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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60화 (60/150)
  • 60화.

    남의 앞에서 우는 취미 없는데 오웬의 앞에서만 벌써 두 번째다. 이쯤 되니 망치로 머리라도 내려쳐서 기억을 지우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닐까 싶어진다. 그러면 바보가 되어서 현실로 못 돌려보내 주려나. 그렇다면 보류다. 오웬의 손이 벨리타의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들어 뒷목을 받친다. 고개를 들었다.

    “무슨 꿈이기에 그렇게 울어, 응? 걱정했잖아.”

    오웬의 얼굴이 보였다. 염려가 가득 묻어나는 다정함과 상냥함이다. 짙은 보라색의 머리카락이 빛을 받아 은하수처럼 반짝거렸다. 예쁘네. 벨리타가 손을 들어 오웬의 뺨을 감쌌다. 오웬이 차분하게 눈을 감아 볼을 기댄다. 단정한 이목구비가 손안에 가득하다. 엄지손가락이 매끄러운 살결을 쓸어 입술을 문질렀다.

    말캉한 입술이 손가락에 눌렸다. 입꼬리가 휜다. 엄지손가락에 쪽, 입을 맞춘 오웬이 반쯤 눈을 떴다.

    “나 예뻐?”

    예쁘다. 곱고 수려하다. 생각 없이 하는 듯 보이는 행동들이 어찌나 야살스러운지. 눈치도 좋다.

    “더 만져도 돼. 네가 기분이 풀린다면 얼마든지.”

    능청스럽기는. 벨리타가 옅게 미소 지었다. 오웬도 마주 웃었다. 이윽고 작은 몸이 스르르 쓰러진다. 놀란 오웬이 벨리타를 붙들었다. 긴장이 풀리니 배가 고프다. 이 망할 몸뚱아리는 무드도 없고 눈치도 없다.

    “나 배고파.”

    “……푸핫!”

    침대에 곱게 벨리타를 눕힌 오웬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부끄럽고 민망하지만 벨리타도 우습기는 매한가지여서 타박도 하지 못하고 피식 힘없이 웃는다. 오웬이 손가락을 휘둘러 침대 옆에 놓인 종을 흔들었다. 대기하고 있던 하녀가 들어오자 식사를 준비하라 이른 오웬이 말을 덧붙였다.

    “황태자 전하께는 벨리타가 일어났다는 소식은 나중에 전해 줘. 분명 울고불고 난리가 날 텐데 체하면 안 되니까.”

    하녀가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다시 둘만 남았다. 벨리타가 협탁에 놓인 물을 들이켰다. 여러모로 목이 탔다.

    단번에 물을 비워낸 벨리타가 크으, 탄성을 뱉어내자 오웬이 벨리타의 옆에 눕는다. 팔을 뻗어 벨리타의 허리를 낚아채 품에 안는다. 자연스럽다 못해 당연한 일을 하는 양 스킨십이 가벼웠다.

    오웬이 뚱하게 입술을 내민다. 장난스러운 태도였다. 벨리타가 오웬의 입술을 가볍게 눌렀다. 입술이 쏙 들어간다.

    “딸 꿈을 꿨어.”

    “그랬구나.”

    나오지는 않았지만 딸의 꿈이라고 한다면 그렇다 할 수 있다. 오웬은 질문 없이 맞장구만 쳤다. 무슨 꿈이었느냐 물고 늘어지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그러고 보니 계시처럼 나열되던 문장이 무슨 의미일까.

    “주인이 바뀌었으니 끝이 같지 않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오웬은 문장의 의미를 되묻지 않고 홀로 고민했다. 벨리타는 틈을 주지 않고 두 번째 질문을 이었다.

    “큰 힘을 찾으면 바라는 바를 이룰 수 있대.”

    꿈의 내용이리라 추측한 오웬이 고개를 끄덕였다. 벨리타의 아이가 꿈에 나와 이야기를 해 준 모양이었다. 조용히 생각에 잠긴 오웬은 벨리타를 바라보았다. 이내 상체를 벌떡 일으켜 앉으며 소리쳤다. 명쾌하게 답을 찾아냈다는 개운함이 담긴 말투였다.

    “주인이 바뀌었다는 건 몸 주인 말하는 거 아니야? 끝이 같지 않다는 건, 원래 몸 주인의 인생이랑 네 인생은 다르다는 것 같은데.”

    아? 멍청한 대답을 한 벨리타가 오웬을 따라 급히 상체를 일으켰다.

