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궁내에서 독이 발견되었다는 것이 확실시된다면 벨리타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 어떤 이가 황태자가 주거하는 태자궁에 독을 들였단 말인가. 황태자를 노린 독살일지도 몰랐다. 자신의 숨통을 노리던 누군가의 실수로 벨리타가 피해를 입은 거라면.
손이 떨렸다. 진정할 수가 없었다. 벨리타가 신력 덕에 죽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알고 있는 것과 산산이 부서지는 심장은 별개였다. 잭슨이 노타에게 소리쳤다. 노타는 빠르게 현재 주어지는 정보들을 적어나갔다.
“응접실에서 사용했던 찻잔을 확인해. 나는 멀쩡하니 디저트와 찻주전자에는 독이 없을 거다. 그리고 그 시각에 디저트를 준비했던 ‘것’들을 잡아 와. 그 이전에 벌어진 일일 수도 있으니 오늘 드나들었던 모든 인물들을 조사해. 궁의 출입문을 모두 폐쇄하고 독을 섭취했다는 사실은 비밀리에 부쳐라. 철저히 배후에 대해 캐내. 독이 출입했던 경위도 찾아와.”
분노가 치밀었다. 참담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잭슨이 벨리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무엇보다 해독제를 빨리 구해 와야 한다. 시간이 없다. 찻잔이 있는 곳에 드나들었던 모든 인물들을 호위를 시켜 모조리 잡아 와. 심문해라. 과정 중에 죽어도 좋다. 황태자를 독살하려는 시도일지도 모른다.”
노타가 고개를 숙이고 뛰어나갔다. 잭슨이 주먹을 쥐었다. 다 죽여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왜 하필. 왜. 다른 이도 아닌 벨리타가. 혹시라도 이대로 깨어나지 못한다면. 신력이 다해 회복하지 못한다면. 속이 들끓었다.
잭슨이 엘라를 쏘아보았다. 차가운 분노로 가라앉은 서늘한 눈이었다.
“너. 당장 저택으로 돌아가라.”
“……끅, 안 돼요. 저 못 가요. 아가씨 두고 못 가요.”
“다른 놈을 보낼 수는 없다. 들키지 않게 조용히 다녀와라. 가서 후작이던 데이비드 파텔이던 데려와.”
이곳에 있는 궁의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 독을 들이고 사용한 범인을 찾지 못했다. 파텔 가에 소식을 전하는 틈을 비집고 달아날 수도 있었다. 엘라가 적격이었다. 빠르게 아무 일도 없는 듯 벨리타와 함께 돌아가는 척, 빠져나가면 되는 일이었다. 혼담을 핑계로 파텔 가의 사람과 함께 돌아오면 되었다.
잭슨이 시간이 없다며 언성을 높였다.
엘라가 쏟아지는 눈물을 닦으며 돌아갈 채비를 했다. 벨리타의 앞에 의자를 끌고 와 앉은 잭슨이 초조하게 다리를 떨었다. 폭풍처럼 온갖 감정들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버거워서 견딜 수가 없는 와중에도 폭풍의 눈에 존재한 이성이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황태자인 자신을 노리고 벌어진 독살이라면 황후의 짓일지도 모른다. 2황자를 황태자로 책봉하기 위해 술수를 쓴 것일 터였다. 목숨을 위협받은 일은 손에 꼽을 수도 없이 많았다.
황궁 파티에서 대놓고 황후를 자극했으니 티가 나는 살해 방법을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귀족들에게 만천하에 공개하여 허튼짓을 하지 못하게 하려던 강경책이었지만 괜한 자극이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혹시라도 벨리타를 노린 독살이었다면? 소문이 파다한 미친 영애 벨리타를 살해하려는 자는 누구인지. 이에 관해서는 파텔가의 사람에게 들어야 했다.
잭슨은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정확한 정보가 필요했다. 벨리타를 노린 독살이라고 가정하였을 때 범인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은.
황태자비 후보를 모조리 꺾어 놓은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무뢰한.
체르핀 공작이었다.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이어서 간섭하지 않았다. 체르핀 공작이 황태자비 후보들을 죽이고 무너트려 불구로 만들어도 눈길 한 번 돌리지 않았었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체르핀 공작가와 손을 잡으면 황제가 되기에 든든한 밑거름이 될 테니까. 추후에 자신을 위협하면 적당한 트집을 잡아 멸문시키면 그만 아니던가.
