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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66화 (66/150)

66화.

그런데도. 소르니는 벨리타를 밀어내지 못하고 숨죽여 울음을 삼켜냈다. 위에 늘어진 등을 힘주어 끌어안으며 속삭인다.

“……미안해……. 미안하다.”

벨리타는 안일했다. 고작 소설 속 캐릭터라는 생각에 쉽게 보았음을 인정한다. 죽어도, 행복하게 살아도 어차피 소설 속 캐릭터였다. 하지만 눈앞에서 움직이며 자신과 같이 호흡하고 울고 웃는 사람을 계속 그렇게 볼 수는 없었다. 갈대처럼 쉽게 흔들리는 마음과 다짐이 같잖다.

마음 쓰지 않겠노라 다짐했는데. 울면서 살려달라고 부탁하는 건 반칙이지 않나. 손바닥으로 야윈 등을 쓸어냈다. 헐떡이는 호흡 탓에 등이 들썩거렸다. 가진 것도, 가질 것도 없다. 벨리타가 누리고 당연히 곁에 두었던 호사들은 소르니에게 간절한 것일까. 가족도, 따르는 주위 사람들도 소르니가 바라 마지않는 행복이려나.

가여운 것. 가여워서 두고 볼 수가 없다.

“……이제 와서, 사과하지 마. 네가, 뭔, 데.”

히끅, 울음 섞인 비난이었다. 벨리타는 내가 다 잘못했노라, 연신 대꾸하며 소르니를 다독였다. 눌러 참는 숨소리가 가쁘다. 틈도 없이 바짝 끌어당겨 가득 안았다. 꾀죄죄한 꼴이 며칠 씻지도, 먹지도 못해 보여서.

벨리타는 엉망으로 늘어진 소르니의 머리카락을 한데 쥐어 넘겨주었다. 아마 잭슨에게 살려달라고 빌고 있는 중이었겠지.

“잠은 잤어요?”

어깨에 파고든 소르니의 머리가 이윽고 도리도리, 흔들린다. 벨리타의 손이 소르니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손가락에 엉겨 붙는 머리카락이 장미 꽃잎처럼 흐드러졌다. 동그란 뒤통수를 문지르며 질문을 이었다.

“밥은 먹었어요?”

다시 고개가 도리질 친다. 벨리타의 손이 등허리를 토닥거렸다. 비쩍 말라서 밥을 먹었대도 걱정이 될 정도였다. 사람은 밥심인데. 밥은 먹어야 한다. 언제부터 문 앞에 꿇어앉아 버텼는지 모르겠지만 더 가만두었다가는 초상 치르게 생겼다.

등을 덮는 붉은 머리카락을 다시금 치워내 정돈했다. 가느다란 목선에 뼈대가 드러난다.

“밥은 먹어가면서 해야죠. 그러다 쓰러지고 몸 상하면 다 자기 손해인데.”

대답은 없었다.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가는 걸 보니 눈물만 열심히 흘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소르니의 어깨를 쥐었다. 부드럽게 주무른다. 오지랖 부리지 말자고 했지만, 어쩌겠는가. 그게 벨리타인데. 남에게 관심 많고 말 얹기 좋아하는 벨리타가 달리 다른 사람처럼 굴까.

“밀치는 힘 보니까 영 못쓰겠던데요. 멕아리도 없어서 어째요.”

불쑥, 소르니가 고개를 들었다. 잔뜩 열이 받아 붉어진 낯으로 벨리타를 쏘아본다. 표독스러웠지만 눈물 콧물 쏙 빼고 있던 탓에 그저 투정 부리는 아이 같았다. 벨리타의 마른 손이 소르니의 양 볼을 감쌌다. 스스럼없이 엄지로 눈가를 벅벅 문지른다. 소르니가 눈을 질끈 감았다. 어리둥절한 반응으로 어깨만 움츠린다.

“보약이라도 지어 먹여야겠어요. 내가 당겼다고 픽픽 쓰러지는데, 그래서 결혼하겠어요?”

“……너 자꾸 헛소리를…….”

“애도 낳고, 나 같은 애랑 싸우려면 몸이 좋아야지.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자기 진짜 그러다 큰일 나. 찬 곳에 그렇게 오래 앉아 있으면 얼마나 여자한테 안 좋은데.”

소르니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갑작스러운 호의가 당황스럽고 못 미더웠다. 정답게 걱정을 나누고 챙겨줄 사이는 아니지 않은가.

벨리타의 소매가 코를 문지른다. 콧물이 묻어나왔다. 소르니는 창피한 기분에 코를 훌쩍, 들이마셨다. 벨리타가 더럽다며 소매의 뒷부분으로 소르니의 얼굴을 문지른다.