    맞다. 소설 속 주인공이 바뀌었으니 엔딩도 달라진다. 그렇다는 건, 잭슨과 결혼할 필요가 없다는 뜻도 되지 않나. 로맨스 소설이니 이야기의 끝은 남자 주인공인 잭슨과의 열렬한 사랑이다. 여자 주인공이 자신으로 바뀌었으니 이야기의 끝이 달라져도 괜찮다는 의미였다.

    여태까지 개고생했네, 시부럴!

    벨리타가 경쾌하게 자신의 허벅지를 내리쳤다. 찰진 소리가 울리며 배고픈 벨리타가 다시 침대에 몸을 뉘었다. 어이없을 정도로 우스운 모양새에 오웬이 억지로 웃음을 참아냈다.

    “그럼 큰 힘은 뭐지?”

    “글쎄…….”

    둘은 다시 적막 속에서 심각하게 고민했다. 전지전능하신 작가가 직접 조언까지 던져주고 갔는데 허튼소리는 아닐 거다. 우리 딸이 자신에게 되는대로 지껄였을 리가 없다. 벨리타는 인상을 마구 찌푸리며 상념에 잠겼다.

    큰 힘이 대체 뭘까. 근육을 키워야 하나? 이 소설 속 세계를 다 부숴버리면 돌아갈 수 있게 되나?

    이 세계 정복을 해야 하나? 그건 너무도 귀찮다. 번거롭기도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가능할지도 미지수다.

    오웬이 갑작스레 손가락을 튕겼다. 딱, 손가락이 마찰하는 소리가 들리자 벨리타의 이목이 오웬에게 향했다.

    “여기에서 큰 힘이랄 게 세 가지 있잖아. 권력……”

    “그건 나 있는 곳도 똑같거든.”

    “아냐, 들어 봐. 권력, 신력, 마력. 이 셋 말이야.”

    친히 손가락까지 하나씩 접어가며 설명해 준 오웬 덕에 벨리타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그 생각을 못 했다. 벨리타의 세상에는 없지만 이곳에는 있는 힘. 마법과 신의 능력. 오웬의 연구실에서 들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신력쯤 되어야 가능한 혼의 이동. 버겁지만 연구한다면 가능할 마법으로서의 혼의 이동.

    와악, 벨리타가 소리를 지르며 오웬의 허벅지를 여러 번 내리쳤다. 찰싹, 찰싹! 허벅지를 내어주며 아프다고 상체를 뒤틀던 오웬이 벨리타의 손목을 잡아 제지했다. 붙잡은 손목을 자신 쪽으로 끌어와 능글맞게 미소 짓는다.

    “그렇다는 건, 넌 나만 있으면 된다는 소리네?”

    맞는 말 대잔치라서 할 말이 없다. 야살스럽게 눈을 접어 웃는 오웬이 능청맞게 너스레를 떨었다.

    “하루 종일 나만 보면 되겠다, 그렇지?”

    얘는 뭘 알고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그저 꿈에서 나온 말이라는 점만 추측할 수 있을 텐데 벌써 벨리타가 바라는 것과 큰 힘의 연관성을 찾아냈다.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으면 마력이나 신력에 기대면 된다는 해석까지 마쳤다. 마법사인 자신이 도와줄 수 있으니 곱상한 얼굴 들이대며 자신과 붙어있자 한다. 천재인가?

    진짜 능구렁이 아니야? 벨리타가 미간을 찌푸렸다. 오웬이 상체를 숙여 누워 있는 벨리타의 얼굴에 점점 가까워진다. 이러다 입술이라도 비비면 볼만하겠다. 그저 눈만 끔뻑 감았다가 떴다.

    오웬의 이마가 벨리타의 이마에 맞닿았다. 긴 손가락이 벨리타의 얼굴을 감싸 쥔다. 부은 눈가를 엄지로 지그시 눌러 문지른다. 손가락에 물기가 엉긴다.

    “몸의 주인이 바뀌었으니까, 네가 살고 싶은 대로 살면 되잖아. 하고 싶은 거 하면서.”

    “…….”

    “마음에도 없는 결혼은 할 필요 없이 말이야.”

    오웬의 말이 맞다. 짙은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렸다. 머리카락에서 벨리타와 같은 향이 난다. 같이 살아서 그런가. 벨리타가 간지러워 결 좋은 머리카락을 치워냈다.

    오웬의 이마가 떨어지지 않는다. 담아두고 있었나. 마음이 없어도 결혼은 할 수 있다는 말이. 그렇게나 신경 쓰였을까.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벨리타는 눈치가 없지 않았고 자신을 향한 호감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의 무감한 사람도 아니었다. 능글맞고 여유 있게 굴어 속내가 가려지지만 아예 두드러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바람둥이처럼, 스킨십에 가벼운 사람처럼 굴어도 알 수 있다. 심지어 자신의 마음이 어떤지조차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게 훤히 보였다.

