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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65화 (65/150)

65화.

소르니는 덜덜 떨리는 몸을 일으켜 벨리타의 앞에 섰다. 위태로웠다. 파리한 안색과 수척해진 몸이 예사롭지 않았다. 벨리타는 주춤, 뒤로 물러났다가 소르니의 팔을 붙들었다. 소르니가 기운 없이 휘청거렸다. 밥도 먹지 못하고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한 듯했다.

“왜 이러고 있어요.”

“……놔. 내가 우습니?”

정도껏 불쌍해 보여야 우습기라도 하지. 표독만이 남은 소르니가 입술을 짓씹었다. 바짝 마른 입술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벨리타의 손도 치워낼 힘도 남지 않아 헐떡였다. 사나운 시선에서 원망과 힐책이 가득했다.

그 눈길에 벨리타는 입을 열지 못했다. 이 아이를 이렇게 만든 건, 궁지에 몰아넣은 건 벨리타였다.

헛된 생각으로 잭슨을 꼬드기지 않았더라면, 소르니는 이 지경까지 망가질 일이 없었을 거다. 벨리타는 가슴 안쪽이 서늘하게 차가워지는 감각을 느꼈다.

“네게 독을 먹인 거, 나란다. 전하께 그만두자 말하기만 했어도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거야.”

“만나려고 해도 만나지 못했는데, 그게 내 탓이라고요?”

소르니가 헛웃음을 지었다. 모든 것을 놓아버린 허탈함이어서 벨리타는 말꼬리를 잡고 쏘아붙이지 못했다. 이대로 쓰러질까 겁나기도 했다.

부스러지는 웃음을 토해내던 소르니가 돌연 벨리타의 팔을 밀쳐내며 벽으로 넘어트렸다. 콰당, 꽤나 큰 소리가 났지만 벨리타는 크게 다치지 않았다. 소르니의 힘이 약한 탓이다.

먹지도, 자지도, 쉬지도 못해 지쳐버린 몸이 힘을 낼 리 없다. 벨리타의 속에서 울컥, 분노와도 같은 감정들이 치솟았다.

악당 아니었어?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을 방해하는 악랄하고 나쁜 캐릭터 아니었냐고. 악녀라면 우악스럽게 머리채라도 잡고 몸싸움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이렇게 약해 빠져서 머리채는 잡을 수 있겠어?

자고로 악녀라면 김치로 싸다구를 날리고 돈다발로 왼쪽 오른쪽 뺨 후려쳐 줘야 하지 않느냔 말이다. 벨리타가 일어날 생각은 하지 않고 주저앉은 채 소르니를 올려다보았다.

“네가 진즉 말했으면, 좋았잖니. 난 아직도 쓸모가 있는데……. 버려지기엔 이른데, 이용할 수 있는 곳이 많잖아.”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철저히 스스로의 선택을 배제한 단어들. 입 안까지 차오른 질문들이 너무도 많아 온데 뒤섞였다.

소르니가 겪게 될 일이 대체 무엇이기에 귀한 신분으로 집무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걸까. 아직 자신이 쓸모 있다고, 이용당할 수 있다고 읊조리는 이유가 뭘까.

물어봐서 어쩔 건데? 수습할 깜냥이나 되겠어? 스스로가 불러온 사태였다.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시선이 흔들린다.

소르니가 투박하게 입가에 흘러내리는 피를 닦아냈다. 풀린 눈이 벨리타를 향하고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풀어 헤쳐진 머리가 빛을 받아 핏물처럼 흘렀다. 볼과 이마, 목 언저리까지 덕지덕지 달라붙은 머리카락이 검붉은 피와 다름없었다.

“날 치워버리려는 생각도 않고 2황자를 끌어내렸을 텐데…….”

덜덜, 잘게 떨리는 손등에 피가 뭉개졌다. 물기 없는 낯에 울음이 번진다. 바짝 마른 눈은 물기가 없었음에도 울고 있었다. 한쪽만 겨우 올린 입꼬리마저 가늘게 흔들렸다. 기력이 쇠해 휘청거릴 때마다 먼지가 가득 들러붙은 치마가 너풀댄다.

“기분 썩 좋겠구나. 널 죽이려던 계집이 예순 넘은 왕자의 노리개로 평생을 산다는데, 통쾌하지 않니?”

통쾌하지 않다. 유쾌하지도 않았다. 벌을 받았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과한 처사 아닌가.

