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
“못 가.”
“갈 거야.”
“가지 마.”
“어허, 또 떼쓴다.”
이럴 줄 알았다. 엘라를 데리러 왔더니 잭슨이 기다리고 있었다. 엘라만 몰래 데려갈 생각이었는데. 인생은 원래 쉽지 않은 법이지.
응접실에 앉은 벨리타가 과자를 씹었다. 이렇게 매번 매달리니 귀찮다. 떼어내는 것도 일이다. 심드렁한 얼굴로 앉아 있으려니 잭슨이 벨리타의 옆에 찰싹 붙어 껴안는다. 머리에 볼을 기대어 비비적거리는 게 심히 귀찮다.
문이 열렸다. 엘라가 쭈뼛거리며 응접실로 들어오다 벨리타를 발견하고 안색이 밝아졌다. 엘라는 벨리타가 오기 전부터 다짐했다. 어떻게 자기를 두고 갔냐며 밉다고 투정도 부리고 품에 안겨서 사과를 받을 계획이었다. 인상을 찌푸려야 하는데. 아가씨, 절 두고 가니까 좋았어요? 머릿속에서 수십 번 생각하던 대사였다. 까칠하게 굴자.
“아가씨, 데리러 오셨군요!”
“아니, 나도 잡혔어.”
이런 바보 멍청이! 엘라는 벨리타를 너무 좋아하는 자신이 한탄스러워졌다. 엘라의 시선이 벨리타의 옆을 향했다. 잭슨이었다. 아가씨의 껌딱지 포지션은 엘라였다. 같은 여자여서 누릴 수 있었던 스킨십이……!
잭슨의 앞에서 차마 드러내지 못하고 속으로 주먹을 바들바들 떨었다. 언젠가 부숴버리겠어. 하지만 언제나 부서지는 건 엘라였다.
엘라는 종종걸음으로 벨리타의 뒤에 섰다. 벨리타가 엘라를 돌아본다.
기지배……. 얼굴이 반질반질한 거 보니 호화로운 대접을 받았나 본데. 데리러 오지 말걸 그랬나.
벨리타가 무념무상의 상태에 접어들자 잭슨이 벨리타의 허리를 잡는다. 번쩍, 벨리타를 들어 올리곤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세상 시발……. 수치스럽다. 나이 오십 먹고 아들 뻘 아이에게 둥가둥가나 당하는 신세라니. 세상 정말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잭슨이 숨을 크게 들이쉰다. 변태 같았다. 잭슨이 벨리타를 잡고 자세를 바꾸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나 뭐라나.
억 소리 날 만큼 값비싼 소파에 발을 얹은 벨리타가 잭슨의 허벅지에 엉덩이를 댔다. 등을 단단히 받친 팔에 기대어 잭슨의 어깨에 볼을 묻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편하다. 젠장.
얌전한 벨리타가 드문 탓에 잔뜩 들뜬 잭슨이 벨리타의 허리를 끌어안는다.
“후작과 이야기 나누고 왔나?”
“아. 황태자비?”
주인이 뱉은 산책 소리에 꼬리를 프로펠러처럼 돌리는 강아지처럼 들떠 있었다. 벨리타는 거짓말을 해 줄까 하다가 말았다. 잭슨에게 말 한 번 잘못하면 그대로 발목 잡힌다는 걸 시달림 끝에 깨달은 덕이다.
“했지. 했는데 좀 더 생각해 보려고.”
잭슨이 눈에 띄게 시무룩해진다. 말이 시무룩이지 인상을 잔뜩 찌푸려 살벌한 낯짝을 해 보였다. 아이고 무섭다.
벨리타가 손을 뻗어 잭슨의 볼을 잡아당겼다. 주욱 늘어난다. 떡이야 뭐야. 반대 볼도 잡아 당겼다.
“황태자비가 되겠다 하지 않았나. 날 속였어?”
“아니, 걸리는 게 하나 있어서.”
주욱 늘어나는 볼 탓에 잭슨의 발음이 샌다. 조오금 귀여운 것 같기도. 거치적거리는 건 죄다 치워주겠다는 다정한 마음이 함빡 담긴 살기 어린 눈이 번뜩였다. 눈깔 또 돈다. 벨리타의 손이 눈을 가렸다.
“파혼하면 소르니 공녀는 어떻게 되나 싶어서.”
딱딱한 손이 벨리타의 손목을 잡아 내린다. 손바닥에 볼을 기대며 벨리타의 손등에 손을 겹쳤다.
“그게 무슨 상관이지?”
