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벨리타가 툴툴거리며 편지지를 도로 접었다. 잭슨이 엘라를 붙잡아 달아나지 못하게 가두어뒀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벨리타가 귀찮으니 내일 가야겠다는 일정을 세웠다. 잭슨을 보기에도 묘한 상황이니. 오웬이 밍기적대며 일어났다.
“황태자야?”
“아니, 엘라. 그 왜 나 졸졸 따라다니는 여자애 있잖아.”
아, 걔. 오웬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벨리타의 어깨에 팔을 얹은 오웬이 몸을 기댄다. 묵직한 무게감에 벨리타가 성질을 내며 오웬의 등짝을 때렸다. 오웬이 휘청거리며 고꾸라진다.
꼭 매를 벌어. 벨리타가 일갈했다. 오웬은 바들바들 떨며 등짝을 문지른다. 작은 손에서 무슨 힘이 나와 이리도 아픈지. 억울함을 가득 담아 데이비드를 보자 모르는 일이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 친구 아니었냐고. 서러워서 진짜.
얼얼한 등짝을 가지고 오웬이 조심스레 벨리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데이비드의 눈이 가늘어진다. 벨리타가 사람도 많은데 무슨 짓거리냐 오웬의 팔뚝을 약하게 때렸다. 하녀들과 데이비드의 시선이 둘에게 쏠린다. 오웬이 눈썹을 늘어트리며 억울함을 꾹꾹 눌러 담아 소리쳤다.
“순간이동 하는 거거든!”
“오메.”
순간이동이다. 이럴 때만 보면 진짜 마법사 같았다. 순간이동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얌전히 오웬에게 안긴다. 들떠 보였다.
오웬이 헛웃음을 뱉으며 단단히 끌어안는다. 벨리타는 귓가에 흩어지는 주문을 들으며 데이비드에게 손을 흔들었다. 부럽지? 나 순간이동 한다?
즐거워 보이는 벨리타를 차게 식은 얼굴로 바라보던 데이비드가 마지못해 손을 흔들어줬다.
빛이 쏟아진다. 눈이 부셔 감았다가 뜨니 둘은 사라져 있었다. 데이비드는 지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잠시 후 벨리타가 도착한 곳은 모르는 곳이었다. 오웬에게 안긴 채 주위를 둘러보던 벨리타가 고개를 들었다. 사람 없는 곳으로 납치해 어떻게 하려는 속셈이지! 장난스럽게 웃으며 오웬의 팔뚝을 가볍게 찰싹 두드렸다.
오웬이 음산하게 미소 지었다. 천천히 다가온 입술이 벨리타의 귓가에 머무른다.
“맞아. 널 해부해서 실험체로 사용하려는 미친 마법사다.”
억지로 낮게 깔아뭉갠 목소리가 짓궂었다. 긴 머리카락에 파묻힌 귓가에 후우, 숨을 불어넣는다. 뒷덜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벨리타는 꺄르르 웃으며 오웬의 품에서 버둥거렸다. 어깨를 붙잡은 손이 얇은 허리를 쥐어 달아나지 못하게 단단히 결박했다. 낮은 구두를 신은 발이 허공을 구른다. 웃음이 가득 섞였다.
“살려주세요~!”
아무리 버둥거려도 허리를 붙든 손은 미동도 없었다. 든든히 지탱한 덕에 벨리타는 오웬의 품에서 펄떡거릴 수 있었다.
실없는 장난질이 끝나자 오웬은 벨리타를 마른 잔디 위에 내려주었다. 웃음이 남아 숨이 가쁜 벨리타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쏟아졌다. 오웬이 벨리타의 머리에 툭, 손을 얹는다. 손가락 끝에서부터 은은한 빛이 퍼져 나와 벨리타를 휘감았다가 사라진다.
따뜻하다. 외투도 챙겨오지 않아 걱정했던 참이었다. 마법을 썼느냐 물었더니 보온 마법이라며 다들 하는 쉬운 마법이라고 했다.
벨리타는 쉬운 마법도 하지 못했다. 자신도 마법을 쓰고 싶었다. 소설 속까지 들어왔는데 마법 하나 제대로 써 보지 못하고 돌아가면 퍽 아쉬웠다. 다른 건 몰라도 마법만큼은.
“여긴 어디야? 연구실에서 하는 거 아니었어?”
“들어 보니까 마력을 읽는 법부터 알아야 한다기에.”
