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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58화 (58/150)

58화.

지난밤보다 안색이 많이 나아졌다. 해독제의 효능이 확실한 모양이었다. 오웬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사경을 헤매고 있을지도 몰랐다.

분명 많은 도움을 줬다. 내심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그런데 도통 아니꼬워서 봐줄 수가 없다. 제일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벨리타를 다정하게 내려다보고 서슴없이 스킨십을 해대는 꼴이었다. 감정에 익숙하지 않은 자신이 봐도 알았다. 스승의 시선이 아니었다. 명백히 남자의 연모하는 것이었다.

곤란하다. 벨리타를 위해서라면 곁에 두어야 마땅한데 그럴 수 없다. 연심을 품고 있는 사내를 어떻게 곁에 두도록 두고 본단 말인가.

이미 오웬이 한참 만지작거려 멀끔한 벨리타의 얼굴에 손을 얹었다. 반듯한 이마를 쓸어내리고 핼쑥한 볼을 지나쳐 입술을 문지른다. 바짝 말라야 했을 입이 물기가 어렸다. 오웬이 신경 쓴 덕이다.

내 사람인데. 온전한 제 사람임에도 남의 손길이 스며있다. 잭슨이 상체를 숙였다. 얼굴이 가까워진다. 입술이 맞닿을 거리에서 잭슨은 고개를 틀어 볼에 입을 맞추었다. 입을 맞추는 걸 썩 좋아하지 않았던 벨리타의 반응 탓이었다. 싫어하는 걸 억지로, 의사도 묻지 않고 하지 않을 거다. 옳지 않다는 걸 배웠으니까.

잭슨이 벨리타의 손을 쥐었다. 작고 마른 손. 사랑스럽고 간절한 손. 잭슨이 벨리타의 손등에 입술을 문질렀다.

*

졸지에 오웬은 통신기가 되어 버렸다. 편지보다도 빠르고 정확한 전달 덕분에 오웬은 하루 만에 파텔 수도 저택, 태자궁, 조슈아의 수도 저택을 몇 번이고 들락날락해야 했다. 데이비드가 파텔가의 수하들을 시켜 조사를 나섰지만 진척이 없어서 곤혹을 치러야 했다.

수도 곳곳에 정보꾼들을 거느린 조슈아가 약삭빠르게 돕겠다고 나섰다.

데이비드와 사이가 나쁜 조슈아였지만 이 일은 예외다. 임시 휴전이다.

오웬은 와인을 홀짝거리며 그렇게나 으르렁대던 둘이 머리를 맞대고 범인을 잡아 족치려는 계획을 세우는 모습을 구경했다. 편지를 전하러 간 시종의 말에 이동 마법도 걸어주었으니 이미 파텔가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후작이 얼마나 길길이 날뛸지 궁금했다.

벨리타가 쓰러진 지 이틀이 지난 채였다. 용의자들은 아직도 무죄를 호소했으며 증거도 쉽게 잡히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능력만큼은 좋은 조슈아가 제 일을 미루면서까지 도왔으나 겨우 가닥이 잡힐 정도였다. 범인이 자백만 해 준다면 쉽게 풀어낼 문제였다. 용의자 둘은 황후나 체르핀 공작과 일면식이 전혀 없었으니까.

구경이 질린 오웬이 와인을 든 채 태자궁으로 이동했다. 벨리타는 여전히 누워 있었다. 오웬이 침대 옆에 놓인 물 잔을 향해 손가락을 대충 휘두르자 물 덩어리가 공중에 떴다. 일렁거리며 커다란 물방울이 벨리타의 입가로 흘러내린다. 정확하게 벨리타의 입 안으로 물이 떨어졌다.

오웬은 벨리타의 옆에 걸터앉아 와인을 들이켰다. 죽지 않는 걸 알지만 누워 있는 꼴이 시체와 다름없어서 이따금 무심코 코 밑에 손가락을 대곤 했다. 가느다란 호흡이 이어지는 걸 확인해야만 마음이 놓였다. 가슴께가 오르락내리락 움직이는 걸 한참을 바라보아야 눈을 돌릴 수 있었다.

커다랗게 트인 창문으로 햇빛이 쏟아져 벨리타를 밝혔다. 하얀 몸이 햇빛을 받으니 이내 먼지처럼 부스러져 사라질 것 같은 예감이 들기도 했다. 안전할 걸 알면서도 불안하다.