대체 뭐지. 바라는 게 뭐지. 왜 이러는 거지. 어안이 벙벙해 독기마저 쏙 빠졌다. 소르니의 얼굴에 범벅된 물기들을 죄 닦아낸 벨리타가 미소 지었다. 살갗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건져내 정돈하며 조곤조곤, 다독였다.

“들어가서 밥 먹고 좀 자요. 건강한 게 제일이야. 건강은 돈 주고도 못 사요. 내가 잭, 전하께 잘 말해 둘게요.”

“……내가 너의 무얼 믿고.”

용서받지 못할 짓을 했다는 걸 알았기에 되려 벨리타를 믿을 수 없다. 믿고 맡길 염치도 없었다. 적에게 애원해서라도 살아야겠다는 마음이었지만 막상 도와준다는 반응을 얻으니 개운하지 못하다.

소르니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벨리타를 경계했다. 잭슨을 홀린 사람이 곰처럼 착해 빠질 리 없고, 자신과 말다툼을 했던 그때만 돌이켜도 벨리타는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얼굴을 매만지던 손이 붉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초췌해진 하얀 얼굴이 훤히 드러난다. 예쁜 얼굴이 이게 뭐야. 벨리타가 소르니의 볼을 두어 번 부드럽고 약하게 토닥였다.

“괜찮아요. 다 잘될 거야. 걱정 말고 들어가.”

창문 너머로 볕이 쏟아진다. 머리카락이 온데 섞여 붉게 물든 석양처럼 빛이 났다.

소르니는 벨리타를 믿지 못했다. 양심이 있으면 신뢰도 하면 안 되는 처지였다. 제 아래에서 덤덤하고 평온하게 미소 짓는 어린 얼굴이 너그러워서. 정말 용서라도 받은 기분이었다. 소르니가 손을 들었다.

조심스럽고 긴장해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벨리타의 얼굴에 얹었다. 푸른 숲과 하늘이 어우러진 눈이 가늘게 접혔다. 손가락에 전해지는 감촉이 부드럽고 따뜻하다. 손길에 온전히 얼굴을 맡긴다. 자신을 해치지 않으리라 알고 있다는 듯, 당연하게. 벨리타가 했던 대로 눈가를 쓸었다. 푸른 눈이 감긴다.

코끝을 건드렸다. 숨이 뱉어진다. 입술 끝을 문질렀다. 입술이 벌어졌다. 소르니는 홀린 듯, 벨리타의 얼굴을 더듬거렸다. 자신의 손길이 닿는 대로 다정히 반응해 준다. 벨리타가 그랬듯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사랑스럽게 처진 눈이 소르니를 바라보았다. 자잘하게 경련하는 손에 따사로운 석양이 얽힌다.

“……나한테 왜 그래?”

겨우 내뱉은 말이었다. 소르니는 애써 그쳤던 눈물을 참지 못했다. 벨리타의 허벅지 위에 올라앉은 소르니가 벨리타의 양 볼을 쥐었다. 툭, 투둑, 벨리타의 볼과 이마, 눈가에 눈물이 떨어졌다.

벨리타는 눈썹을 늘어트리며 입을 벌렸다. 마르고 앙상한 손가락이 소르니의 눈가를 닦아냈다.

“미안해서요. ……지금 안 가면 나 잔소리해요?”

“……네가 뭔데. 네가 뭐라고 나한테 미안해해. 난…… 나는…….”

“어허, 그만하고 들어가라니까. 진짜 잔소리해요, 나.”

단호한 말에 온화한 낯. 짐짓 으름을 두는 듯 가볍게 미간을 찌푸린다. 가슴 안쪽이 부수어지고 무너져 내린다. 견딜 수 없이 괴롭다. 소르니가 벨리타의 볼을 눌렀다. 힘도 없어 살만 가벼이 모였다.

“……사과 안 할 거야, 나.”

“해도 되는데.”

“고맙다는 말도 안 할 거야.”

“그건 좀 해요.”

“너한테 보답도 안 할 거야.”

“그건 그래도 돼요.”

소르니의 고개가 떨어졌다.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건 가슴이었다. 흐느껴 운다. 어깨가 가파르게 오르고 내렸다. 벨리타가 한숨을 길게 뱉어내고 소르니에게 팔을 벌렸다. 웅크린 몸을 한 아름 껴안았다. 소르니가 벨리타의 등을 움켜쥐었다. 드레스가 손아귀에 가득 쥐여 구겨진다.

아이의 뒤통수와 등을 일정하게 토닥이며 달랜다. 소르니의 등이 움츠러들었다.

“착하지. 뚝 하자, 뚝. 울면 못생겨지잖아요.”

어깨에 기댄 소르니가 작게 웅얼거린다.