주위 마법사들에게 캐묻고 다녔던 덕이다. 날 때부터 마력은 마르지 않는 우물이었고 자유자재로 능숙히 다루었던 천재였던지라 몰랐다. 마력을 읽고 운용하는 법을 깨우쳐야 서서히 서클을 만들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재수 없다는 짜증을 숨 쉬듯 듣고 나서야 벨리타에게 가르칠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오웬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깊이 삼킨 숨을 뱉어내자 순간 미동도 없던 공터에 날쌘 바람이 휘날렸다. 마른 잔디가 뽑혀나갈 듯 흔들리고 굳게 서 있던 나무들이 가지들을 떨궜다. 회오리가 쳤다. 갑작스러운 거센 바람 탓에 중심을 잃은 벨리타가 헛발질을 했다. 몸이 맥없이 흔들린다. 폭풍과도 같은 흐름 속에서 오웬만이 흔들림 없이 서 있었다. 오웬의 짓이었다.
“마력을 방출했어. 느껴져?”
느껴지기는 개 코딱지가. 호흡이 버거울 정도의 바람이었다. 마법사들은 또라이었고 마탑은 또라이 집합소였다. 벨리타에게 활용한 교육 방법은 거칠다 못해 미친 수준의 난이도였다. 사자 새끼를 낭떠러지에 떨어트리고 알아서 살아 기어 올라와라 하는 방식이었다. 천재 만재 오웬이 알 리 없었다.
견디지 못해 벨리타가 넘어지며 주저앉았다. 온몸을 압박하며 짓누르는 감각이었다. 난폭한 기운이 벨리타를 압도했다. 나 뒈져. 구라 아니고 진짜 뒈져!
벨리타가 소리쳤지만 회오리치는 소음에 묻혔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닿지 않는다. 풀어헤친 머리가 연신 싸대기를 날렸다. 아프다. 가슴이 답답했다. 공기에 먹혀 들어간다.
“집중해! 네 마력을 이용해서 네 공간을 만들어봐!”
그게 뭔데, 이 썅눔 새끼야. 공간이고 나발이고 마력도 못 느낀다. 할 수 있는 거라곤 휘몰아치는 바람에 몸이 날아가지 않도록 마른 잔디를 뜯으며 버티는 것이다.
숨이 가쁘다. 공기가 전부 오웬의 마력이었다. 괴로웠다. 죽기 싫으면 마력을 느껴야 했다.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두드리는 마력을 느끼려 오감을 세웠다. 폐부까지 깊이 들어차는 무거운 공기가 버거웠다.
그딴 거 존나게 모르겠고 그냥 뒈질 것 같았다. 이쯤 되니 충돌하는 게 마력이 아니라 성깔이 아니었을까. 신력과 본래의 더러운 벨리타 성깔이 충돌해 아팠던 거다. 마력은 느껴지지도 않는다.
이거 노인 공격 아니냐고. 어르신을 공경하지 못할망정 공격이나 하는 거다. 죽으라고 고사를 지내는 것과 다를 게 뭐냔 말이다.
염병, 살려주세요! 집에 웬수 같은 딸내미가 토끼 눈 뜨고 기다리고 있어요!
고개를 미친 듯이 저었다. 안 된다. 마력은 무슨. 숨이 넘어가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시야가 점점 흐려졌다. 오웬의 모습이 두 갈래로 나뉘어 졌다가 흐려지길 반복한다. 오웬은 벨리타가 기절해서야 그만둘 모양이었다.
거센 바람이 벨리타의 머리를 후려친다. 긴 머리가 허공에 펄럭거렸고 치맛자락이 뒤집어진다. 이래서 여기까지 온 거였다. 개새끼.
호흡이 아득해진다. 뭐라도 해야 한다. 풀을 뜯는 손이 얼어붙은 흙더미를 쥐었다. 손이 자잘한 상처로 헤진다. 침착하자. 뭐라도 하나 건져서 돌아가야 했다. 내가 이 나이에 이러고 있다. 눈을 감고 숨을 정돈했다. 폐 깊은 곳에서 날뛰는 오웬의 마력에 집중했다. 어렴풋이 느껴진다. 공기와 다른 무언가가. 벨리타는 오웬의 마력을 감지했다. 공격적이고 불쾌한 기류.
감각이 트였다. 푸른 기류가 공간을 난폭하게 휘젓고 있었다. 그 이후로는 순조로웠다. 본능적으로 단전에서 솟구쳐 오르는 마력을 휘둘렀다. 악이었다. 살기 위해 부리는 악.
정제되지 않은 거친 힘이 오웬의 것을 파고들어 궤도를 바꾼다. 삽시간에 벨리타의 주변이 고요해졌다. 옅은 빛이 벨리타를 둘러쌌다.