“미안하잖아. 파혼했다고 죽으면 어떡해?”
“그게 뭐?”
벨리타의 상냥한 마음씨가 드러나는 말이었다. 엘라는 눈을 가늘게 떴다. 온실에서 신랄하게 소르니를 비꼬던 벨리타가 기억나서였다. 그런 걱정을 하실 거였다면 진즉에 하셨어야……. 엘라는 고개를 도리질 쳤다. 아무렴 어떤가.
벨리타의 엄지가 잭슨의 볼을 쓸었다. 잭슨의 사나운 눈이 부드럽게 접혔다. 고개를 돌려 벨리타의 손바닥에 가볍게 입술을 문지른다. 간지럽다.
“난 소르니 공녀가 피해 입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해하지 못했다. 잭슨의 태도가 설명했다. 신경을 써야 하는 이유도, 걱정을 하는 이유도 이해하지 못한 티가 났다. 동정과 죄책감은 잭슨의 삶과 거리가 멀었다. 접해 본 적 없는 감정이었으니까. 공감조차 할 수 없다.
그럼에도 고개를 주억거리는 건 벨리타가 원했기 때문이다. 소르니를 보호해서 벨리타를 가질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해낼 수 있었다.
착하다.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말이 좋았다. 벨리타만이 해주는 다정한 단어. 정말 자신이 착한 사람이라 착각하게 해 주는 말이었다. 더 좋은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 주는 마법 같은 문장.
잭슨이 사르르, 말갛게 웃었다. 벨리타도 미소 지었다. 부탁을 들어주면 지어 주는 미소가 좋다. 보드라운 작은 손이 자신을 쓸어 주는 것도 좋다. 안정감이다. 그토록 갈구했음에도 얻을 수 없었던 안정감이었다.
벨리타의 요구만 이루어 주면 독점할 수 있다. 잭슨이 벨리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쪽, 적나라한 소리가 벨리타의 손가락 마디마다 번져나갔다. 얼굴이 붉어진다. 자잘하게 입술을 내리누르던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잭슨이 녹음으로 빛나는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시선을 피했다.
“할 말도 다 했으니 이제 가야지.”
“왜지? 더 있다가 가.”
“나도 할 일 많거든요. 너도 일하고.”
어허, 오리 주둥이. 잭슨의 입이 쏙 들어간다. 얇은 손가락이 검은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장난스럽지만 세심했다. 손가락에 얽히는 매끄러운 머리카락들이 흐트러졌다.
마저 차를 비워낸 벨리타가 잭슨의 허벅지에서 벗어났다. 덥석, 허리가 잡힌다. 잭슨이 벨리타의 등허리에 얼굴을 기대었다. 아이처럼 칭얼댄다.
“소르니 공녀의 일이 잘 해결되면 그때 약혼하자.”
“……우으.”
“그 전에 또 올게. 매번 이러면 안 온다?”
움찔한다. 놓고 싶지는 않지만 미움받기 싫어 어쩔 줄 몰라 했다. 위에서 맑은 웃음소리가 맴돈다. 잭슨이 부루퉁하게 웅얼거렸다. 허리에 묻은 얼굴을 문지른다.
“내가 가면 된다. 억지로라도 잡아둘 거야.”
“어허. 그러면 내가 뭐라고 했지?”
“뒈지게 얻어터진다.”
그렇지. 허리에 빠듯하게 둘러진 팔을 가볍게 두드렸다. 머뭇거리던 팔이 떨어져 나갔다. 벨리타는 상체를 뒤틀어 잭슨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불만 가득하게 올려다본다. 벨리타가 잭슨의 양 볼을 감싸 누른다. 입술이 불퉁하게 튀어나왔다.
“갖고 싶다고 가질 수 없는 게 사람 마음이야. 알지?”
너무도 잘 안다. 가질 수 있었다면 이미 취했을 터였다.
“처음부터 사이가 좋은 건 축복이고. 마음을 얻고 싶다면 그만큼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해. 맞춰가고, 배려하고 알아가는 과정이 어렵지. 그래도 돌아보면 그 과정도 즐거웠다고 생각할 수 있을 거야. 추억이 쌓이는 거잖아.”
대답은 없었다. 벨리타는 답을 바라지 않았다. 잭슨의 말랑한 볼을 지그시 누르며 미소 짓는다.
“지금 이 순간도 돌이켜보면 좋은 추억이 될 거야. 그러니까 매 순간마다 충실해야지.”
