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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61화 (61/150)

61화.

하도 흔들어대 골이 울린다며 뻗어버렸다. 벨리타는 마음 놓고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등을 돌려 침대에 길게 누운 오웬이 웅얼댄다.

“너 독 먹고 쓰러져 있을 때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나 독 먹었어?”

어쩐지 왜 쓰러졌나 했다. 그 덕에 딸과 소통했으니 좋은 일인가. 독은 어디서 먹었지. 작게 자른 고깃덩이를 훌러덩 삼켰다. 태평해 보이기까지 하는 벨리타의 태도에 오웬이 약간 고개를 돌려 흘겨본다. 진심이 섞인 애교였다. 쀼루퉁하게 심통이 나 있다.

“그러지 마.”

“뭘?”

“용감한 건 좋지만, 죽는 거에 덤덤해지면 안 돼.”

어차피 죽지도 않는다. 불사신이 있다면 벨리타가 아닐까. 독을 먹어도 살아 돌아오는 마법. 따란.

깨끗하게 비워 낸 그릇을 내려다보며 물을 들이켰다. 컵까지 싹 비워 내자 오웬이 손가락을 휘둘러 트레이를 협탁으로 옮겼다. 주문도 읊지 않고 손가락으로 마법을 해내니 신기했다. 얼마나 능숙하면 그럴까 싶기도 하다.

“알았어, 알았어. 그래서 무슨 고생을 했는데?”

죽지도 않으니 괜찮다고 하면 안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오웬이 잔소리를 하거나 화를 내는 건 상상도 되지 않지만 만약 그렇게 말했다면 몸소 체험하게 될 것 같았다. 대충 알겠다 넘긴 후 대화 화제를 돌렸다. 오웬도 얼버무린 대답이었음을 알지만 물고 늘어지진 않았다.

오웬이 이불에 얼굴을 문지른다.

“순간이동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몰라. 엄청 피곤해, 나 죽겠어.”

“그런 걸로 안 죽잖아.”

“너무하네.”

오웬이 꿈지럭거리며 벨리타의 옆에 바짝 붙는다. 귀엽게 군다. 손을 뻗어 반짝거리는 머리카락을 헤집어 쓰다듬었다. 고생했어, 고마워. 벨리타의 말에 오웬이 낮게 부스러지는 웃음을 흘렸다. 기분이 풀린 모양이었다.

“잔에 독이 묻어 있었어. 범인은 잡았는데 배후는 아직이야. 너희 부모님 엄청 놀라셔서 범인 찾겠다고 난리시고. 데이비드랑 로틀도 사람 써가며 샅샅이 조사하고 있어. 황태자도 내내 난리였고. 체르핀 공녀가 황태자를 방해하는 느낌이기는 하지만…….”

그런 일이 있었구나. 벨리타가 쓰러진 동안 많은 일이 일어났나 보다.

“너 따라다니는 하녀 있잖아, 엘라. 걔가 어찌나 울던지.”

눈앞에서 쓰러졌으니 놀랄 만도 했다. 엘라는 벨리타를 무척 좋아하고 따랐으니 충격도 컸을 터였다. 어린아이에게 못 볼 꼴을 보였다. 자신이 어찌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지만.

저택으로 돌아가면 엘라를 달래주고 데이비드도 달래줘야겠다. 데이비드도 아직 아이었으니까. 툴툴대지만 벨리타를 좋아하니 여간 놀랐을 게 아니다. 조슈아에게도 고맙다고 편지라도 써 주어야겠다.

“벨리타. 넌 배후가 누구인지 짐작이 가?”

알 리 없다. 벨리타는 그간 어릴 적부터 앓아누워 있었기에 적이 없었다. 원한을 가진 사람도 없다. 소르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만 불확실하다. 제일 가능성이 있는 건 역시.

“잭슨이 먹어야 할 걸 내가 먹은 거 아니야? 걔네 엄마가 죽이려고 든다며.”

타당하지 않은가. 독살 시도가 잘못되어 벨리타가 피해를 받은 거다.

어? 잠깐만. 벨리타가 침대를 팡팡 두들겼다. 오웬이 어리둥절해져 몸을 돌렸다.

들뜬 벨리타가 오웬의 어깨를 붙들고 흔든다. 오웬의 머리가 속절없이 흔들린다.

“독 먹고 나서 무섭다고 황태자비 안 한다고 하면 되잖아!”