공기가 가볍다. 맑다. 고개를 들어 오웬을 바라보자 오웬이 박수를 치고 있었다. 썅눔 새끼. 어른 공격하고 손뼉이나 치고 앉았다. 숨이 편해지니 일어서는 것도 쉬웠다. 오웬의 마력을 쳐내 기류를 바꿔가며 오웬에게 다가갔다. 힘의 차이가 커 오웬의 것을 피하는 게 고작이었지만 오웬의 코앞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벨리타의 손이 올라갔다. 오웬이 마주 손을 뻗었다. 무척 기쁘고 들떠 보이는 오웬의 얼굴을 비켜간 벨리타의 손이 어깨로 돌진한다. 짜악! 휘몰아치는 힘 못지않은 매서운 손길이었다. 벨리타의 손이 오웬의 어깨를 후드려 팼다.
아악! 오웬이 어깨를 감싸 쥐며 상체를 숙였다. 하이파이브 아니었냐고……. 회오리치던 마력이 고요해졌다. 오웬이 마력을 끊어낸 것이다.
어깨부터 시작된 매타작은 등짝까지 이어졌다. 손에 닿는 대로 휘둘렀다. 오웬이 무릎을 꿇고 단말마를 내질렀다.
“아파, 아파! 악!”
“아파? 너 죽고 나 죽자, 이 새끼야!”
오웬은 억울했다. 벨리타를 위해 재수 없는 새끼라는 욕까지 얻어먹고 마법사들의 술식 풀이까지 도와줬다. 평소의 오웬이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짓이었다.
빠른 습득과 효율적인 시간 활용, 그야말로 완벽한 수업이었다. 심지어 벨리타가 성공하지 않았나. 왜 화를 내는지 알 수 없었다.
흠씬 두들겨 맞은 오웬이 처량하고 가련하게 주저앉아 우는 체를 했다.
씨근덕거리던 벨리타가 화를 참지 못하고 한탄했다. 내가 이 나이 먹고 개고생한다, 저 새끼가 사람 죽이려 들었다, 죽을 뻔했다…….
오웬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억울하다, 완벽한 수업이었다는 둥 변명했지만 벨리타에게 닿지 않았다. 벨리타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낯선 기운이 몸속을 맴도는 것이 느껴졌다. 마법사들은 이런 뭣 같은 감각을 느끼면서 산단 말인가.
그래도 성공했으니 됐다. 마력을 느끼게 되었으니 다루는 것도 일사천리일 테고 서클까지 만들 수 있을 거다. 고생시킨 오웬이 얄미웠지만 좋은 게 좋은 거다. 벨리타는 오웬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바들거리며 일어선 오웬이 온몸을 손바닥으로 문지른다. 벨리타가 새침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엄살은.”
“진짜 아프거든?”
“오늘 수업은 이걸로 끝이야?”
“음, 마력을 다룰 줄 알아야 해. 날 봐.”
길게 뻗은 손이 활짝 펴졌다. 그 위로 푸른빛이 일렁거리며 뻗어 나왔다. 손가락을 휘두르는 대로 빛이 이동해 반짝거렸다. 신기하다. 밤에 본다면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울 것 같았다.
한참 빛을 가지고 놀던 오웬이 주먹을 쥐자 파스스, 빛이 흩어졌다. 어떻게 했을까. 해 보고 싶었다.
“이번 주까지 해 와. 숙제야.”
이 새끼가. 벨리타가 약이 바짝 올라 오웬을 꼬나봤다. 살기를 느낀 오웬이 황급하게 말을 덧붙인다.
“실체가 드러나지 않아도 돼. 네가 느끼는 네 마력을 다뤄 봐.”
남에게 제 마력을 드러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 그저 휘두를 줄만 알아도 오웬은 괜찮았다. 벨리타의 마력을 감지할 수 있었고 어느 색의 빛을 내며 반짝이는지도 알고 있었다.
아직도 꼬나보는 벨리타의 허리를 장난스레 끌어안은 오웬이 눈을 접어 웃는다.
“잘했어. 멋있었어, 벨리타. 대단해.”
사나운 눈이 순해졌다. 칭찬에 약한 모양이다. 매섭게 일그러졌다가 수줍게 미소 짓는다. 내리깐 눈과 올라간 입매가 봄에 핀 작은 들꽃 같았다. 잔뜩 넘칠 정도로 칭찬을 퍼부어 흐물흐물하게 만들고 싶은 생각도 든다.
오웬이 숨죽여 웃고는 주문을 읊조렸다. 빛과 함께 껴안은 둘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넓은 공터를 걸레짝처럼 만들어 놓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