 힘을 다해 씹어서 찢어져 터진 입술에 피 맛이 배었다.

    숨이 가쁘다. 부지런히 반항하는 몸과 잭슨을 피하려 안간힘을 쓰는 동안 체력이 바닥나고 있었다. 벨리타는 급한 대로 잭슨의 코를 세게 깨물었으나, 순간 멈칫할 뿐, 물러나지 않았다.

    한 손으로 벨리타의 양 손목을 쥐어 결박한다. 위험하다. 벨리타는 필사적으로 이 상황을 멈추어야만 했다. 얇은 다리가 매섭게 배를 걷어차고 허리를 내리쳤다. 잭슨의 잇새로 신음이 터진다.

    떨어진 입술 사이로 재빠르게 벨리타의 고함이 울렸다.

    “싫어!”

    끈질기게 벨리타를 쫓던 입술이 멈추었다. 고개를 뒤로 물린 잭슨이 시야에 담겼다. 핏물로 얼룩진 입술이 벌어진다. 꽉 다물린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잭슨은 벨리타가 거부하면, 강제할 수 없었다. 그렇게 배웠으니까. 벨리타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으니까. 잭슨은 이미 길들여졌다.

    “이제 와 하지 않겠다고 해 봤자다.”

    “내가 일방적으로 제멋대로 군 거잖아. 미친 영애가, 황태자와 결혼하겠다고 설레발치다가 지레 겁먹고 달아난 거야. 욕은 내가 먹을게. 넌 억지로 찾아오는 미친 여자한테 시달리다가 피해만 받은 거야.”

    “나한텐 그따위 것, 중요하지 않아.”

    여린 손목을 쥐던 손이 나가떨어진다. 벨리타의 위로 드리워졌던 잭슨은 바닥으로 무너져 무릎을 꿇었다. 단단한 손이 벨리타의 허벅지 위에 얹어졌다. 두꺼운 치맛단 너머의 가녀린 다리를 쥐어 무릎에 이마를 기댄다.

    “내 곁에 있는 게 두려워졌나? ……위험해져서…… 내가 싫어?”

    잘게 떨린다. 목소리에서 물비린내가 난다. 벨리타는 손을 뻗어 잭슨의 고개를 들게 했다. 진창과 다름없는 잭슨의 눈을 곧게 들여다보았다. 피하지 않는다. 보랏빛의 보석에 벨리타가 비쳤다.

    “아니, 안 싫어.”

    허벅지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턱이 자잘하게 경련한다.

    “……날 사랑해 주겠다고, 같이 있어 주겠다고 했잖아.”

    “노력했는데 안 되더라.”

    솔직한 배려가 아프다. 너무 쓰려서 숨이 막혔다. 차라리 다디단 거짓으로 속여 주면 좋았을 텐데. 잭슨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건, 장본인이 제일 잘 알았다. 잭슨은 그리도 갈망했던 사랑은 받지 못했다. 호의와 동정만 적선처럼 주어졌음을 안다. 그래도 괜찮았다.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갖기만 해도 좋았다.

    이미 길들여진 짐승은 야생으로 돌아갈 수 없다. 안락함에 나태해지고 날카롭게 벼려진 난폭함은 무뎌진다. 쉽게 주어지는 먹이에 익숙해져 굶어 죽고야 만다. 잭슨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애완동물이 되어 버린 짐승은 그저 주인에게 아양을 떨고, 꼬리를 흔들어 매달릴 수밖에 없어지는 것이다.

    “잭슨아, 네 탓이 아니야. 넌 잘해 줬어. 내가 못나서 그래.”

    다정하지나 말지. 희망도 갖지 못하게 무자비하게 짓이겨 놓아야지.

    “마음처럼 되지 않는 게 사람 마음이잖아. 네가 잘못한 게 아니야.”

    달랠 필요 없다. 배려할수록 괴롭기만 하다. 잔인한 배려였다.

    벨리타의 엄지가 잭슨의 입가를 닦아냈다. 피가 번진다. 거듭 투박하게 문지르는 손길에 온기가 묻어나서 바닥까지 곤두박질쳤다. 겨우 헤어짐에 익숙해졌는데, 멈추었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는데.

    눈물이 쏟아졌다. 어미에게 학대당했을 적에도, 손수 찔러 죽였을 때도, 악몽에 시달려 식은땀을 흘리며 시린 밤을 견디었던 순간에도 흘린 적 없는 눈물이었다. 여태 쌓여 있었던가. 흘리지 못해 담아두고 있었나.

    한 번 흐른 눈물이 끝도 없이 볼을 적셨다. 벨리타가 눈가를 닦았다. 그럴수록 짙게 젖었다.

    “사랑하지 않아도 돼. 곁에만 있어 달라 했잖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어떻게 그래.”

    “그래도 돼. 너는 나에게 그래도 된다.”

    터진 둑이었다. 한 방울씩 모여 둑이 된 눈물샘이 걷잡을 수 없었다. 벨리타의 손안에서 아이처럼 울었다. 웃고 우는 것 모두 벨리타의 손아귀 내에서였다.