오웬이 고개를 들었다. 잭슨이 벨리타의 옆에 거머리처럼 붙어 있더니 자리를 비운 듯했다. 반짝거리며 빛나는 벨리타의 머리카락을 쓸어 정돈한다.

오래 누워 있으면 몸이 상하기 마련인데. 씻지도 못하니 오웬은 아침과 저녁마다 벨리타에게 청결 마법을 시전했다. 덕분에 방금 잠에 든 것처럼 말끔한 모습이었다. 곱게 죽은 것처럼. 당장에라도 깨우면 일어날 것처럼.

“너 손 정말 많이 간다. 벨리타.”

듣지 못할 말이지만 지껄여 보았다.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여상스럽게 달싹이던 입꼬리도 멍청하게 굳은 채였다. 숙제도 내줬는데. 일어나면 배운 것도 다 까먹겠네.

오웬이 가만히 벨리타를 내려다보았다. 잭슨과 데이비드, 조슈아의 사이에서 시달리는 건 오웬의 성정에 맞지 않는다. 가만히 이용당해 주는 착한 사람도 아니었고 흥미도 없는 일에 끼는 취향도 아니다.

진즉에 효율도 없고 귀찮은 일이라며 손을 떼고 마탑으로 돌아가야 맞았다. 상대가 매달리고 애원해도 거들떠보지 않고 흥미가 이끄는 일을 해야 옳았다. 오웬이라면 그랬어야 했다. 참 이상한 일이지. 정이 들었나. 벨리타, 네가 안타깝고 눈에 밟혀서 이제는 정이 들었나 보다. 그래서 계속 신경 쓰이고 챙겨 주고 싶은가 봐. 내가 그럴 리 없는데 말이야.

오웬이 침대 헤드에 상체를 기댔다. 술도 마셨으니 낮잠이나 자도 좋을 성싶었다. 벨리타의 옆에서 눈을 감았다.

*

벨리타가 독살의 위협을 받고 난 다음 날의 낮부터 찾아오던 손님이다. 그간 근처도 오지 않던 사람이었는데. 걱정이 되어 왔다는 핑계로 오랜 시간을 잡아먹더니 하루에 한 번씩을 태자궁에 들어와 잭슨을 방해했다. 그 때문에 잭슨은 건들이면 목을 사과 따듯 따버릴 것 같은 기운을 풍겼다.

응접실에 놓인 차에는 손도 대지 않은 잭슨이 소파에 늘어지게 기대었다. 3일째였다.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온 손님을 맞이한 잭슨이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범인은 찾으셨나요?”

“그대는 내 생각보다 한가한가 보군.”

붉은 머리를 늘어트려 단아하게 묶은 소르니가 찻물을 들이켰다. 차에서 독이 나왔다는 걸 알면서도 거리낌 없이 차를 마신다.

잭슨은 눈을 가늘게 떴다. 지레 겁을 먹고 아무것도 손대지 않아야 평범한 반응일 텐데. 태자궁의 보안을 믿는 사람이라기엔 대동한 기사들과 하녀가 많았다.

의심스럽다. 헛된 의심이라고 해도 범인이 잡히지 않은 마당에, 배후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는 현 상황에서 누구든 믿을 수 없었다. 찻잔을 내려놓은 소르니가 날카로운 눈매를 가늘게 접어 웃었다.

“그럴 리가요. 전하께서 고단해 보이시니 걱정이 되어 하는 말이죠.”

“그대가? 내 걱정을? 웃기지도 않는군.”

비아냥거림에도 평온한 태도를 유지했다. 황태자비를 갈아 치우리라는 소문은 소르니에게 가장 빨리 도달했을 터였다. 그럼에도 꿋꿋이 찾아와 얼굴을 비추고 오지랖을 부리는 꼴이 같잖았다. 서로에게 감정이 없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았다. 달콤한 말을 속삭이고 몸을 맞대더라도 어떠한 동요도 없을 관계였다.

그러니 출퇴근하는 것처럼 만나도 감정이 생길 리 만무하다. 황태자비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이러는 거라면 차라리 자신을 붙잡아 둘 지원과 황후를 자리에서 끌어낼 방법을 제시하는 편이 확실했다. 수고롭게 찾아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불필요한 노력이었다. 결과가 돌아오지 않을 시도.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아요.”

소르니가 유려한 손끝을 모아 무릎에 얹었다. 한 폭의 명화와도 같은 자태였으나 잭슨을 동하게 하지는 못했다. 소르니도 그를 원한 건 아니었는지 미소를 띤 채 거래를 제안했다. 거절할 수 있지만 아쉬울 만큼의 제안이었다.