“……진짜?”

벨리타가 푸스스, 작게 웃었다. 귀엽게 군다. 정말 못생겨 보이나 싶어 고개도 들지 않고 등만 꼭 쥔다. 소르니의 등에 두른 팔을 힘주어 당겼다. 웅크린 몸이 굳는다.

“아니, 예뻐.”

적당히 달랬으니 쉬게 두어야겠다, 싶었는데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잭슨과 오웬이 잔뜩 긴장한 채였다.

잭슨이 뭐하는 짓이냐 걸어오려고 하는 걸 오웬이 붙잡아 도로 집무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무엄하다며 짜증이란 짜증을 죄다 내는 잭슨의 입을 틀어막았다.

오웬은 벨리타를 허탈하게 바라봤다. 문손잡이를 쥐어 다시 들어간다.

스르르 문이 닫히며 오웬이 고개만 빼꼼 내밀어 입을 벙끗댄다.

‘하던 거 해, 하던 거.’

문이 닫혔다. 문 너머로 잭슨의 사나운 고함 소리가 울렸다. 오웬이 뜯어말리는 소리도 났다.

벨리타는 멀뚱하게 눈만 끔뻑거렸다. 정신없어서 몰랐는데 서로를 얼싸안고 복도에서 널브러져 있으니 누가 봐도 오해할 상황이기는 했다.

소르니의 얼굴이 새빨갛게 붉어진다. 놓칠세라 콱 쥐고 있던 손을 놓고 벌떡 일어난다.

여전히 바닥에 앉아 있는 벨리타를 내려다본 소르니가 입을 꾹 다물었다. 치맛자락을 쥐어 꾹꾹 밀어낸다. 천장을 보았다가 창문 너머로 고개를 돌렸다가, 바닥까지 쳐다본 소르니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전하께 말 잘 전해드려.”

훽, 돌아서서 가 버린다. 벨리타는 헛웃음을 지었다. 품에 안겨서 엉엉 울더니 부끄러운 줄은 아나 보다.

소르니가 저 멀리까지 사라져서야 몸을 일으켰다. 애 달래 주고 나니 피곤해서 몸이 눅진눅진하지만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벨리타는 바닥에 굴러 먼지가 묻은 드레스를 탈탈 털어내곤 집무실로 돌아갔다.

잔뜩 토라진 잭슨이 뚜하게 턱을 괴고 고개를 돌렸으며 오웬은 은은한 미소로 벨리타를 반겼다.

오웬은 심히 감탄했다. 황태자를 길들인 조련 왕이 드디어 공녀까지 길들였다고. 독까지 먹인 적을 끌어안고 뒹구는 배포까지 보여줬다는 점을 높게 샀다. 기립 박수까지 쳐 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벨리타는 감탄하는 오웬을 보고 질색했지만 말이다.

잭슨은 용서할 수 없는 죄인과 부대낀 것도 어이가 없는데 다정하게 끌어안고 있는 모습을 보니 배알이 꼴렸다. 집착 덩어리는 잔뜩 심술이 나 있었다. 벨리타가 오웬에게 문 앞에서 기다려 달라는 말을 하며 내보내는 모습을 힐끗 보고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지만 못 본 체했다. 달래 주길 바랐다.

기대와 다르게 벨리타는 소파에 앉아 앞에 놓인 소파를 가리켰다. 잭슨이 한쪽 눈썹을 올렸다.

“할 말이 있으니까 이리 와서 앉아.”

아. 애써 외면하고 눈 돌렸던 문제였다. 잭슨은 직감했다. 말을 돌릴까, 내쫓을까. 회피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지만 직면하고 싶지 않았다. 벨리타의 말에 순응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싫다, 원하지 않는다, 떼를 써 보았자 벨리타에게 통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안다. 다정하고 너그럽지만 굳센 사람이니까.

입술을 물어뜯었다. 초조했다. 벨리타가 할 말이 짐작이 되어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해결하고자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그래 보았자 소용없다. 잭슨이 아무리 설득하고 매달려도 달라지지 않을 테니까. 잭슨이 벨리타를 조금이라도 덜 아꼈다면 달랐을까. 아니었겠지. 마지못해 화려한 의자에서 일어난 잭슨이 벨리타의 앞에 앉았다.

“무슨 말을 하려거든, 그만둬.”

제발. 하지 마. 잭슨은 주먹을 꽉 쥐었다. 미소를 걸치고 있던 벨리타의 얼굴이 담담하게 굳어간다. 아무리 입을 막으려 들고 말을 돌리려고 해도 벨리타는 꿋꿋이 제 할 말을 마칠 것이다. 잭슨은 이미 알고 있었다. 달아날 수 없다.

“우리 결혼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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