그리 생각했다. 가만두어서는 안 되었는데. 벨리타를 해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목 안쪽까지 열이 들끓는다. 배후가 무엇이든 풍비박산을 내주리라. 황후가 저지른 일이든, 체르핀 공작이 저지른 일이든 증거만 손안에 들어온다면 어떻게든 물고 늘어져 무너트릴 것이다.
감히.
나에게.
나의 것에게 허튼짓을 한 대가를 치르게 할 테다.
채비를 끝낸 엘라가 서둘러 뛰어나갔다. 엘라가 나가자마자 황궁의 문은 닫힐 것이고 집요한 조사가 시작될 것이다.
잭슨은 허리를 곧게 폈다. 벨리타는 죽지 않을 거다. 독의 종류를 조사해 해독제를 찾을 것이고, 신력도 있으니 죽기 직전에 눈을 뜨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이 죽게 두지 않을 테다.
하얗게 질린 벨리타의 손을 잡았다. 초조하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잭슨이 황태자라서? 목숨을 노리는 적들이 많아서? 파텔 가문에 적이 많은 탓에? 황태자비를 갈아치운다는 소문 때문인가? 아니다. 그저 잭슨이어서. 행복해서는 안 될 괴물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을 죽인 잔악무도한 괴물이어서 벌을 받는 거다.
사람들의 숨을 앗아갔기에 생긴 인과응보였다. 어미를 죽이고 거슬리는 것들을 칼로 치워내며 피로 환락을 벌였다. 그 벌을 벨리타가 받을 뿐. 잭슨이 사랑하는 사람인 이유로 대신하여 죄를 감당해야 하는 거다.
문을 두드린 하녀가 숨을 몰아쉬며 벨리타의 잔에서 찾은 독극물의 이름을 외쳤다.
시루에. 섭취할 시, 10분 내외로 천천히 몸에 퍼져나가 혈관을 마비시키는 독극물. 서서히 신체를 굳게 만들어 고통스럽게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이었다. 치료가 늦으면 불구로 살아야만 하는 치명적인 것.
의원이 하녀에게 해독제의 이름을 외치며 가져오라 일렀다. 빠른 시간 내에 독의 정체를 찾아낸 것은 대단한 일이었지만 일 분이 하루 같았다. 조급해져서 안달이 났다. 궁내를 뒤져 해독제를 가져오면 독살에 성공했다는 소문이 돌 터였다. 사람들이 알게 해서는 안 된다. 독살의 위협에도 건재한 모습을 보여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궁 밖에서 해독제를 찾아와야 한다. 시간이 필요하다. 한시가 급해 답답했다. 벨리타의 호흡이 점차 거칠어졌다가 수그러들기를 반복한다.
벨리타의 손에 입을 맞췄다. 할 수 있는 게 이따위의 것밖에 없었다. 대신 아플 수도, 해독제를 만들 수도, 자리를 비울 수도 없어서. 무력하게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삼키며 벨리타가 온전히 눈을 뜰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하늘에 장막이 드리워진다. 어둠이었다.
*
저택의 열어젖히고 눈물과 콧물을 질질 짜며 헐레벌떡 들어온 엘라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예의에 어긋나 하면 안 될 일이었지만 엘라는 다급했고 아가씨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도련님을 찾아 저택을 울리는 엘라의 목소리에 사용인들이 몰려들었다. 데이비드가 책을 읽다 말고 뛰어나왔다.
“무슨 일이야?”
가운을 걸친 데이비드가 계단을 내려왔다. 데이비드는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느꼈다. 오랜 시간 익혀 온 눈치였다. 벨리타의 껌딱지인 엘라가 혼자 돌아왔고 통곡을 하며 차기 가주인 자신을 찾는다. 벨리타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 황궁에서 또 쓰러진 걸까. 데이비드가 이를 빠득 갈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엘라가 바닥을 손끝으로 긁었다. 어린아이는 이 상황에서 침착할 수 없었고 당연하게 말도 정돈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제일 중요한 정보는 정확히 전달했다는 점이다.