“범인 색출을 도와드릴게요. 나아가 배후를 찾는 일까지 돕겠어요.”

“……그래서 네가 취할 이득은 뭐지?”

“혼인식을 앞당겨 주세요.”

벨리타도 해독제를 먹었고 눈을 뜨기만 기다리면 되는 상황이다. 다만 범인을 잡지 못하면 추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장담할 수 없다. 범인을 놓친다면 이후 더 많은 암살이 시도될 것이다. 이미 자신이 구축해 온, 살상에 미친 황태자의 위협적이고 감히 넘볼 수 없는 위치가 한순간에 우습게 보일 수도 있었다.

무력으로도, 핏줄로도, 능력으로도 단단히 자리매김한 황태자의 자리였다. 결코 스러지지 않는 굳건하고 잔인한 황태자. 독살을 실패한 범인 하나 찾지 못하게 된다면 쉽게 으스러질 형태였다.

귀족들과 황족들 앞에서 당당히 자신을 해하려는 자들을 죽여 없애겠다, 호언장담해 놓고는 실패한 꼴이 된다. 그리된다면 추후에 황제가 되어도 위세를 떨칠 수 없을 터였다.

체르핀 공작가가 나선다면 빠르게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2황자나 황후가 벌인 일이라 공작이 입을 열어 준다면 그들을 끌어내려 지옥 끝자락까지 처박아 놓을 수도 있다. 증거가 없으니 만들면 되는 일이다. 멍청한 2황자가 배후였다는 증거 하나만 날조하면. 소르니가 한 말의 의미가 이것이리라.

황후와 2황자를 쓸어낼 수 있도록 도울 테니 황후의 자리를 넘겨라.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다. 그리도 시달리던 잭슨이었다. 잭슨을 죽이고자 전쟁에 밀어 넣고 온갖 술수를 꾸민 자들을 치워 없앨 수 있으면 잃을 게 없는 제안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쉬이 그러자 대답할 수 없는 이유는 벨리타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 제 사람이라 만인에게 공표하는 관례인 혼인을 다른 이가 아닌 벨리타와 하고 싶었다. 종마 취급을 받는 황족이라 할지라도 마음이 있는 사람과 함께하고 싶은 바람이었다. 결혼은커녕 연애마저 쉽게 할 수 없는 처지지만.

기회를 놓치지 않는 체르핀 가문이었으니 먼저 거래를 제시했음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다만, 기묘했다. 섣불리 받아들일 수 없었다. 불쾌하고 소름 돋는 거부감. 정치적 수단으로 체르핀 공작과 손을 잡고 범인을 찾아야 옳다. 손가락이 초조하게 소파 팔걸이를 두드렸다. 일정한 소음이 고요한 응접실을 울렸다.

소르니는 온화한 낯으로 잭슨의 답을 기다렸다. 쉽게 거절할 수 없을 거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휘둘려 황제가 될 찬란한 앞길과 황제로서 통치할 건재한 권력을 내버릴 수는 없다. 훗날 정치에 방해가 될지라도 체르핀 가문의 힘이 당장의 상황에서는 필요할 터였다.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잭슨을 노린 독살인지, 벨리타를 노린 독살인지 알 수 없게끔.

음험한 꾀였다. 소르니는 황후의 자리를, 잭슨의 정인 자리를 지킬 수 있으면 못할 것이 없었다. 진창을 굴러도, 악한 계집이라며 손가락질을 받아도 괜찮았다. 도통 명쾌한 답이 돌아오지 않자, 소르니의 살가운 미소가 옅게 흩어진다. 찻잔을 들었다. 잔잔한 찻물이 일렁거렸다.

“이번은 독이었지만, 다음은 무엇이 될지 장담할 수 없겠죠. 전하께서는 위협에서 건재하시겠지만 파텔 영애는 어떨까요.”

고뇌에 잠긴 얼굴이 순식간에 사나워졌다. 초조하게 두드리던 굳은살이 가득한 손이 팔걸이를 움켜쥔다. 목에 빳빳하게 힘이 들어가 핏대가 섰다. 잭슨이 짐승처럼 낮게 으르렁거려 드러난 잇새로 살의가 샜다.

“협박이냐.”

“그럴 리가요. 그저 안타까운 마음에 염려가 되어 그럴 뿐이랍니다.”

여우 같은 사람은 따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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