벨리타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도 소르니를 비웃는 것밖에 되지 않다. 피해가 없기를 바랐다. 괘씸하고 미운 감정이 들었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팔려 나가길 바란 적 없었다. 죽음보다 더한 벌이었다.

독을 먹인 건 화가 나지만 결론적으로 딸과 닿을 수 있었고 목표를 확실히 정할 수 있게 되었다. 타인은 모르겠지만 벨리타로서는 결코 손해 본 일은 아니었다. 소르니가 궁지에 몰려 위기인 지금 상황이 정치에 필요한 수단이었다고 해도 용납되지 않는다. 딸보다 어린 나이의 아이가 그런 꼴이 되는 걸 어떻게 두고 볼 수 있나.

잘되었다며 비웃을 수 있나. 상상만 해도 역겨운 일이다. 무엇보다 뱃속이 차갑게 식고 타들어가게 만드는 건.

“내 쓰임은 이제 늙은이의 장난감이지. 그 뒤엔 또 뭐가 되려나. 가축? 그쯤 될까.”

모든 걸 놓아버린 듯 태연자약해진 소르니의 태도였다. 차라리 화를 내거나 서럽게 울지. 통곡을 하는 낯으로 흘러내리는 드레스의 옷자락을 정돈했다. 자신을 완벽히 타자화시켜 버리는 것도, 스스로의 선택과 기분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 중얼거리는 꼴이 기괴했다. 수단으로서 스스로를 가두어 버렸나.

정말 도구와 다를 게 뭐가 있어. 벨리타는 비슷한 상황을 여럿 보았다. 친밀하게 지냈던 친구들이 결혼 후 아이를 낳고 가볍게 뱉어내던 하소연과 다름없었다. 행복해, 아이 키우는 맛에 살아. 애 낳으면 이제 아줌마지, 여자로서는 끝났어. 너무도 쉽게 흘리던 농담이었다. 가정에 제 전부를 위탁하고 아이 하나만 삶의 낙으로 삼던.

벨리타도 물론 행복했다. 자신과 똑 닮은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울고 웃고, 제 아이 하나만을 보며 살았다. 아이가 생기면 새 삶이 생긴다. 청춘이었던, 친구들과 곱게 입은 옷을 자랑하며 길거리를 거닐던 벨리타의 삶은 끝나고 엄마만 남는다.

그래도 벨리타는 불만 없었다. 아이는 제 전부였고 자식을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었다. 건강을 갈아 넣고 감정을 쏟아부으며 키워 낼 욕심이 있었다.

책임지고 싶고 기꺼이 감당하며 품에 끌어안고 싶은 자식이라도 있다. 소르니는? 희망이 될 존재가 있나? 가진 것도, 삶을 바쳐 사랑할 무엇이 있을까. 삶의 재미도, 목표도 사라지면 앓다가 죽어버리는 게 사람이다. 벨리타의 탓이 없다고 할 수도 없었다. 소르니의 유일무이한 삶의 지향점을 빼앗으려 들었으니까.

죄책감과 연민이다. 벨리타는 소르니를 두고 볼 수 없었다. 딸보다 어린 아이, 자신이 거쳐 온 나이와 사랑하는 딸이 거쳐 간 시절의 아이다. 간섭이고 오지랖이다. 알고 있지만. 알고 있어서.

“말 그렇게 하지 마.”

가련히 떨리는 다리를 꼿꼿이 세워 버티고 선 소르니가 감정 담기지 않아 빈 깡통 같은 웃음을 뱉었다. 하, 하하. 처참할 정도의 무력한 웃음이었다.

소르니가 허리를 굽혀가며 힘없이 숙였다가 돌연 고개를 들어 벨리타를 내려다보았다. 살기등등한 분노가 함축되어 있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벨리타는 헛숨을 들이켰다.

“네가 나에게 그런 말을 할 처지가 되니? 네가?”

울분이 가득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벨리타에 듣는 말이 화가 나 미칠 것 같다는 태도였다. 바짝 말라 찢어지는 목을 비집고 목소리가 긁어내렸다. 핏빛 머리카락이 얼굴을 덮고 쏟아진다. 벨리타를 담은 눈이 섬뜩하게 번뜩거렸다.

“나라고 잘한 건 없단다. 그렇다고 너에게 동정을 받을 위치니, 내가? 네가 내 자리를 빼앗으면서 이렇게 되었음은 아니? 네가 네 주제를 알고 첩으로 만족했다면! 네가 허튼 욕심만 부리지 않았더라면 독을 먹을 일도 없었겠지.”

