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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59화 (59/150)

59화.

차분하고 평온한 소르니의 낯에서 염려와 걱정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언어유희일 뿐이다. 남의 불행과 어려움에 처한 상황을 기회로 삼는 영악한 가문이었으니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독살을 꾀한 범인이 벨리타의 적이 아니라면 소르니의 도움이 없어도 해낼 수 있다. 어렵긴 하겠지만 못할 것도 없었다.

거절하고자 했다. 소르니가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면 분명 곧장 거절했을 거였다.

“파텔 영애는 건강도 좋지 않은데 황후로서 견딜 수 없겠죠. 그래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영애를 첩으로 두신다면 제가 보호해드리겠어요. 제 가문과 파텔가가 진흙탕 싸움을 하게 되면 무너질 경제와 낭비될 국력을 생각하세요. 파텔가도 무사하지 못하겠죠. 영애도 마찬가지고요. 전하께서 손해 보실 제안은 아니실 거라 생각해요.”

황후만 된다면 잭슨이 무얼 해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벨리타와 아이를 갖고 화목하게 살아도 소르니는 자리만 지키겠다고 했다. 괜히 자리를 빼앗아 불필요한 싸움을 부추기지 말라는 협박도 한다. 자신까지만 넘어가달라며 애원과 다름없는 제안을 했다.

황후로서 걸맞은 자는 소르니였다. 벨리타는 건강 탓에 황후로서의 배움이 부족해 더러운 정치판에서 살아남을지조차 미지수였다.

그래서 애초에 벨리타를 첩으로 두려고 했던 거다. 벨리타가 황태자비의 자리만 탐내지 않았다면 소르니가 이런 제안을 할 리도 없었다. 잭슨으로서도 거부하기 어려운 제안이다. 황후와 2황자를 치워주고 벨리타와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배려까지 해준다는데 어찌 거절할 수 있을까. 체르핀 공작가와 얽힌다면 벨리타라고 무사할까 싶기도 했다.

황태자비를 포기하는 게 벨리타에게도 좋을 터였다. 유일한 정인이 되고자 했지만 힘의 줄다리기를 하는 황궁에서 있을 수 없는 낭만적인 일이었다. 황후가 되어 온갖 술수와 살해 협박에 시달릴 바에야 마음 편히 한 발자국 물러나 자신만을 바라보는 게 좋은 일이 아닐까.

언제부터 타인의 의견과 성향을 궁금해했다고. 잭슨이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벨리타를 위해서라도 황태자비는 소르니가 되어야 한다. 고난을 겪으며 괴로워할 벨리타를 보고 싶지 않았다. 지금처럼 말갛게, 행복한 채로 있어 주길 원했다.

잭슨이 입을 열었다. 이 대답으로 벨리타의 미래가 좌우되겠지. 신분 높은 분들의 입맛에 맞추어서.

“……체르핀 공녀, 난…….”

*

잠든 오웬이 곁을 지켰다. 벨리타는 죽은 듯 잠에 빠져 있었□□ □□?

■□.

■□ 이□ □슨 ■이야.

■마가 왜 여□에 있■□야.

엄마가 □■ 밖□로 돌아■□.

현실로 ■□■□.

돌□와.

엄마.

■□

■□□

벨리타가 현실□ 돌□■□.

안 돼.

아니야.

■마.

안ㄷ

*

■□는 깊은 잠 속에서 꿈을 꾸었다. 쓰러져 있는 동안 꿈을 꿔 본 적 없었다. 눈을 감아도, 떠도 다를 바 없는 어둠 속에서 겨우 숨만 내쉬었다. 물속에 잠겨 있는 감각. 호흡을 쉬어도 들어차는 숨이 없고 버둥대도 잡히는 것이 없다. 가라앉고, 끝없이 곤두박질쳤다.

■□는 녹이 슬어 부러지는 태엽이었다. 구르고 돌아가 불협화음을 내는 것과 같았다.

홀로 있었다. 끝이 존재하는지, 흐물흐물하게 녹아 버린 손에 닿는 게 있는지도 알 길 없다.

눈꺼풀을 내리고 꽃이 만개하듯 눈을 떴다. 빛이 번진다. 압도하는 찬란함이 아렸다. ■□는 빛을 눈에 담지 못해 목을 수그렸다. 빛이 있으니 공간이 펼쳐졌다. 발아래에 형형색색의 황홀한 꽃들이 만연했다.

■□는 활짝 핀 꽃들을 지르밟았다. 발밑에 꽃이 차례로 으스러진다. ■□가 걸음을 딛고 나아가자 단어들이 뒤따라왔다.

