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며칠 붙어 있더니 거리감을 국 끓여 먹은 오웬이 벨리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연구실에서 치근덕거린 걸로 이야기를 한다면 한 바닥을 채울 거다.
“지금 갈 거야? 데려다 줄까?”
“혼자 가려고 했는데.”
“황태자를 믿어? 난 안 믿어.”
그럴 거면 왜 물어봤어. 어이가 탈출해서 벽난로 속으로 굴러간다.
현재 심리가 얼굴에 다 드러난 벨리타의 어깨를 오웬이 단단히 감싸 안았다. 벨리타의 머리에 이마를 기대 소리 죽여 웃는다. 맞닿은 몸이 잘게 떨렸다.
벨리타가 신경질적으로 오웬의 허리춤을 쿡쿡 찌르니 파드득 허리를 뒤로 물리며 장난스레 미소 지었다. 좋냐. 네가 좋으면 나도 좋다, 그래.
옆에서 들이대며 생글생글 웃는 오웬의 낯짝이 부담스러워서 벨리타가 고개를 돌렸다. 한 번 안기 시작하니 밑도 끝도 없이 몸을 부대껴 오는 탓에, 서서히 거리를 두어야 하나 싶다.
물론 웃음이 만개해서 잇몸이 바짝 마를 정도로 기분 좋기는 하지만. 오웬이 벨리타의 머리에 볼을 기댔다. 중얼, 짧게 주문을 읊어 순간이동 했다.
자신도 데려가 달라며 다가오던 엘라만 덩그러니 남았다. 털썩, 허망하게 주저앉아 버린다. 아가씨 가는 길 내가 빠질 수 없는데……. 자꾸 왜 나만 빼고 그래요.
불쑥, 잭슨의 집무실로 도착했다. 오웬과 나란히 껴안은 채로 도착한 모습에 잭슨이 이를 드러내며 짐승처럼 으르렁댔지만 퉁명스러운 벨리타를 보고 기가 꺾였다. 일주일 이상을 문전박대 한 죄는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오웬의 품에서 벗어난 벨리타가 소파에 앉아 몸을 기댔다. 잭슨이 일어나려는 기색을 보이자 벨리타는 손짓으로 다시 잭슨을 그대로 앉혔다.
조련사다. 조련사야. 속으로 매우 감탄한 오웬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등받이에 파묻힌 벨리타가 다리를 꼬았다. 그저 다리만 꼬았는데도 잘못했다고 빌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왜 나 쫓아냈어?”
설명하려고 했다. 차근차근,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떻게 해결되었는지 이야기해 주려고 했다. 왜 입을 열 수가 없는지. 자신의 대답이 변명 같아 보이는 이유는 왜인지. 벨리타의 팔과 손이 뒤척거릴 때마다 몸이 움찔 떨리는가. 잭슨이 펜을 내려놓고 헛기침을 했다.
“궁내의 사람들을 정리하느라 네가 드나들기 위험해서 막은 거다. 배후도 찾았으니 이제 거리낌 없이 오고 가도 좋아.”
“찾았어요?”
깜짝 놀란 오웬의 질문은 당연하게 무시한 잭슨이 말을 이었다. 무시당한 오웬도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소르니 공녀를 오르트 왕국으로 보낼 예정이다. 넌 공녀가 피해 입길 원하지 않았지만, 배후가 공녀이므로 처벌은 불가피해. 아직 내 최측근 외에는 아무도 모르니 조용히 보낼 예정이다. 네가 원한다면 달리 처벌할 수도 있어.”
소르니였구나. 잭슨을 시해하려다 실패한 게 아니라, 애초부터 나를 노렸구나. 마차에서 했던 대화는, 무얼 위한 거였을까. 괘씸하고 원망스러웠다. 불쌍하다고, 애처롭다고 소르니가 잘 살게 되기를 바랐는데 벨리타의 오만이었다. 벨리타가 욕심을 내고 이기적으로 굴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까.
죽지 않은 게 다행이다. 잭슨의 성향으로 보건대, 배후를 죽이고 가문까지 멸문시키려 들었을 거다. 고작 타국으로 보내는 것에 그치는 건 정말 다행일지도 모른다. 뒤통수를 맞은 불쾌감이 일었지만 그마저도 벨리타의 탓이다. 소르니를 멋대로 동정하고 연민한 잘못이었다. 자신만이 도울 수 있다는 말은 자신이 범인이어서였다.