너무 좋은 생각이다! 곱게 자란 어린아이가 독을 먹었다고 한다면 으레 나올 반응이 아니던가. 소르니가 독살을 꾸몄든 잭슨에게 향해야 했을 독살을 대신 감당했든 원인은 잭슨의 곁에 있어서였다. 잭슨이 크게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는 변명이겠지만 이만큼 적절하고 완벽한 변명은 없었다.

어린 나이의 치기로 자리를 탐냈다가 무서워졌다며 달아나도 그러려니 할 수 있다. 어리니까. 무게를 감당하기 버거우니 겁을 집어먹고 도망쳐도 이해할 수 있다.

사랑에 눈이 멀었다가 독을 먹고 정신이 번쩍 든 미친 영애. 소문이 나더라도 우스워지고 말뿐이다. 그 정도쯤이야.

오웬이 차게 식은 눈으로 벨리타를 바라본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느냐 고개를 기울이니 오웬이 고개를 저었다.

잔인한 방법이다. 죄책감을 자극해 붙잡을 수도 없게 만드는 핑계다. 네 탓에 독을 먹고 죽을 뻔했으니 무서워서 너와 못 있겠다, 라는 말이지 않은가. 잔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매정하기까지 하다.

미안해서라도 매달리지 못한다. 오웬은 잔혹한 벨리타의 말에 별다른 반박은 하지 않았다. 벨리타가 그러겠노라 하면 하는 거다. 말릴 의지도 없다. 게다가 잭슨이 상처를 받든 기뻐하든 제 알 바가 아니었다. 반응이 귀여워서 놀리는 맛이 있기는 했다만. 오웬의 입장에서도 벨리타보단 소르니가 잭슨의 곁에 걸맞다.

황제가 될 사람이다. 언제든 제 세상으로 돌아갈 사람이 곁에 있으면 위태로워진다. 제국도 그렇고 잭슨의 상태도 좋지 못할 것이다.

잭슨이 벨리타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기에 더욱 소르니가 황후의 자리에 오르는 게 맞았다. 잭슨은 다 자라지 못한 성인이다. 벨리타를 잃으면 사정없이 무너지고 버거워할 거다.

차라리 지금 상처받고 마는 게 낫다. 게다가 남의 사정에 끼어드는 오지랖까지는 없었다. 둘의 일은 둘이 알아서. 잭슨이 날뛸 시에는 벨리타 데리고 튀면 그만이다.

벨리타가 중얼거리며 잭슨에게 할 말을 고르고 다듬는 사이, 문이 벌컥 열렸다.

“벨리타!”

일어났다는 소식을 막 접한 잭슨이었다. 헐떡이며 잘 정돈된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쓸어 올렸다. 정신없이 뛰어온 티가 났다. 목 끝까지 정갈하게 잠근 단추를 풀어 헤치며 다가온 잭슨이 벨리타를 보자마자 깊이 안도했다. 벨리타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이전, 잭슨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품에 가득 안았다.

너무도 간절히 바라 꿈을 꾸는 건지, 현실인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잭슨은 벨리타를 힘주어 안은 채 연신 다행이다, 라는 안도감만 토해냈다. 우악스러운 손길로 어깨를 붙들고 숨이 막히게 가둔다. 벨리타는 앓는 소리를 냈다. 결혼은 없던 일로 하자고 이야기해야 하는데 잭슨이 너무 기뻐해서 말을 꺼낼 타이밍도 없었다.

많이 놀랐겠지. 미안했을 거다. 일어나지 않아 초조했을 거고 죽어버릴까 겁도 났을 테다. 유일하게 마음을 기댈 구석이라고는 벨리타 밖에 없으니까. 진정시키고 이야기를 하자 싶어 잭슨의 등을 양손 가득 끌어안았다. 잭슨의 품이 더욱 파고든다. 응석이다. 벨리타가 잭슨의 등을 느릿하게 토닥였다.

“괜찮아. 일어났잖아. 안 죽었어.”

“죽는 줄만 알았다. 네가 죽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으면서도, 무서웠어.”

“난 안 죽어.”

죽을 수도 없고 죽지도 않으니까. 잭슨이 거친 숨을 몰아쉰다. 여간 뛰어온 게 아니었나 보다.

오웬이 곁눈질로 벨리타를 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벨리타가 먼저 가 있으라는 듯, 고개를 까딱 움직였다. 심드렁하게 고개를 저은 오웬이 침대 끄트머리에 섰다. 조용히 주문을 뇌까린 후, 빛과 함께 사라진다.