    잭슨은 우는 표정만 지었지 눈물 흘리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울 수 있게 되었다. 감정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는 건 잭슨이 자라났다는 뜻이다. 울어야 할 때 울지 못하는 건, 좋은 일이 아니다. 참기만 하는 건 끝내 속을 곪게 만드니까.

    그래서 벨리타는 잭슨에게 울지 말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우는 아이의 눈물을 닦아 주고 친히 몸을 숙여 허리를 낮추어서 안아 주었다.

    잭슨에게 필요한 건 연인도, 정치 파트너도 아니다. 어른이었다. 자랄 수 있게 곁에서 바라보고 응원해 주며 가르쳐 주는 어른이 필요한 거다. 정이 들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첫 만남부터 어그러졌지만 함께 보낸 시간은 많았고 감정의 교류도 짙었다. 잭슨을 사랑하느냐 물으면 사랑하지 않는다 대답할 수 있지만, 잭슨에게 마음도 가지 않느냐는 물음은.

    벨리타는 잭슨에게 깔끔하지 못한 감정을 가졌다. 어른의 부재가 불러온 폐해를 안타까워했고 흐르지 못한 시간을 동정했으며 제 곁에서 자라나는 아이를 보며 잃은 아들을 느꼈다. 단정한 검은 머리카락을 볼 때마다, 칭얼거리며 안겨 오는 온기를 느낄 때마다 이따금 가슴 깊이 묻어 두었던 아이의 부재를 실감했다.

    잘 자라 주었다면 분명 이렇게 컸겠지, 왈가닥인 엄마가 귀찮다며 성질도 냈겠지. 이 나이대의 아들은 어땠을까.

    옳지 못한 생각이라는 걸 안다. 애먼 사람을 두고 잃은 아이를 떠올리는 것도 실례였고, 좋다고 달려드는 남자에게 제 아이를 빗대어 본 것도 못 할 짓이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생각과 마음은 달라서. 아무리 접어두고 치워내도 간혹 밀려드는 감정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엄하게 굴었어도 끊어내지는 못했다. 결혼을 해야만 돌아갈 수 있다는 핑계를 두고 기피했다. 그 감정을 인정하면 잭슨에게 상처만 주는 꼴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벨리타는 잭슨을 사랑할 수 없다. 미워할 수도 없고 외면할 수도 없다. 얼마나 잔인한 감정인가. 이 얼마나 무자비한가.

    입술을 맞대고 사랑을 속살거려도 죄악감이 밀려오던 이유였다. 제 아이가 아니다. 알고 있다.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번개가 내려치는 순간처럼 불현듯 젖어오는 그리움은. 그마저도 벨리타의 탓인가.

    “너만 힘들 거야. 서로가 괴로울 거야. 좋은 관계가 되지 않아.”

    “꼭 명확하게 그어진 것만이 관계인가? 우리만 좋으면 그만 아닌가.”

    그저 곁에만 있으면 좋다고. 사랑해 주지 않아도, 감정을 주지 않아도 옆에만 있어 주면 만족한다고. 어떻게 그러겠어. 바라는 것도 없이 존재만 하는 관계가 어떻게 지속될 수 있니.

    지금은 좋아도 후에는 욕심이 생기고 갈구하게 될 거다. 사람이란 타고나길 욕심쟁이다. 잭슨의 곁에 있으며 그를 온전히 보리라는 확신도 없다.

    벨리타는 끝내 잭슨에게서 자신의 아이를 찾아낼 것이고 잭슨이 바라는 이상에 맞추어 주지 못해 박살 날 관계이리라. 그 관계에서 벨리타는 행복할 자신이 없었다.

    눈물이 어깨 부근을 적신다. 소르니의 눈물과 섞여 탁해진다. 벨리타는 자신도 어른이 되지 못했다는 상념을 떨칠 수 없었다. 어른인 척, 온전히 다 자라난 성인인 양 굴면서 폐만 끼친 건 아닌가.

    흐느끼는 소리가 났다. 낮고 무거운 짐승의 하울링 같기도 했다. 난 어떻게 해야 할까. 어른으로서, 책임을 질 사람으로서 어떠한 선택을 해야 옳은 걸까.

    벨리타는 일언반구도 없이 잭슨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축축하게 젖은 말이 벨리타를 붙잡는다.

    “……날 버리지 마. 혼자…… 두지 마라. 홀로 살 자신이 없다.”

    내가 망쳤을까. 끝까지 감당할 수 없으면 곁에 들이지도 말았어야 했을까.

    “너 없이 살 자신이 없어. 내가 사랑한 사람이 날 떠나는 기분은, 더 느끼고 싶지 않아.”

    조롱이었을지도 모른다. 잭슨의 옆에서 떠들었던 모든 말이 장난질일지도. 잭슨이 벨리타를 어미에 빗대어 보았듯, 벨리타마저 잭슨을 제 아이에 겹쳐 보았다.

    솔직히, 내심 드는 진심으로만 이야기하자면, 관계를 이리 두어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서로를 잃은 가족에 투영하여 보고 있었으니. 건강하지 못하고 바람직하지 못한 관계여도, 후에는 고통만이 남는다고 해도 이대로도 괜찮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상실감을 서로에게서 채우고 있으니. 간사한 마음이어도 나쁘지 않다는 기분이 든다.

    차라리 지금의 상황보다 그 관계가 더 나을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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