그것도 모르고. 벨리타는 스스로의 멍청함이 미웠다. 소르니도 소르니 나름대로의 간절한 이유가 있어 벨리타를 해쳤겠지만, 벨리타가 이해해 줄 필요는 없다. 소르니를 죽여 달라고 잭슨에게 청해도 욕할 사람도 없다. 그럼에도 왜 미워할 수가 없나. 같잖은 동질감과 동정으로 자신이 우위에 있다고 착각했나 보다.
허탈하게 웃었다. 원하지도 않는 방향으로 일이 어긋나는 게 화가 난다. 어떡하지. 소르니가 가 버리면 잭슨과 꼼짝없이 결혼해야 할지도 모른다. 와중에도 제 안위만 생각하는 제 꼴이 역겨웠다. 벨리타가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잭슨과 오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벨리타, 괜찮…….”
“나 바람 좀 쐬고 올게.”
도저히 둘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못된 속내가 들통날까 봐 두려웠고 스스로가 거북해서 잠시라도 달아나고 싶었다. 벨리타가 다급히 일어났다.
붙잡으려는 오웬의 손이 허공에 머물렀다. 가려진 손 틈으로 드러난 벨리타의 낯이 어두워서 잡을 수 없었다.
집무실을 뛰어나가 사라진 벨리타를 뒤로한 채, 오웬이 소파에 걸터앉았다. 여유롭고 나태한 태도였다. 잭슨은 다시 펜을 쥐어 오웬과 대화할 생각이 일절 없음을 티 냈지만 오웬은 가만두지 않았다. 가늘게 접힌 노란빛의 눈이 잭슨을 집요히 좇았다.
“태자궁에 피바람 좀 불었겠어요. 배후는 어떻게 잡았죠? 범인에게 들었어요?”
실제로도 피가 낭자했다. 황후의 사람들과 체르핀가의 사람들이 태자궁에서 일하며 그들의 눈과 귀가 되어 주었다는 것쯤은 알았다. 언젠가 갈아치워야겠다고 생각해 가만두었다가 때가 되어 솎아냈을 뿐이다. 그때가 며칠 전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목이 날아갔고 빈자리는 자신의 사람들로 채웠다.
잭슨은 대꾸하지 않았다. 오웬은 잭슨의 답이 돌아오지 않자 손가락을 휘둘렀다. 책상에 쌓여 있던 문서들이 하나씩 접히며 종이비행기가 되어 이윽고 집무실을 가르며 날아다닌다. 떠다니는 비행기가 콕콕, 잭슨을 찌른다. 잭슨의 기세가 흉흉해졌다. 열세 장의 문서가 접혀 잭슨을 일제히 눌러대자 결국 펜이 책상에 쿵, 내던져졌다.
“미쳤나?”
열이 잔뜩 오른 잭슨이 품에서 단검을 빼 들었다. 당장에라도 오웬의 머리를 꿰뚫을 듯 겨냥하고 있었다.
“미친 건 내 제자고요. 대답이나 해 줘요. 어떻게 알아냈죠?”
오웬이 손가락이 단검을 가리켰다. 단검이 잭슨의 손에서 억지로 빠져나와 품속으로 되돌아갔다. 순식간에 텅 빈 손아귀를 꽉 쥔다. 쾅, 책상을 내리치고 이를 뿌득 갈았다.
“난 네가 진심으로 싫다.”
“유감. 난 우리 전하 좋은데. 보상받지 못하는 짝사랑은 슬프네요~”
“진짜 싫다, 너.”
잇새로 새어 나오는 분노에도 대수롭지 않은 태도였다. 어차피 싸우면 오웬이 이긴다. 뻔뻔한 태도로 소파에 늘어지게 앉은 오웬이 대답을 채근했다.
뻔뻔하고 역겨운 녀석. 잭슨은 신경질 섞인 말투로 간략하게 설명했다. 오웬과 말 섞고 싶지도 않아 줄여 말한 거다.
“증거가 없잖나.”
짧은 설명에도 오웬은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증거가 없으니 되려 소르니에게 뒤집어씌워도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소르니는 증거가 없음을 이용하려 했지만, 그 간악한 계획은 소르니를 겨냥했다.
잭슨은 이미 소르니가 남겨 놓은 2황자의 흔적도 찾아냈다. 범인을 고문하고 철저히 흔적을 따라간 결과였다. 데이비드와 조슈아가 땀나게 뛰어 봤자 증인도, 모든 흔적들도 잭슨의 아래에 있었다.
손익을 따져 보았을 때, 체르핀 공작가를 치워 버리는 게 이득이다. 그들이 황좌의 권력을 탐하려 입맛을 다시는 걸 모를 리 없다.