일의 시초는 벨리타가 맞았다. 소르니의 입장에서 벨리타는 악인이었고 기만자였다. 잭슨의 지위를 등에 업고 소르니를 몰아세운 침망이었다. 악녀는 누구지. 소르니가 아닌 벨리타였던가. 가만히 있는 아이를 건드리고 괴롭힌 건 벨리타가 아니던가. 그저 소설 속에 들어온 불쌍한 피해자라고 할 수 있을까.

소르니가 사납게 읊조렸다. 소리를 지르는 듯 목에 핏대가 섰지만 무리한 몸은 큰 소리를 내지 못했다. 위태로운 호흡처럼 가느다랗게 흩어지는 작은 목소리였다.

벨리타는 피할 수 없었다. 높은 파도처럼 남김없이 벨리타를 휩쓸어 가라앉히는 자괴감과 죄책감이 발목을 잡았다.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는 제 마음은 농락하는 위선자의 것과 다름없다.

“나에겐 혼인밖에 없었어. 넌 부유한 가문도, 가족도, 널 따르는 주위 사람들도 있잖니. 남의 것이 그리도 탐이 났어? 왜 하필 나야? 왜 내 것을 빼앗아 가. 가진 것도, 가질 것도 없는 나한테서…….”

격노한 눈에서 물방울이 흘렀다. 감정이 타오른다. 부러워하는 스스로가 수치스럽고 창피해서 빗장에 가두어 잠가 두었던 감정이었다. 빈손으로 태어나 죽을 때까지 빈손으로 살다가 돌아갈 삶. 작은 손에조차 잡혀주는 게 없어 끝내 허공에 버둥거리기만 할 뿐인 비참한 인생.

존재 자체가 무의미하다 세뇌한 아이에게 단 하나의 가능성만 놓아 두어 그를 쫓게 될 수밖에 없었던 악독한 환경에서.

황태자비가 될 수 없다면 쓰레기처럼 처분될 거다. 네가 살아 있을 수 있는 건 황태자비가 되어 가문을 부흥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황후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면 넌 가치 따위 없다.

제 이름보다 더 많이 들어 온 문장들이었다. 속을 끊임없이 할퀴고 긁어내 소르니는 더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텅 빈 껍데기. 곱상하고 예의범절을 철저히 익힌 인형 나부랭이.

잘 만들어진 인형은 잠시 쓰이고 버려지는 운명일 터다. 소르니도 제 처지를 알고 있었고 순응했다. 황후만 된다면 날 겁박할 자들은 없을 거라는 희망으로.

버텼는데.

“나한텐 혼인만이 살길이야. 네가 포기한다고,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말만 하면 되잖니. 넌 어차피 필요 없잖아. 넌 갖고 싶지도 않잖아. 벨리타 파텔. 부탁이라도 할게.”

타오르는 눈에서 물방울이 쏟아졌다. 볼을 스치고 턱 언저리에서 떨어지는 무수한 물방울이 뜨겁다. 극한까지 밀어 넣어진 나락이었다.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다. 공녀로서 고고하게 지켰던 자존심도 사치였다.

제 아래라 낮잡아 누르려 했고 질투심까지 느껴야 했던 적에게 애원하게 되는 스스로가 비참했지만. 소르니는 잘게 경련하는 몸에 애써 힘을 주며 씹어 뱉었다.

“날 살려 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벨리타의 손이 뻗어나갔다. 힘없이 떨리는 소르니의 손목을 잡아 끌어당겼다.

소르니는 속수무책으로 벨리타를 향해 몸이 무너졌다. 먼지가 가득한 치마가 살랑거리며 허공을 떠다니고 장신구가 바닥을 뒹굴었다.

벨리타의 위에 쓰러진 소르니가 고개를 들었다. 마주 닿은 시선 끝에 그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물만 쏟아냈다.

무, 무슨, 소르니가 허약해진 몸을 일으키려 벨리타의 어깨를 밀었다. 등이 들썩인다.

벨리타의 손이 소르니의 양팔을 붙들었다. 달아날 수 없게, 잡아 쥔다. 소르니가 바르작대며 상체를 뒤틀었다.

손목에서 팔뚝으로, 어깨를 쥐며 점차 타고 올라온 손이 소르니의 등에 닿는다. 이윽고 벨리타의 작은 품에 소르니가 무너져 내렸다.

“결혼해. 내가 널 살려 볼게.”

말만 그럴싸하다며 비웃을 일이었다. 네까짓 게 뭘 할 수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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