오웬이 떠났음을 확인하자, 잭슨의 양 볼을 잡아 올렸다. 울 것처럼 일그러져 있다. 이제 말해야 하는데. 독을 먹고 쓰러져 보고 나니 무서워졌다. 결혼은 없는 이야기로 하자. 딱 두 문장이다. 겨우 두 문장인데. 그런데도.

“벨리타. 널 해친 범인을 찾았다. 무베 자작가의 여식이야. 네게 줄 테니 처우를 맡기마.”

“……그럴 필요 없어.”

말해야 하는데. 다른 말만 나온다. 가슴이 미어진다. 왜 울 것 같은 기분이 들까.

잭슨의 손이 벨리타의 손등을 덮었다. 걱정이 가득한 미소가 너무도 쓰라렸다. 심장에 바늘이 꽂히고 또 꽂힌다. 잭슨의 볼을 엄지로 문지른다. 잭슨이 다급히 말을 쏟아냈다.

“무서워서 보기 힘든 거라면, 내게 말만 해도 좋다. 산 채로 불에 태우든, 고문을 하든 네 마음이 풀릴 때까지 해.”

“상관없어. 안 해도 돼.”

미묘한 분위기를 느낀 건 잭슨이었다.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기묘하게 일렁이는 불안감을.

잭슨이 호소하듯 지껄인다. 흘러넘치는 말 중에 황태자비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일부러 피하기라도 하는 양. 필사적이었다.

그 때문에 벨리타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안간힘을 써가며 붙들어 두려는 잭슨이 안쓰러웠다.

같잖은 동정심과 미안함이다. 이미 충분히 이기적으로 굴었음에도 양심이 남아 있었다.

기만이다. 좋을 대로 휘둘러 놓고는 필요 없어졌다고 버리는 처지 아니던가. 벨리타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스스로가 역겨워졌다. 사람의 본질은 극한의 위기에 처해졌을 때 드러난다고 하던가. 그렇다면 현 상황에서 드러나는 벨리타의 본질은…….

애쓰는 모습이 이다지도 안타까웠다. 잭슨의 일평생 응석을 부리고 마음을 놓을 곳은 자신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매정하게 굴어야 했다. 다짐하고 각오하지 않았나. 철저히 스스로를 위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손익을 따져 대하겠다고. 미룰수록 잭슨에게 희망 고문이다.

벨리타는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손바닥에 선명한 손톱자국이 남았다.

“잭슨아, 할 말이 있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혼란스럽겠군. 가족들도 널 찾고 있다. 돌아가도록 해.”

잭슨이 쉽게 보내줄 리 없다. 벨리타를 붙들고 매달려야 했다. 벨리타가 떠올린 핑계는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유의 것이었으므로 심각한 분위기를 잡고 말을 꺼냈으니 응당 잭슨마저 짐작할 수 있었다. 죽음에 있어 초연하다고 한들, 타인이 원인으로 목숨을 위협받고 싶지 않은 건 모두가 그러할 테다.

마음을 다잡고 겨우 꺼낸 말머리를 자르고 회피했다. 잭슨은 벨리타를 놓고 싶지 않아 놓아주었다. 마른 몸을 끌어 문 앞까지 데려다 놓은 잭슨이 문을 열었다. 앞으로 나아가게만, 돌아보지 않게 어깨를 단단히 그러쥔 잭슨이 씹어 뱉듯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배후를 찾으면, 연락하마. 또 보자. 벨리타.”

얼굴도 보지 못했다. 화를 내고 있는지, 실망했는지 보지 못했다. 벨리타를 내보내자마자 닫힌 문을 이제야 돌아보았다.

어린 것이 눈치만 빠르다. 위협적인 상황에 지속적으로 놓여 있는 사람은 눈치가 좋다. 굶어 죽지 않아야 해서, 미움받고 싶지 않아서. 코끼리가 둔하고 토끼가 빠르듯, 약자는 예민한 법이다.

잭슨은 예민하고 기민하다. 이내 제국을 다스리는 먹이 사슬의 윗자리를 차지할 텐데도 그랬다. 약삭빠르고 민감해야 황제가 될 수 있다면, 끊임없이 위협에 노출되어야 그 자리에 오를 수 있다면 그건 과연 좋은 걸까. 잘 모르겠다.

이곳에 있는 아이들은 다 눈치가 빠르다. 눈치가 없어도 좋았을 텐데. 그러지 않아도 괜찮았을 텐데. 괜히 마음만 쓰이게.

결혼은 없던 일로 하자는 제의는 거부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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