    벨리타는 모르는 척해 왔다. 굳이 알려 줄 생각도 없었다. 잭슨과의 결혼으로, 몸을 빼앗았다는 죄책감으로, 언젠가 현실로 돌아가야만 하는 처지임을 어쩔 도리가 없어서.

    마땅한 답을 삼켰을 뿐이다. 앞으로도 변함없다. 크기가 거대하든, 얕고 작든 오웬의 마음이 어떠한들 모르쇠로 일관할 거다. 벨리타는 떠나야 하는 이였고 오웬은 남아야 하는 이였으니까. 벨리타의 감정은 필요하지 않다. 그저 잠깐의 유흥을 즐기는 정도가 적합하다. 이곳의 모든 캐릭터들에게도 그럴 것이다.

    유약한 사람인지라 정이 가는 건 어쩔 수 없겠다만, 감정까지 쏟고 싶지 않았다. 돌아가고 나서 몰아칠 게 뻔한 그리움과 애정을 추스를 겨를도, 기력도 없다. 그러니 자신을 위해서라도 선을 그을 것이고 매정하게 등을 돌릴 거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서. 떠난 후가 두려워서. 홀로 간직해야만 할 감정들이 무거워서.

    참 다행이다. 잭슨의 마음을 갖고 노는 꼴이 무척이나 미안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뜬금없이 황태자비가 되겠다고 졸라 곤혹스럽게 만들었고 곤란하게 만들었다. 소르니에게도 죄책감을 가지지 않아도 되겠다. 벨리타의 아버지와 어머니, 동생을 위험하게 만들지 않아도 되었다.

    벨리타만 포기해도 많은 이들이 행복해지는구나. 몸을 뺏은 자신이 아닌 어리고 약한 아이가 이 일들을 견디었어야 했을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쓰리다. 어른인 자신마저 자책하게 되는데 아이는 얼마나 힘들어할까. 잭슨에게는 뭐라고 얘기해 줘야 할까. 황태자비는 물론, 첩마저 될 생각 없다고 해야 하는데.

    이기심으로 아이에게 상처를 주었는데 다시 주게 생겼다. 어른이 되어선. 보호해 주지 못할망정 괴롭히고나 있다니. 벨리타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스스로를 향한 비웃음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어그러지니 불가피한 일이다.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었고 그로 인해 받을 잭슨의 상처는 얼마나 깊을지 알 수 없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식사가 도착했나 보다. 오웬이 상체를 들었다. 벨리타도 따라 몸을 일으켰다. 화려하지는 않은 음식이었지만 며칠 굶었으니 그마저도 호화였다. 잡념과 고민들이 머리를 어지럽게 했는데 냄새를 맡으니 흐릿하게 사라진다. 생각이건 뭐건 밥부터 먹어야 뭐라도 한다. 사람은 밥심이다. 밥은 먹어야 한다.

    부담스럽지 않은 음식들을 씹어 넘겼다. 오웬은 벨리타의 옆에서 턱을 괴고 구경이나 했다. 시선이 부담스러워 가자미눈을 뜨고 오웬을 흘겨봤다. 오웬의 눈이 가늘어진다.

    “그렇게 보지 말고. 대답 안 해 줬잖아.”

    “뭘?”

    “결혼 말이야. 할 거야?”

    빵을 삼켰다. 목이 막혀 물을 찾으니 오웬이 직접 벨리타의 손에 물이 가득 담긴 컵을 쥐여 줬다.

    벨리타가 물을 넘기고 크으, 탄성을 뱉어내자 오웬이 삐뚜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솔직히 조금 귀엽다. 아닌 체, 신경 쓰지 않는 척 넌지시 물어보면서 벨리타의 대답만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늘 그랬던 것처럼 능글맞게 구는 것도 잊은 게 썩 귀엽다.

    “안 할 거야. 잭슨이한테는 잘 말해야지.”

    흐응, 오웬이 콧소리를 냈다. 원하는 답을 들어 기분이 나아진 낯짝이다. 턱을 괴어 구부러졌던 허리가 곧게 펴지더니 벨리타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다.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리는데. 벨리타가 어깨를 위아래로 흔들어댔다. 오웬의 고개가 신명나게 흔들린다. 억, 그만, 알았, 미안, 이라는 끝도 맺지 못한 단어들이 난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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