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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62화 (62/150)
  • 62화.

    말도 꺼내지 못했지만 엄연한 거절이었다. 대책이 필요하다. 가족부터 만난 후, 이야기를 마치고 잭슨에게 다시 찾아와야겠다.

    벨리타는 멋쩍게 치맛자락을 쥐었다. 원래대로, 자신만 빠지면 모두가 행복해질 텐데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벨리타가 복도를 거닐었다.

    몇 번 드나든 곳이라고 나가는 길만큼은 머리에 익었다. 그 덕에 벨리타는 쉽게 태자궁의 출입구로 갈 수 있었다. 출입구에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은 많아졌다. 벨리타의 차림은 잠옷치고는 화려하지만 궁내에 방문한 사람들보다는 허름하고 초라했다. 스치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옷자락을 쥐었다가 놓는다. 알까 보냐.

    어차피 떠나면 존재 자체도 잊을 엑스트라다. 벨리타는 당당하게 걸어 성문의 문턱을 넘으려고 했다.

    “파텔.”

    무시했다.

    “파텔.”

    그냥 걸었다. 자신을 부르는지도 몰랐다. 벨리타가 성문을 지나쳐 마차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늘어진 마차 행렬에 자신이 타고 온 마차도 찾지 못했다. 벨리타가 독을 먹고 쓰러진 날, 엘라가 타고 가 버렸다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던 탓이다.

    마차들을 가늘게 뜬 눈으로 훑어보는 찰나, 시야에 붉은 머리가 들어왔다.

    “그리 불렀는데도 아는 척도 안 하네요. 무안하게 말이에요.”

    “나 불렀어요?”

    벨리타는 파텔이라는 이름은 익숙하지 않았던 탓에 외침도 알아듣지 못했다. 벨리타라고 불렀다면 곧장 뒤돌아봤을 터였다.

    태연한 벨리타의 대답에 소르니는 미간을 찌푸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죽거리는 모양새 같기도 했다. 화려하게 머리를 장식한 소르니가 부채 끝으로 멀리 놓인 마차를 가리켰다.

    뭐 어쩌라고. 벨리타의 낯에 그런 생각이 드러났다. 소르니가 헛웃음을 짓는다.

    마차가 달려와 소르니의 앞에 선다. 호화롭고 보석이 박힌 마차였다. 감탄스러웠다. 고작 타고 다니는 거에 돈을 그렇게 들이붓는구나, 하고.

    호위 기사가 마차의 문을 열었다. 먼저 마차에 올라앉은 소르니가 살갑게 웃었다.

    “데려다 줄게요. 할 이야기도 있고요.”

    자신이 타고 온 마차가 있으리라 철석같이 믿고 있던 벨리타는 짧은 새에 갈등했다. 타고 갈까, 제 마차를 타고 갈까. 소르니와 마주하기도 껄끄럽지만, 며칠 움직이지 못해 무리한 다리는 후들거리고 소문의 여인들이 마주하고 있으니 쏠리는 시선도 부담스럽다. 제 마차는 언제 찾을지도 모르겠고.

    벨리타는 에라 모르겠다, 소르니의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의 문이 닫히자 주저 없이 출발한다. 뒤늦게 벨리타를 배웅해 주러 나온 노타가 허망하게 마차를 바라보았다.

    마차는 흔들림 없이 편안하게 나아갔다. 벨리타는 깨달았다. 비싼 건 비싼 값을 한다는 걸. 돈을 쓸 만하다. 벨리타가 타고 다니는 마차도 여간 값이 나가는 게 아니었지만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법이었다.

    둘만 남게 되자 소르니는 찍찍, 반말을 뱉어냈다. 싸가지가 바가지였다.

    “독을 먹었다면서. 회복이 빠르네.”

    예의 밥 말아 먹어 깍두기까지 얹어 잡수신 소르니를 꼬나보던 벨리타가 등받이에 기댔다. 폭신하고 말랑한 게 편했다. 이거 어디 거 일까, 데이비드에게 조르면 바꾸어 주려나.

    “그렇게 됐네요. 범인도 잡았고 배후만 캐내면 된다던데.”

    “내 도움 없이는 못 찾을 거야.”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벨리타는 미묘한 발언이 신경 쓰여 눈살을 찌푸렸다.

    소르니는 즐거워 보였다. 부채를 펼쳐 가린 잇새로 웃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좋아하는 꼴이 의심스럽다. 연적이 불행을 겪어 우스운 건지, 자신이 한 일이라 기뻐하는 건지 짐작할 수 없었다. 이런 눈치 싸움은 별로였다.

