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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57화 (57/150)

57화.

욱신거리는 어깨를 부여잡은 데이비드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는다. 무심한 손길이었지만 그 덕에 조금이나마 긴장이 풀린다.

“로틀 남작의 주소가…….”

“됐어. 알고 있으니까.”

아는 사이였던가? 데이비드가 일렁이는 시야 탓에 눈물을 닦아냈다. 그저 마탑에 틀어박혀 연구만 하는 마법사인 줄 알았는데.

오웬이 덜 마른 제 머리를 털어내며 여상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감정의 요동 없이 일관된 차분함과 이성적인 반응이다.

“범인은 황태자가 잡아주겠지. 그러니까 너무 염려 말고 황태자를 도울 준비만 해.”

“…….”

“벨리타는 신력 덕분에 죽지도 않잖아. 걔 옆은 내가 지킬 테니 종종 와서 상황 전해줄게.”

순식간에 상황이 정리됐다. 오웬이 나지막하게 이성적으로 생각하라는 조언을 던진 후 빛과 함께 사라졌다. 마법사인 덕에 평범한 사람이라면 생각해내지 못할 일도 해낸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든든했다.

데이비드가 다시금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참으려 눈을 벅벅 문질렀다. 정신 차리자. 정신. 벨리타는 일어날 거고 목숨을 걱정할 필요 없다.

데이비드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빠르게 인지했다. 하녀가 가져온 편지지와 펜을 받아 들며 급히 자리를 옮겼다. 하염없이 우는 엘라가 데이비드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이제부터는 시간과 정보 싸움이었다.

불이 환하게 켜져 있음에도 퍼져 나오는 빛이 밝았다. 조슈아는 작은 저택 집무실에서 서류를 해결하다 익숙한 빛에 인상을 찌푸렸다. 빛이 사라지자 오웬이 나타난다. 조슈아가 펜을 내려놓았다.

“이 시간엔 웬일인가요?”

오웬이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평소였다면 능청스럽게 시답잖은 인사나 건넬 터였는데.

“해독제를 찾고 있어. 시루에 독을 먹은 모양이야. 해독제 이름이…… 머린이었던가.”

“제가 왜 도와줘야 하죠?”

다짜고짜 주거침입한 자에게 살갑게 굴 필요는 없다. 그리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다. 사업 탓에 만나 잠깐 거래를 했던 거래처일 뿐이다. 이제는 얼굴을 마주 볼 필요도 없었다. 심지어 벨리타에게 소개시켜 줬더니 냉큼 벨리타의 집에 기어들어가서 사는 식충이에 불과했다.

가증스러운 녀석. 이 녀석 때문에 벨리타와 만날 시간도 없다. 절대 거래 없이 도와주는 일은 없을 거였다.

“벨리타가 독을 먹었어.”

그것부터 말해야 될 거 아니에요. 조슈아가 자리에서 급하게 일어났다. 쌓아 놓은 서류가 휘청이다 흩어져 떨어지는데도 눈길을 줄 새도 없었다.

조슈아의 얼굴이 파랗게 질린다. 대체 어디서. 어떻게. 왜. 맹목적으로 품은 신이 위태로워지면 신자도 불안정해지는 법이다. 조슈아의 손이 덜덜 떨렸다.

“……대체 왜죠? 어디서요? 설마 황궁인가요?”

“나중에 설명할 테니까 해독제나 알려줘. 어디서 구할 수 있지?”

거래하는 상단에게 이 늦은 시각에 물건을 요구하면 자신의 거래가 불리해질지도 모른다. 해독제를 받는 대신 무엇을 요구할지 모르는 일인 데다 추후의 계약에 불이익이 생길 수도 있다. 알고 있음에도 조슈아는 자신과 이어진 상단을 되짚어 보았다.

최근에 제약을 중점을 둔 상단과 거래를 시작했다. 철저히 자신이 갑이었으니 갑작스러운 요구를 해도 괜찮다. 과한 요구를 해도 들어줄 수 있다. 벨리타를 위해서니까. 이렇게 재고 따질 시간도 아깝다. 벨리타가 독살의 위협을 받았는데 무엇이 더 중요할까.

조슈아가 펜을 들었다.

급히 필요하니 이자가 원하는 대로 약을 구해줄 것과 그에 따른 보상은 장담한다는 것. 조슈아를 증명하는 날인까지 찍어 오웬에게 건넸다.

눈 깜짝할 새에 글을 적어 낸 덕에 오웬이 떨떠름하게 종이를 받아 들었다. 소름 끼친다는 얼굴은 덤이었다.