기회가 되는 지금 2황자의 편에도 붙지 못하도록 치워냄이 옳았다. 체르핀의 도움 없이도 2황자는 무너트릴 수 있다. 정황이 소르니를 가리켰지만 증거가 없어 2황자의 소행이라 결론을 낼 수밖에 없었는데 제 꾀에 자기가 걸려 목을 조른 거다.
영민한 체해도 그뿐이다. 배후는 소르니임을 알았다. 사건에 대해 파헤칠수록 허술해서 웃음만 나왔다. 그와 동시에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견뎌야 했다. 감히. 네까짓 게, 내 것에.
처우를 깊게 고민했다. 격분한 탓에 체르핀 공작가에 책임을 물어 황태자 시해 모의 혐의로 멸문시키고 싶은 충동밖에 들지 않았다.
내 사람에게 죄를 지었으면 차라리 잡지 못하게 완벽히 해낼 것이지. 이리 허술하고 어설프게 해, 더한 화를 일으켰다. 죽여도 시원치 않다.
소르니의 처지를 모르지 않는다. 궁지에 몰려 무어라도 해내기 위해 독이 바짝 올랐음을 안다. 다만 소르니는 황후로서 자라온 만큼 좁은 세상을 살았다. 그 탓이다. 잭슨의 손아귀에 뒷덜미가 잡힌 건.
죽이지 말아 달라, 피해를 받길 원하지 않는다는 벨리타의 바람이었기에 죽이지는 못했다. 죽여서 치우면 깔끔하고 좋지 않나. 소르니를 눈감아 주고 타국으로 살려 보내는 것까지가 최대한의 관용이었다. 그 이후의 삶이 구렁텅이에 빠져 고통의 나날이어도 살려 두었으니 바람을 들어주지 못한 것도 아니다.
증거가 없다, 라는 짧은 대답 속에 많은 뜻을 읽어낸 오웬이 비틀어 웃었다. 오웬은 접어서 날렸던 문서들을 깔끔하게 펴내 제자리에 돌려놓으며 질문을 더했다. 변변치 않은 왕국에 미혼인 왕족이라곤 짜리몽땅하고 탐욕스러운 나이 많은 왕자뿐이다.
“그래서, 공녀는 그 늙다리 왕자에게 팔려 가요?”
“숨만 붙여 놓으면 죽은 것도 아니잖나.”
“그것도 그렇죠. 죽은 거나 다름없겠지만.”
궁금했던 부분들이 해결되니 심드렁해졌다. 소르니에 대한 분노와 별개로 그에 대한 처우는 오웬이 간섭할 부분이 아니었다. 그저 스승일 뿐이다. 가족도 아니고, 연인도 아니다.
오웬은 괜히 심통이 나 인상을 찌푸렸다. 벨리타가 잭슨에게 결혼 취소 이야기를 꺼내어 빨리 자유로워지면 좋겠다, 싶었다.
“그럼 공녀는 지금 어디에 있어요, 이미 왕국에 갔나?”
“여기 있다.”
뭐라고요? 소파와 한 몸이 되어가던 오웬이 허리를 세웠다. 지하에 있는 감옥에 처박아 놓지 않았을 테고, 귀빈처럼 모셔 두지도 않았을 거다. 그렇다면 대체 어디 있다는 말인가? 오웬이 온몸으로 해명을 요구했다. 귀찮음을 대놓고 드러낸 잭슨이 짧게 대꾸했다.
“집무실 앞에서 무릎 꿇고 빌고 있지.”
“진심이에요? 문밖으로 나간 게 누군지 기억은 나요?”
벨리타다. 집무실 앞에는 제발 오르트 왕국에 보내지 말아 달라고 빌고 있는 소르니가 있다. 바람을 쐬겠다며 나간 벨리타와 소르니가 마주칠 확률은 말해 뭐할까. 이미 머리채 뜯고 싸우고 있는 건 아닐는지. 순간이동으로 곧장 집무실에 와 까맣게 몰랐다.
오웬이 하얗게 질려서 벌떡 일어났다. 잭슨도 그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한 듯 오웬을 따라 일어났다. 둘은 나란히 문을 바라보았다. 기이하리만치 고요했다.
*
둘의 불안대로 소르니와 벨리타는 마주쳤다. 비틀대며 문을 열고 나온 벨리타의 앞에 소르니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탐스러웠던 붉은 머리카락이 푸석해져 있고 영롱하게 빛났던 피부가 하얗게 질렸다. 분명 풍성하고 아름다웠을 드레스는 너저분했다.
새액, 색, 가느다란 호흡만을 뱉어내던 소르니가 고개를 들었다.
“…….”
빛바랜 낯이 한없이 일그러졌다. 격노에 찬 반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