    “왜요?”

    “증거가 없으니까.”

    부채를 접어 다소곳하게 무릎 위에 얹는다. 화려한 부채는 접어서도 값비싸 보였다.

    증거가 없다는 건 안다. 하지만 소르니는 무엇을 알고, 무슨 증거를 갖고 있기에 자신 없으면 배후를 찾지 못한다 장담하는 걸까. 황태자도, 조슈아도, 데이비드도 눈에 불을 켜고 찾았음에도 찾지 못한 실마리였다.

    머릿속이 차분해졌다. 이 상황에서 섣불리 말을 꺼내 보았자 벨리타의 손해였다. 아는 것이 없는 만큼 벨리타는 약자였고 맹수 앞에 쥐 꼴이었다. 헛소리하면 본전도 찾지 못한다. 무슨 꿍꿍이를 갖고 있는지 예상도 못 하겠다.

    “증거가 없으면 만들면 되는걸. 무얼 그리 고민하니.”

    “……?”

    “내가 전하를 도우면 2황자를 치워낼 수 있어. 이미 그럴 열쇠도 지니고 있고. 넌 그저 도구가 될 뿐이란다.”

    증거가 없으니 만들어 누명을 씌운다. 방아쇠는 벨리타였고 그 이후는 권력자들의 술수대로 풀릴 사건이 되어 버렸다. 더럽고 추악한 방법이다.

    벨리타의 미간이 속절없이 찌푸려졌다. 솔직하다 못해 적나라한 벨리타의 반응이 썩 재미있어 보였다.

    소르니는 웃음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웃는 얼굴도 고와서 짜증 난다. 예쁘지나 말지.

    “그러니 도구로서 일을 그르치지 말고 물러나. 정치 싸움도 모르는 네가 황태자비가 된다고 무얼 할 수나 있겠니. 나와 싸움을 벌이면 견디기도 벅찰 텐데. 애쓰지 마렴.”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 결론은 역시 황태자비는 내 거야, 꺼져! 다. 게다가 미묘하게 사람을 낮잡아 보는 말투도 거슬린다.

    다만, 밉지는 않았다. 데이비드에게 설명을 들은 후여서 그런지 안쓰럽기만 하다. 죽거나 집에서 쫓겨나기 싫어 아등바등하는 중이란 걸 알게 되어서 그러려니 하게 됐다.

    그나마 곱게 말로 시비를 거는 수준이라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지. 잔뜩 가시를 세워 방어하는 모습이 가여웠다. 이 아이에게는 삶의 방향이 결혼밖에 존재하지 않는 거니까. 다른 지향성도 없이, 목표도 없이 그저 결혼 하나만을 위해서 살게 되었고 살아왔다. 어릴 적의 벨리타와 다른 게 없었다.

    중학교도 겨우 졸업해 일만 하다가 겨우 결혼하고 나니 그마저도 자유롭지 못했던 삶. 계집은 출가외인이라고, 명절에도 가족을 보러 갈 수 없었던 외로움과 사무치는 고독감. 결혼을 하고 나니 끝난 것만 같았던 인생.

    동질감을 느끼는 것도 이 아이에게 가소로운 일일지 모른다. 벨리타는 그나마 선택이란 걸 할 수 있었으니까.

    소르니는 결정권도 없이 정해진 남편을 위해 살아왔을 거다. 정치적 수단으로, 가문의 부귀영화를 위해서. 도구로서. 자신이 물러나 주면 이 아이는 과연 행복할까. 숨만 붙일 수 있다면 다행인 걸까.

    벨리타는 입 안이 썼다. 이 세계까지 와서 이런 마음 느끼고 싶지 않았다. 다르지만 비슷한 처지에서 느끼는 동질감 따위 원한 적도 없다.

    마주할수록 가슴이 답답해졌다. 벨리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울컥 차오르는 감정을 참아냈다. 무슨 말을 해도 오지랖이고 간섭이었다. 벨리타가 소르니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말은 단 하나였다.

    “그럴 거예요.”

    간결하고 단호한 대답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어서 소르니는 그만 값비싼 부채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멍하게 굳어 버렸다. 바락바락 말꼬리를 잡으며 비꼬고 물어뜯으리라 생각했는데 너무 쉽게 포기했던 탓이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소르니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여상스럽게 보였던 고아한 모습과는 달랐다.

    “뭐라고? 방금, 뭐라고 했어?”