『주인이 달라져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니, 끝은 같지 않다.』

『큰 힘을 찾아라. 바라는 바를 이루리라.』

판단할 새 없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흩어지는 꽃잎들이 너풀거렸다. 구덩이 속으로 파고들어 공간의 마지막에 온몸이 박살 나는 순간,

■□는 불현듯 느낄 수 있었다. ■이 □■ 속에 개입했음을.

이 꿈은 ■이 필사적으로 찾아낸 소통의 창이었음을.

■□, 내가 꼭 □해■게.

*

온기가 느껴졌다. 얼굴을 닦아내는 손길이 초조했다. 부은 눈을 뜨기에도 버거워 숨만 색색, 가쁘게 내쉬니 묵직한 목소리가 애달프게 벨리타를 불렀다. 몽롱하다. 모든 상황이 꿈처럼 현실감 없었다. 눈물만 바쁘게 흘렸다.

오웬이 벨리타의 눈가를 하염없이 문지르며 이름을 불렀다. 대답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는다.

가슴이 진창으로 나동그라졌다. 뼈가 산산이 부수어지는 고통이었다. 풀린 눈으로 허공을 바라본다. 눈길이 닿는 곳곳마다 허상이며 거짓이었다. 억지로 쑤셔 넣어진 정보가 견딜 수 없이 버거워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차라리 죽었어야지. 소설 나부랭이에 들어가지 말고 죽었어야 했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니. 언제부터 내 속을,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니.

언제부터 애썼어. 얼마나 고생했어? 잠은 잤니? 밥은 먹었어? 잘 지내고 있는 거지? 얼마만큼의 시간을 쏟은 거니. 훌쩍 떠나버린 나를 미워하고 있지는 않니. 원망하고 있니.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는데.

끝까지 못난 엄마였다.

딸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나쁜 엄마였다.

그럼에도 염치도 없이 딸이 보고 싶어 심장이 찢어지고 사지가 무너져 내렸다.

내 딸. 내 아이. 아가. 얼마나 놀랐을까. 소설 속에 들어와 주인공이 되어 이야기를 망쳤다고 화를 내지 않았을까.

미안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거친 파도에 잠겨 몸을 가눌 수 없었다. 부끄럽고 미안했으며 그저 무력하게 울기만 하는 자신이 원통했다. 손이 덜덜 떨린다. 잠긴 목에서 쇠를 긁는 소리만 났다.

“벨리타. 정신 들어? 벨리타!”

벨리타가 아니다. 나는……

“왜 그렇게 울어. 악몽이라도 꾼 거야?”

악몽이다. 존재하는 모든 게 악몽의 잔재였다. 깨어나려고 발버둥 쳐도 도로 잠식되어 갇혀 버리는 악몽이었다.

눈을 감고 뜰 때마다 간절히 바랐다. 숨을 쉬고 내쉴 때마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오는 순간마다 애원했다. 현실로 돌아가기를. 내 아이가 기다리는 곳으로. 가족이, 내 일터가, 친구들이 기다리는 곳에서 눈을 뜨길.

딸을 부둥켜안고 길고 버거운 악몽을 꾸었노라고. 말도 안 되는 우스운 꿈을 꾸었다고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할 수 있기를 욕망했다. 친구들과 맥주와 소주를 말아 마시며 그런 바보 같은 꿈을 꿨다고 떠들기를 바라 마지않았다.

무너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꿋꿋이 버텨 돌아가려고 했다. 하다못해 이곳에서의 새 삶을 잠깐이나마 즐겨 보기라도 하려 했다.

내 아이와 맞닿았음을 느낀 순간, 모든 것이 부질없어졌다. 한순간에 부서졌다. 견딜 수 없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짐작도 하지 못하겠다. 돌아가고 싶다. 당장. 지금 바로 산에서 굴러떨어지던 순간으로 돌아가 되돌리고 싶었다.

그 산에 가지 말걸. 출간 축하한다고 딸과 밥이라도 먹으러 갈걸. 가기 전에 한 번이라도 안아 줄걸.

내 딸이 최고라고, 사랑한다고 말할걸.

무슨 일이 있어도 엄마는 우리 딸 편이라고 응원해 줄걸.

후회가 쌓인다. 돌덩이가 가슴에 쌓인다. 무겁게 짓누르는 후회와 자괴감은 전부 제 탓이었다.

