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잭슨이 황제가 되는 것도, 소르니가 바라는 대로 황후가 되는 것도.
참견하지 말고 가만히 있자.
마차가 움직임을 멈췄다. 창문 너머를 보니 벌써 타운하우스였다. 빠르기도 하다. 꾸벅, 고개를 숙이곤 마차에서 내렸다. 소르니는 별다른 대꾸도 하지 않았다.
엘라가 뛰쳐나와 벨리타에게 안겼다. 힘에 부쳐 몸이 휘청거리자 엘라가 우는 소리를 낸다. 뒤이어 데이비드와 조슈아, 오웬이 따라 나온다. 무심코 출발하려는 마차를 돌아보았다.
무감하게 벨리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차 안에 홀로 남은 소르니. 고적해 보였다. 이 느낌마저도 참견일까.
매끄럽게 출발하여 멀어지는 마차를 지켜보았다. 비집고 올라오는 기묘한 감정을 억누르며 마중 나온 이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엘라가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눈물 즙을 짜고 있었다.
“하다하다 이젠 독까지 주워 드십니까, 누님.”
“영애, 얼마나 걱정했는지요. 서 계셔도 괜찮으신가요? 제가 안아드려도 될까요?”
“날이 추워. 들어가자.”
북적북적하다. 살갑고 다정하다. 곡소리를 내며 우는 엘라를 끌어안았다. 핀잔을 던지지만 걱정이 묻어나는 데이비드의 손을 잡았다. 사심을 은근슬쩍 섞으며 과하게 걱정하는 조슈아의 부축도 받았다. 추운 겨울인 탓에 외투를 덮어주는 오웬의 앞을 걸었다.
벨리타를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다. 언제 이렇게 되었을까.
벨리타가 모았지만 벨리타를 위해 모인 건 아니었다. 벨리타의 사람들은 아니다. 고생한 벨리타의 앞에 저택 문이 활짝 열렸다. 쓰게 웃으며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따뜻했다.
*
“거절한다.”
태자궁의 응접실에서 소르니는 거절당했다. 쉬이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음에도 잭슨은 응하지 않았다. 2황자를 치워내고 순조롭게 황제가 되는 것보다 벨리타가 더 중요한가? 걔가 뭐기에.
괴물이 사람인 체해 보았자 우습기만 하다. 전쟁터에서 칼을 휘두르며 즐거워하고 황후와 관련된 첩자들을 죄다 도륙하며 비웃기나 하던 살인자다.
사랑 하나 한다고 변할까. 감정놀음 한다고 괴물이 달리 괴물일까. 같잖다. 소르니는 이죽이려는 입꼬리를 겨우 내렸다. 소르니가 돕지 않더라도 집요하게 파낸다면 배후가 2황자라는 증거를 찾을 수 있을 터다. 혹은 날조해서 2황자를 끌어내릴 수도 있다. 그 과정에서 황태자 홀로 해내는 것과 힘 있는 공작가가 합세해 돕는 것의 차이는 크다.
흩뿌려질 피의 양과, 감당해야 할 손해들을 쉽게 줄일 수 있다. 혼인으로 엮여 한배를 탄 동업자로서 흔쾌히 이루어 줄 권력과 힘이 있었다. 으레 이용해야 할 힘이었다. 고작 연심으로 걷어찰 쉬운 것이 아니다. 감정에 치우친 꼴이라니 웃기지. 그 생떼로 인해 몇의 목숨이 날아갈지 모르는데.
잭슨을 도우면 빚을 지게 하고 제 가문의 위상을 공고히 하게 된다. 소르니가 결코 손해 볼 제안은 아니다. 다만 더 채근해 보았자 득이 없으리라 판단한 소르니가 나서려는 순간, 하녀가 들어와 일렀다.
벨리타가 깨어났노라고.
소름이 끼쳤다. 독을 섭취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벌써 일어났다는 사실에, 소식을 듣고 난 뒤의 잭슨의 모습에. 오래 보았지만 잭슨의 그런 낯은 본 적 없었다. 역겹기까지 했다. 손님이 버젓이 앞에 앉아 있음에도 가쁘게 달려 나간 잭슨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헛웃음이 났다.
돌아가려는 길에 벨리타를 발견했다. 쌈닭이라 결론을 내렸던 탓에 마차 안에서 말다툼이 일 거라 예상했지만 아니었다. 독 덕분에 황태자비의 자리를 포기했다.