    “그럴 거라고요. 잭, 아니, 전하께 그만하자 말하려고 했어요. 쫓겨났지만.”

    입이 떡 벌어진다. 치아도 곱다. 벨리타는 미소 짓지 않았다. 화색하며 기뻐 보이는 소르니를 보니 웃음이 나오질 않았다. 잭슨이 좋을까. 사랑하고 있어서 그리도 기쁠까.

    무덤덤한 벨리타 앞에서 안도감에 물든 얼굴을 하는 소르니를 보자 미어진다.

    소르니가 상체를 뒤로 물렸다. 체면치레를 하려 해도 늦었다. 큼, 조용히 헛기침을 한 소르니가 벨리타를 흘겨본다.

    “독 때문에 그런 마음이 들었니?”

    딸과 닿게 된 것도 독에 쓰러져서이니 그렇다고 할 수 있나. 벨리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네. 그렇다면 하루빨리 전하께 전하렴. 내 도움도 한사코 거절하시니 말이야.”

    도와주겠다고 제안했나 보다. 2황자에게 누명을 씌워 주는 대신, 황태자비 자리를 지키게 해달라는 거래였을 거다. 남을 해치고 무너트리면서까지 권력을 잡고 싶을까.

    소시민으로 살아왔던 벨리타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돈과 적당한 명성을 이곳에서 누려 보았음에도 더한 권력을 탐하고자 하는 마음도 들지 않았다.

    사람마다 다르고 어차피 떠날 입장인지라 탐이 나지 않는 걸지도 모른다. 벨리타는 불필요한 생각은 접어두기로 했다.

    덜컹, 마차가 들썩거렸다. 비싼 마차여도 멀미가 나긴 나나 보다. 속이 메슥거렸다. 식사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더욱 심했다. 벨리타가 입을 틀어막고 헛구역질을 했다. 소르니의 표정이 미묘해진다.

    괜찮다고, 비싼 마차에 토할 생각은 없다는 뜻을 담아 손을 내젓자 표정까지 굳는다.

    “너…… 임신했니?”

    미친 거 아니야? 벨리타의 표정도 함께 굳어졌다.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지. 아들 같은 녀석이랑 하긴 뭘 해. 물론 해버릴까 싶었던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꼬시자고 입술도 박아봤는데! 이제는 영영 그럴 일 없다 이 말씀이다.

    울렁거리는 속 탓에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그저 입을 틀어막고 고개만 황급히 젓는 게 다였다.

    “……아니야?”

    끄덕끄덕. 대답을 하지 못해 고개를 흔들었으나 흔들수록 속이 어지러웠다. 소르니가 창문을 쿵쿵 두드렸다. 마차가 선다.

    정말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아 벨리타는 마차의 문을 벌컥 열었다. 바깥바람이 코에 들어오니 속이 나아진다.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뱉어냈다. 소르니가 멀뚱하게 앉아 벨리타의 우스운 꼴을 구경했다.

    멀미가 많이 나아지자 다시 마차를 출발시켰다. 창 너머로 스쳐 가는 건물들이 화려하다. 수도는 수도였다.

    “네가 아이를 가져도 괜찮아.”

    갑자기 무슨 소리래. 오만상을 찌푸린 벨리타를 흘끗 보았다가 창 너머로 시선을 돌린다. 햇빛이 붉은 머리를 내리쬐니 타오르는 불과 같이 반짝거렸다. 무대 위에서 단독 조명을 받는 것처럼 눈부시게 빛났다. 그만큼 쓸쓸하게도 보였다.

    소르니가 창문을 살짝 열었다. 바람이 쏟아져 붉은 머리가 너풀거렸다.

    “자리만 탐내지 않으면 뭐든 용서할 수 있어.”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 아이에게는 황후라는 자리가 인생의 목표이자 완주였다. 목 끝까지 질문이 차오른다. 황후가 되고 나서는 뭘 하고 싶니. 황제의 아내가 되면 네 삶은 멈추는 거니. 잭슨을 사랑하지 않는데 괜찮겠니.

    말해 보았자 우습다. 이 아이에게는 얘만의 길이 있는 거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고 싶지 않다.

    오지랖 부려 간섭하는 말을 하면 딸이 곧잘 하던 말이 있다. 틀니 압수. 끼지도 않는 틀니 벌써 뺏기고 싶지 않다.

    벨리타는 임신이 아니라 멀미하는 거라는 말을 뱉고는 입을 다물었다. 잭슨에게 관두자는 말을 하고 빠져 주면 뭐든 일이 순조로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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