추억이랄 것도 없었다. 벨리타와 만난 그날부터 잭슨의 시간은 움직였다. 기억은 무수했지만 추억은 텅 비어 있었다. 벨리타와의 시간이 켜켜이 쌓인다.
밤마다 벨리타와 보냈던 순간을 회상하고 후회했다. 자신이 더 사람다웠으면 좋았을 텐데. 더 잘할 수 있었을걸. 잘못에 부끄러워하는 것조차 아까웠다. 서로 언성을 높이고 다툴 시간에 더 나은 만남을 가졌으면.
후회는 사람을 발전시킨다. 잘못은 사람을 돌아보게 하고 후회를 거쳐 더 나은 모습을 갖게 한다. 잭슨은 멈추어 있던 어린아이의 시절에서 자라났다. 서서히, 싹이 움트듯 느리지만 단단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추억이 쌓이길 바라서. 후회할 시간조차 아쉬웠으니까. 즐거웠던 순간을 곱씹기에도 바빴다. 만남을 기대하며 준비하기에도 빠듯하다.
잭슨은 깨달았다. 헤어짐이 있기에 다음 만남을 설레할 수 있다는 걸. 자신이 밟고 지나왔던 흔적들을 되짚으며 다듬어갈 시간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웃으며 보내주어야 웃는 모습으로 추억이 남는다는 것을 알았다. 헤어짐이라고 언제나 슬프고 비참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벨리타를 보내주면 또 찾아와 줄 거다.
오늘의 기억이 추억으로 남고, 그 훗날의 만남이 또 다른 추억으로 남게 된다. 언제 올까 기대하며 들뜨는 감각과 만남으로 인해 벅차오르는 행복감이 헤어짐이 있기에 존재했음을.
매서운 눈이 가늘게 접혔다. 순수한 미소였다. 벨리타는 잭슨의 볼을 천천히 문지르다가 머리를 헤집었다. 정돈된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뻗었다. 장난기 가득 넘치는 웃음이 터진다.
잭슨은 소리 내어 웃었다. 이 순간도 추억으로 남겠지. 겨울의 시린 냄새, 창문 너머로 퍼지는 햇살, 차의 향과 섞인 벨리타의 꽃향기가 떠오르면 그 기억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와. 기다리고 있겠다.”
“또 올게. 밥 잘 먹고.”
깔끔한 작별 인사였다. 잭슨에게서 들을 수 없었던 개운한 인사. 아들을 키우는 기분이다. 첫째가 이 나이 즈음에는 이렇게 잘 자라 있었겠지. 벨리타가 엘라를 데리고 응접실을 벗어났다.
잭슨은 소파에서 일어났다. 전과 같은 비참함과 서러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찾아올 만남을 기대하며 기지개를 켰다.
벨리타가 응접실에서 나오니 노타가 반갑게 인사했다. 영 껄끄러웠다. 어색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지나쳤다.
노타는 서러웠다. 잭슨과는 사이가 좋으면서 잘 챙겨준 자신에게는 까칠하게 대하는가. 노타가 응접실의 문을 열려는 순간, 벨리타가 한 걸음을 내딛자 몸이 기울어졌다. 앳된 엘라의 비명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아가씨!”
“벨리타 영애!”
황궁에서의 세 번째 기절이었다.
*
하얗게 질린 잇새로 거친 숨이 토해졌다. 벨리타의 상태를 진료한 의원의 얼굴도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다리를 덜덜 떨던 잭슨이 의원을 채근했다. 엘라가 눈물을 펑펑 쏟으며 벨리타의 손을 붙잡고 있었고 노타는 기록을 위해 펜을 종이에 콕콕 찌르고 있었다.
“상태가 어떤가.”
의원이 하녀에게 급히 적어 내린 종이를 건넸다. 하녀가 뜀박질을 서둘렀다. 급박한 상황이었다. 잭슨은 초조한 마음에 방을 하염없이 빙빙 돌았다.
“상태가 어떠하냐 물었다.”
조급함을 견딜 수 없었다. 잭슨의 살기를 띤 질문에 의원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말을 더듬으며 황급히 쏟아냈다.
“독을 섭취하신 것 같습니다. 증상이 늦게 나타난 걸 보아 종류를 추릴 수 있지만……. 그 탓에 무슨 독을 취하셨는지 정확히 알아내기 어렵습니다. 궁에서 드신 것들 중 하나일 테지요. 하녀를 시켰으니 사용하셨던 찻잔과 음식을 가져올 수 있을 겁니다.”
몰랐다. 피가 차갑게 식었다. 응접실에서 함께 먹었던 디저트가 원인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