“너…… 벨리타 진짜 좋아하는구나.”

“이러고 있을 시간이 있나요? 빨리 가요. 벨리타가 잘못되면 당신도 죽는 거야.”

군 무기를 다루는 상단주가 하는 말이라 신빙성이 있었다. 여차하면 총이나 대포를 난사할지도 모르니까.

조슈아가 계산도 하지 않고 나서는 건 처음 봤다. 대가도 없을 손해를 감당하면서까지 벨리타를 위하는 모습에 괴리감이 느껴졌지만 오웬이 신경 쓸 일은 아니다. 오웬이 어깨를 으쓱이며 빛에 휩싸였다. 그리고 순식간에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

순간이동을 활용해 도운 오웬 덕에 벨리타는 늦지 않게 해독제를 받을 수 있었다. 그저 화를 참으며 손가락만 빨던 잭슨으로서는 심히 아니꼽다 말할 수 있었다.

해독까지 시켜 벨리타가 눈을 뜰 일만 남았지만 오웬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야심한 밤, 오웬과 잭슨은 벨리타의 옆을 꿋꿋이 지켰다. 서로 꺼지라는 눈길과 말을 주고받았지만 아무튼 자리에 머물렀다.

예민하게 날카로운 기류가 팽팽히 유지되었다. 해가 떠서도 둘은 버젓이 눈을 뜨고 있었다. 이른 아침, 조사의 중간보고를 하러 온 노타가 살벌함에 눌려 벌벌 떨었다.

잭슨이 눈치를 주어도 오웬은 자리를 비켜줄 기미가 없었다. 그저 가만히 앉아 벨리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고 바짝 마른 입에 물을 흘려 넣어 줄 뿐이었다.

거슬린다. 애정이 넘치는 다정한 행동이 짜증이 났다. 자신이 할 일이다. 고작 마법 스승 따위가 아닌, 결혼할 상대인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다.

노타가 둘의 눈치를 살피며 보고를 할까, 말까 입을 달싹였다. 벨리타의 목 끝까지 이불을 정돈한 오웬이 덤덤히 말을 꺼냈다.

“보고해요. 나도 들어야 전해줄 수 있으니까.”

파텔 후작가에 전하려는 모양이었다. 오웬은 이제 필요 없다. 데이비드가 찾아올 때 이야기해 주어도 늦지 않다. 오웬이 싫어서 그러는 건 아니다.

아니, 맞다. 싫다. 응접실에서 만났을 적에 심기를 벅벅 긁는 헛소리를 하고 황태자인 자신에게 마법을 사용하려고 하질 않나 벨리타와 찰싹 붙어 있는 것도 싫었다. 벨리타에게 필요한 인물만 아니었어도 진작 베어 넘겼을 거다.

서류를 끌어안고 있는 노타가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결국 보고를 시작했다.

“유력한 용의자가 둘 있어요. 심문 중이고 곧 자백할 것 같습니다. 독의 유통로는 찾지 못했지만 범인이 직접 소지하여 들어왔으리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검문을 통과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신체 속에 숨겨 들어왔겠죠. 신체 속에 있으면 찾을 수 없을 테니까.”

잭슨과 노타의 시선이 일제히 오웬에게 쏠렸다. 신체 속에 숨겨? 대체 어떠한 방법으로?

잭슨이 인상을 찌푸렸다. 문을 지키는 기사들을 지나치면 검문을 받는다. 가방을 뒤지고 무기를 지니고 있는지 세세하게 확인했다. 여태껏 태자궁에서 잭슨의 목숨이 대놓고 위태로운 일이 없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분명 실없는 소리이긴 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어떠한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설명해라. 어떠한 방법으로 숨겨 들어올 수 있었지?”

의자에서 침대로 걸터앉은 오웬이 눈을 가늘게 접어 웃었다. 여우 같은 녀석.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태연자약하게 구는 꼴이 같잖다. 고작해야 마탑에 틀어박혀 있는 미치광이 마법사일 뿐일 텐데. 잭슨이 고개를 까딱이며 채근하자 오웬이 입을 열었다.

“위험하기는 해도 쇠나 유리에 담아 몸에 넣으면 독에 노출되지 않죠. 정확히 어디인지는…… 부득불 말씀드려야 할까요?”

쉽게 넣었다가 뺄 수 있는 곳이라면…… 잭슨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배출할 때에나 쓰는 그곳이 아니던가. 더럽다! 토악질이 나올 지경이다. 다만 무엇보다 가능성이 높은 방법이었다. 역겹지만 그래. 충분히 가능했다.