하얗게 마른 손이 이불을 쥐어뜯었다. 가슴께가 크게 들썩거렸다. 얇은 살가죽에 핏대가 두드러지고 가느다란 목에 핏줄이 불거졌다.

벨리타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침대가 들썩거리며 다리가 허공을 휘둘렀다. 비참함에 통곡도 할 수 없었다. 꺽, 꺼억, 넘어가는 호흡만 겨우 견디어 냈다.

유려한 손이 벨리타의 사지를 붙들었다. 말단부터 차근히 타고 올라온 손길은 벨리타의 떨리는 몸을 끌어안았다. 북받치는 감정에 못 이겨 발작하는 여린 몸을 품에 가두고 뒤통수를 감싸 어깨에 묻었다. 헐떡이는 등이 위태롭다.

오웬은 초조하게 벨리타의 등을 토닥였다. 어색하고 엉성한 위로였다.

달고 무거운 향이 코끝에 닿아 깊이 들어찬다. 단단한 팔이 몸을 부둥켜안아 지탱하니 목 안이 들끓었다. 뱃속이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다. 비명이 터졌다. 목구멍에 갇혀 있던 설움이 토악질처럼 올라왔다.

벨리타가 오웬의 등을 긁었다. 어깨에 얼굴을 묻고 오열했다. 진아야, 아가……. 단말마만 되풀이 한다.

“괜찮아. 벨리타. 다 괜찮아질 거야.”

괜찮아질 리 없다. 잘게 떨리는 손이 오웬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오웬이 벨리타의 등을 문지르고 부드럽게 두드렸다. 당혹감이 섞인 차분한 목소리가 귀에 맴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다 잘될 거니까 울지 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저 위로일 뿐인데. 말뿐인 위안임에도 맥이 풀렸다. 옷깃을 쥐어뜯던 손아귀가 힘없이 침대에 떨어졌다. 허공을 응시하는 눈에 눈물만 흘러내렸다. 햇빛에 눈이 멀어버릴 것 같다.

정말 다 잘될까. 다 괜찮아질까. 오장육부가 뒤틀리고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 나아질까.

삿된 희망이나마 붙들며 생생했던 삶으로 돌아가리라 아등바등했다. 결혼만 하면, 죽기만 하면, 하고 불확실한 가능성에 매달렸다. 명백한 현실도피였다.

딸이 개입했음을 인지한 순간부터 외면했던 불안감이 엄습했다. 돌아가지 못한다면 어떡하지. 이 안에 갇혀 거짓에 순응하며 살게 될까 겁이 났다. 막연한 두려움이 넘실거린다.

가득 찬 물 컵이다. 툭 건드리면 흘러넘치고 마시기조차 요원한.

벨리타는 등을 가파르게 들썩거렸다. 울음이 멎지 않아 그마저도 서러워졌다. 늘어진 몸을 웅크리고, 오웬의 품에 파고들었다.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등허리를 쥐고 상체를 굽혔다.

오웬이 벨리타를 가득 안았다. 연신 귓가에 사탕발림을 지껄인다.

현실성 없는 소리임을 알아도 위로받을 때가 있는 법이다. 너무나도 지치고 낡아져 너덜거리게 될 때면 말뿐인 응원조차 희망이 되곤 한다. 날씨가 좋아서, 햇빛이 눈 부셔서, 목이 말라서 하루만 더 견뎌 보자, 묻어두기도 한다.

벨리타는 조금만 더 버텨 보기로 했다. 심장이 내려앉고 하늘이 무너지는 오늘도 시간이 흐르면 닳아지는 걸 알고 있으니까.

감정마저 닳고 해져 빛바랜 기억이 되면 그저 묻어둘 수 있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죽지 못해 참는다. 참다 보면 무뎌질 테니까. 이미 몇 번이고 해 봤으니까.

울음소리가 잦아들고 벨리타의 호흡이 일정해지자 오웬이 벨리타의 머리에 볼을 기댔다. 묵직한 무게가 존재하고 있음을 느끼게 했다.

오웬의 가슴에 귀를 대었다. 일정한 심장 박동, 부풀었다가 줄어드는 숨. 따뜻한 체온이 차분하게 만들어 줬다.

오늘도 벨리타는 죽지 못했다. 벨리타가 눈을 감았다. 머리카락을 빗어 내리는 손길이 다정했다.

감싸 두른 팔이 다부졌다. 푹신하면서도 딱딱한 품이 기분 좋았다.

“너 자면서 엄청 울었어. 내가 얼마나 놀랐는데.”

갈라진 낮은 목소리가 고요하게 울린다. 울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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