소르니로서는 어찌 반기지 않으랴. 독살을 사주한 것도 소르니였고 잭슨에게 거래를 제안해 계약으로 다져 놓을 계획도 견고했다. 벨리타가 죽어도 손해 볼 게 없었다.
정황은 2황자를 향했고 소르니는 그저 잭슨을 위해 도우러 나선 마음 넓은 약혼자일 뿐이다. 소르니가 독살을 사주했다는 의심은 할 수 있지만 그뿐이다.
소르니는 공작가의 여식이고 황태자의 약혼녀이며 대외적으로는 후작가를 공격하려고 하는 뒷조사 따위나 하고 있었으니까. 그새 살해를 모의했으리라 생각하지 못한다.
벨리타가 약혼을 포기한다는 소식까지 직접 접하니 이리 반가울 데가 없었다. 죽어도 괜찮다 생각했는데 죽지 않았으니 마음까지 편하다. 소르니는 벨리타와 굳이 척을 지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만 잠시였다. 벨리타에게 몰리는 사람들을 보니 속이 치밀었다. 다 가졌음에도 남의 것이 탐이 났니. 그리 욕심이 많으면 어떡해. 손을 더럽혀가며 벨리타를 해칠 생각은 없다. 좋은 가문, 넘치게 받는 사랑, 고운 외모, 빼앗을 생각 없다. 소르니는 제 것만 지키면 되니까.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에 급급했다.
황태자비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았다는 소식만 들리면, 더는 마주칠 일 없는 사람이다. 더 만나고 싶지 않다. 비참해지고 샘이 나는 자신이 우스꽝스러워서. 피하고 싶었다. 마차는 바쁘게 굴러갔다.
벨리타와 만나고 일주일 뒤, 체르핀 공작은 소르니의 다리를 부러트렸다. 신관을 데려와 치료하고 늑골을 부러트렸으며 머리를 찢었다. 신관 덕에 흉터 없이 치료했다. 학대의 흔적도 남지 않았다. 이유도 모르고 그저 고통스럽게 얻어맞고 증거인멸을 당하길 수차례, 씨근덕거리는 체르핀 공작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황태자가 널 오르트국의 왕자와 결혼시키겠다고 연락이 왔다! 이게 어찌 된 일이야!”
청천벽력이다. 세르트제 제국에서 멀리 떨어진 오르트 왕국은 살이 에일 듯이 추운 데다가 돈만 많은 변변치 않은 국가였다.
야만국으로 유명한 오르트 왕국. 잭슨이 날 치워버리려고. 눈엣가시인 날 보내버리려고!
분노에 차 손이 떨렸다. 되지도 않는 작은 왕국으로 혼인시켜 이 제국에 발도 디디지 못하게 하려는 속셈이다. 살해 모의가 들통이 났나.
차라리 죽이지. 나이 예순을 먹은 역겨운 왕자와 무얼 시켜? 보나 마나 욕정에 찌든 무거운 몸을 이끌어 소르니를 짓누르고 원하는 대로 휘두를 거다. 죽지도 못하게 벌을 주기에는 더 없이 완벽하다. 그래서 역겨웠다. 치욕스럽고 화가 났다. 몸이 떨린다. 헛구역질이 났다. 피가 거꾸로 솟는 감각이었다.
소르니가 고개를 들었다. 간절함이 어렸다.
공작님만 수락하지 않으면 된다. 날 팔아버리지 않으면 돼.
“네가 황태자비에 오르지 못할 거라면, 오르트 왕국으로 보내도 괜찮을 성싶긴 하다만…….”
심장이 떨어진다. 피가 모조리 빠져나가 텅 비어 버린다. 그래, 공작은 그런 사람이었지. 혼외 자식은 도구로밖에 보지 않는 무뢰한. 무얼 바라 공작 따위에게……. 저 머저리에게 희망을 품은 제 잘못이다. 번들거리며 벌어지는 잇새가 토악질 나오게 혐오스러워 눈을 질끈 감았다.
잭슨에게 가야 한다. 머리를 조아리며 빌든, 거래를 하든 무어라도 해야 한다. 오르트 왕국의 왕자와 소르니가 결혼해도 제국에 돌아오는 이득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정말 소르니를 치워버리기 위해 보내는 거다. 공작은 돈과 무얼 얻었을까. 자신을 먼 타국으로 보냄으로써 받는 이득은 무엇인가.