“아가씨께서…… 아가씨께서 독을 드셨어요!”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누가 뭘 먹어? 잡초까지 뜯어다가 이상한 걸 해 먹더니 독까지 골라 잡순 걸까.
자세히 들어야 했다. 태자궁으로 엘라를 데리러 간 벨리타가 왜 독을 먹었는지. 범인은 누구고 무슨 이유로 독을 먹였는지 찾아야 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고자 하지만 쉽지 않다.
겨우 가까워진 누님이다. 유일하게 자신을 필요로 해 주는 가족이었다. 끝까지 인정받지 못한 이곳에서 목표를 간직하게 해 준 소중한 존재다. 미친 척까지 해가며 하고 싶은 일을 겨우 해내는 안타까운 누님이었고 아직 삶의 목표도 찾지 못한 불쌍한 사람이었다. 고작 수도를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기뻐했는데.
이렇게 죽는다고?
그간 앓아누워서 아군도, 적도 없다. 파텔 가에 원한이 있는 자라면 차기 가주인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당연하다. 어느 누가 있는지도 몰랐던 허약한 미친 여식에게 해를 가한단 말인가. 벨리타가 독살을 당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단 하나. 황태자비가 되려 한다는 소문 하나 정도 외에는.
피가 차게 식는 감각이 들었다. 황태자를 노렸다면 바보처럼 일을 그르칠 리 없다. 독살을 시도했으면 확실하게 잭슨을 해쳤을 거다. 황후는 바보가 아니었다. 멍청한 2황자라면 몰라도.
벨리타에게 독을 먹인 범인이 누구인지 짐작이 된다. 벨리타를 노릴 수밖에 없는 가문. 체르핀 공작가.
어떻게 하지. 너무도 노골적인 피해였다. 무력으로 압도적인 공작가와 어찌 대적할 수 있을까. 권력 싸움을 한다고 해도 이길 수 있나?
데이비드가 혼자 결정할 수 없는 사안이다. 지금 당장 파텔 영지에 편지를 보내 알려야 한다. 전서구를 날려야 할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데 몸은 굳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손이 덜덜 떨린다.
데이비드는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한탄스러워졌다. 그간 똑똑한 척이나 하다가 실질적인 위험이 닥치니 멍청하고 무능한 자신이 원망스럽다. 감정에 휩쓸려 굳어 버린 모습이 혐오스러울 만큼 끔찍했다. 눈물이 나온다. 너무도 복잡한 속이 버거워 눈물이 나왔다.
순식간에 저택 내가 소란스러워졌다. 엎어져 우는 엘라를 일으켜 세우려는 사람들과 굳어 버린 채 눈물만 흘리는 데이비드를 챙겨 진정시키려는 사람들. 어찌하면 좋나 입을 열어 떠드는 사람들 탓에 저택에 소음만 울렸다.
뒤에서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퍼졌다. 이윽고 길게 뻗은 손이 데이비드의 뒤통수를 감쌌다.
“침착해. 울더라도 머리를 굴려.”
무표정한 오웬이었다. 막 씻고 나온 탓에 하얀 셔츠를 대충 풀어 헤친 오웬이 데이비드의 뒤통수를 투박하게 쓰다듬었다.
데이비드가 고개를 돌려 오웬을 바라봤다. 차갑게 이성만이 내려앉은 침착함. 데이비드가 울음을 삼켰다. 머리를 굴리려고 해도 쉽지 않다.
오웬이 하녀에게 편지지와 펜을 가져오라고 명령한 뒤 데이비드에게 의견을 얹었다.
“해독제를 구하려면 오래 걸릴 거야. 태자궁에 순간이동 해서 벨리타가 먹은 독을 알아 올 테니 해독제를 취급하는 곳이 있으면 말해. 당장 움직여야 하니까.”
“…….”
“그리고 내가 가면 넌 편지를 써서 후작님께 전달하고.”
“……네. 알겠습니다. 해독제를 취급하는지 모르겠지만…… 수도에 있는 로틀 남작이 상단을 운영하니 빠르게 구할 수 있을 겁니다.”
“그 녀석 이름이 여기서 나올 줄은 몰랐네…….”
들릴 듯 말 듯 작게 중얼거린 오웬이 데이비드의 어깨에 힘을 담아 내리쳤다. 얼얼한 고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