잭슨이 인상을 찌푸리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뒤에서 오웬의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명백한 비웃음에 잭슨이 오웬을 노려보자 능청맞게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돌린다. 겨우 누그러졌건만 서서히 사나운 기색이 맴돌자 노타가 서둘러 보고를 이었다. 노타는 빨리 끝내고 나가고 싶었다.

“용의자의 신분도 확인하였는데……. 한 명은 루제린 무베라는 빈곤한 자작가의 영애이고 다른 한 명은 미테른 백작 영애입니다. 둘 다 무죄를 호소하고 있습니다만…….”

“……루제린 무베를 중점적으로 심문해라. 그자가 어디에 드나들었고 누구와 내통하였는지, 궁 밖에서 어떤 이를 만났는지까지 조사해서 가져와.”

미테른 백작가는 꽤 명망 있는 가문이다. 그 가문의 여식이 목숨을 걸고 황태자를 독살할 이유는 없었다. 독살을 계획했다면 잃을 게 없는 인물이 해내야 할 일이다. 백작 영애가 직접 나서서 독을 다루기에는 리스크가 크다. 감당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귀족들은 제 몸 귀한 줄은 너무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당연히. 잭슨의 지시에 노타는 고개를 조아리며 방에서 벗어났다. 문을 닫은 노타가 깊이 한숨을 쉬었다.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다.

노타가 방에서 벗어난 걸 확인한 잭슨이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잘 정돈된 검은 머리카락이 너저분하게 흐트러졌다.

오웬이 벨리타의 옆에 앉은 채 미소를 짓는다.

“뭘 봐.”

“꽤 똘똘하신 듯하여 기쁘네요.”

이 무슨 헛소리지? 잭슨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나이가 비슷한 남자에게 그런 말은 처음 들어보았다. 똘똘하다니. 웬 어르신이 손주에게 칭찬하는 모양새의 말을 하느냔 말이다.

오웬은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넘어가려 들었다. 잭슨이 다리를 꼬았다.

“무슨 뜻이지?”

“범인 잘 찾으실 것 같아서요. 내가 나서야 하나 고민했어요.”

“넌 이제 필요 없어. 꺼져라.”

“서운하게 왜 이러실까. 우리 한 방에서 같이 밤도 보내고, 뜨거웠잖아요?”

오소소, 등줄기부터 뒷목까지 소름이 솟았다. 잭슨이 닭살이 돋은 뒷덜미를 벅벅 문질렀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쉽게 뱉는 데다 살살 눈웃음쳐가며 웃는 꼴이 능구렁이 같았다. 입을 다물게 하려는 수작이라면 성공했다.

잭슨은 역겨움과 더러움, 혐오감에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인간은 저딴 말재간을 가지고 태어난 것인가.

그렇다면 그때의 응접실에서 나누었던 충격적인 대화도 그저 이 인간의 타고난 성정이었던 건가. 남, 여 가리지 않고 수작질을 해대는 변태였던 거다.

결론까지 도달하니 잭슨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오웬은 그 꼴을 보고 즐거워하는 모양새였다. 잭슨은 확신했다. 저 인간 성격 더럽다.

능구렁이처럼 포장했지만 성격 꼬인 변태였다. 남의 불쾌함을 즐기는 이상한 놈.

잭슨이 의자를 슬슬 밀어 뒤로 물러나자 오웬이 방긋 웃는다. 정말 즐거워 보여서 잭슨은 온몸을 휩쓰는 불쾌감을 애써 떨쳐내야 했다.

“그럼 저는 후작가에 보고하고 올게요. 후작가에서도 나서서 찾아다녀야 모양새 빠지지 않으니까요.”

맞는 말이다. 명망 높고 신분도 높은 후작가의 애지중지 공들여 키운 허약한 딸이 독을 먹고 쓰러졌는데 가만히 있으면 면이 상한다. 황태자보다 더 화를 내며 범인을 색출해야 했다. 머리가 썩 잘 돌아가는 듯 보여서 더 기분 나쁘다. 잭슨이 무심하게 손을 휘휘 내저었다.

“꺼져라. 다시 오지 마.”

“섭섭하게 또 그러신다. 금방 다녀올게요.”

“돌아오지 마!”

다급히 말을 뱉었지만 오웬은 사라지고 없었다. 분명 신분도 자신이 월등히 높은데 왜 자꾸 휘말리는 기분이 들까. 짜증 가득 섞인 손길로 머리를 탈탈 털어낸 잭슨이 벨리타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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