신력에 의해 억지로 치료된 몸을 이끌고 뛰쳐나갔다. 먼발치에서 체르핀 공작의 호통 소리가 들리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잭슨에게 빌어야 한다. 하다못해 벨리타에게 잭슨을 말려달라며 애원해야 한다. 나락까지 곤두박질칠 스스로의 미래가 두려워 그저 막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기사들이 뒤이어 소르니를 쫓아 달린다. 잡히면 모든 게 끝이다. 속절없이 타국으로 떠나야 한다. 높은 구두를 손에 쥐고 달음질에 박차를 가했다. 모래와 돌들이 발에 박혀 피가 맺힌다. 아프다는 감각마저 지워진 지 오래였다. 너풀거리며 다리에 들러붙는 치마를 들춰 쥐었다. 붉게 늘어트린 머리카락이 흐트러진다.
폐에 가득 들어찬 숨이 버겁다. 마구간으로 달렸다. 빠르게 스쳐 지나는 하녀들이 입을 모아 수군댄다. 찬바람에 코가 붉게 얼고 발끝이 파랗게 질렸다.
마구간에서 막 꺼내지는 마차에 몸을 욱여넣었다. 공작의 정실부인을 위한 마차였다. 상관없다. 그따위 것 신경 쓸 때가 아니다.
태자궁으로! 소르니의 고함과 함께 마차가 달렸다. 마차의 뒤로 기사들이 뒤쫓아 달려왔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
일주일간 태자궁을 찾아가지 못했다. 잭슨에게 말을 꺼내야 하는데 만나러 가는 족족 거절당한 탓이다. 그 덕분에 벨리타는 한데 모인 아이들에게 잭슨과의 이야기를 해줄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가 자신을 너무 좋아했고, 자신도 좋아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혼인하려고 했다. 독을 먹고 나니 정신이 들어서 취소하려고 한다.
허술하다 못해 엉성한 거짓말이었다. 벨리타를 알고 있는 눈치 빠른 꼬맹이들이 넘어가 줄 리 없었다. 실제로도 그랬다. 엘라, 데이비드, 조슈아는 벨리타의 거짓말을 믿지 않았다. 다른 이유가 있으리라 짐작하고 추리했다.
이 셋의 추리는 하나로 귀결되었는데, 벨리타라면 황후 한 번쯤은 탐낼 만도 하다, 라는 거였다. 워낙에 예상치 못하게 튀는 사람이니까.
미치지 않았다는 것쯤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미쳤다는 핑계로 온갖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이는 터라 황태자비가 되겠다는 소문이 났을 때에도 그러려니 했을 뿐이었다. 신력도, 마력도 가진 벨리타가 권력까지 잡으면 힘의 완성 아니겠는가. 물론 모든 전말을 알고 있는 오웬은 고개만 끄덕거리며 듣기만 했다.
독까지 먹어가며 권력을 잡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으리라 짐작한 셋은 너무 잘됐다며 화기애애했다.
데이비드는 곧장 ‘누님 결혼 안 하신댑니다!!!’ 라는 편지까지 써서 영지로 보냈다. 라빌과 테일러도 이 상황을 알고 있느냐 물으니 잔뜩 열이 받아 수도까지 올라오려는 걸 뜯어말렸다고 했다. 공작가에 총을 갈기고 폭탄을 던지려고 소매를 걷어붙이려는 라빌에게 하지 말아 달라 애원까지 했다고.
워낙 표정의 변화가 없어서 모든 일에 덤덤할 줄 알았는데. 벨리타 같아도 제 딸이 독 먹고 쓰러졌다고 하면 길길이 날뛰었을 터였다. 부모 마음 다 똑같지 뭐.
벨리타는 못 했던 수업을 일주일간 속성으로 들어야 했다. 오웬의 연구실에 온종일 틀어박혀 마력을 다루는 법을 터득했다. 간간이 문 너머로 벨리타의 괴성이 울려 퍼진 것 외에는 평화로웠다.
정작 독을 먹은 사람은 평온했고, 주변 사람들이 눈에 불을 켜고 배후 색출에 열을 올렸다. 잭슨도 매한가지였다.
그로부터 3일 후, 잭슨에게서 편지가 도착했다. 할 말이 많으니 태자궁에 방문하라는 내용이었다. 그간 찾아가도 문전박대나 하더니, 이제 와서.
편지를 구겼다. 둥글게 굴려 벽난로에 던졌더니 쏙 들어갔다. 활활 잘도 타오른다. 오웬과 엘라가 손뼉을 쳐줬다. 아이고 부끄럽네요잉, 벨리타가 헤헤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