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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53화 (53/150)
  • 53화.

    오웬의 팔을 붙들었다. 오웬의 몸이 벨리타를 향해 돌아갔다.

    “얼마나 걸릴 것 같아?”

    “글쎄…….”

    맑은 눈이 벨리타의 얼굴을 응시한다. 무엇을 고민하는지 알 수 없다. 맑게 빛나는 노란 눈이 한참을 고민에 잠겼다. 한참이 걸릴까. 몇 년이라는 세월이 걸릴지도 모른다. 황태자와의 결혼이 불가피할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면.

    “내 옆에 붙어서 실험하게 해주면 내년 안에는 가능할 것 같은데.”

    일 년이 걸린다는 소리였다. 벨리타가 껌딱지처럼 붙어 있어도 일 년이 걸린다. 황태자와 결혼해 황태자비가 된다고 해도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일 년이나 필요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역시 둘 다 포기할 수 없다. 황태자비가 되어도 돌아가지 않는다면 오웬이 필요하다. 다만 황태자비가 되는 과정에서 오웬과 하루 종일 붙어 있을 수는 없었다.

    오웬의 손이 벨리타의 뺨을 쓸었다. 나긋나긋한 말투였다. 단정히 다듬어진 고운 얼굴이 봄볕처럼 따스하게 물들었다.

    “뭘 고민해. 얘기해 봐.”

    이야기해도 될까. 벨리타의 입이 다물어졌다. 말하고 싶다. 할 수 있으면 하고 싶었다.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오웬은 다 알고 있어. 괜찮아. 말해도 괜찮아. 단단한 팔을 붙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삼켜온 것들이 많아 목 끝까지 차오른 채였다. 가볍게 얘기할 수 있을까. 오웬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따스하게 바라보는 낯에 홀려서. 볼을 쓰다듬는 손길이 간지러워서. 다정함이 배어나는 오웬에게 눈이 가려져서 벨리타는 앙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

    매서운 파열음이 울렸다. 높은 구두를 신은 발이 주춤, 갈피를 잡지 못해 비틀거리다가 중심을 잡는다. 햇빛이 짙게 내려오는 집무실이었음에도 서늘한 어둠이 깔려 있었다.

    빛을 등지고 선 남자의 두툼하고 살이 찐 손가락에 보석이 박힌 반지들이 그득했다. 남자의 눈이 어둡게 번뜩였다. 탐욕스럽고 욕망이 뒤섞인 탁한 눈이었다. 반지를 고쳐 낀 남자는 값 비싼 원목으로 제작된 지팡이를 짚었다. 지팡이와 바닥이 부딪히는 소리가 섬뜩했다.

    “입이 달려 있으면 무어라 말을 해 봐라.”

    “…….”

    지팡이가 공중을 가르고 휘둘러졌다. 남자의 앞에 서 있던 가는 몸이 지팡이에 맞아 비틀거린다. 드레스에 가려져 드러나지 않는 부근을 집요하게 후려친다. 배, 등, 허리.

    두들겨 맞는 몸이 휘청일지언정 목소리 하나 새어 나가지 않았다. 구타에 익숙해 보였다. 으레 있는 일인 양, 덤덤히 가는 몸을 내어 준다.

    “고작 후작가의 여식이다. 고작!”

    기름이 낀 목소리가 무겁게 울려 퍼졌다. 폭력에 시달린 육체가 잘게 떨린다. 멍이 가득히 진 팔을 붙잡고 중심을 잡아 섰다. 지팡이의 끝이 어깨를 거칠게 쿡쿡 찔러온다.

    “말을 해 보란 말이다! 이 버러지야!”

    소르니가 고개를 든다. 지팡이에 떠밀린 어깨가 쑤셔온다. 반지를 낀 손으로 후려쳐진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매질을 그리 당했음에도 얼굴만은 멀끔했다. 남자, 체르핀 공작은 인상을 찌푸리며 지팡이로 소르니의 머리를 내리쳤다. 연약한 몸이 충격에 기울어졌다.

    “파텔 후작가의 여식이 태자궁을 자주 드나들었다는데, 그것 하나 눈치채지 못해?! 네가 대체 할 줄 아는 게 뭐냐! 황실 파티도 몸에 멍이 가득하다는 핑계로 불참하고, 하루가 멀다 하게 태자궁에 드나들어 궁내부의 흐름이라도 파악하라 했더니 가지도 않아!”

    “…….”

    “그 잘난 얼굴과 몸뚱이라도 황태자에게 들이밀어라 그리 말했거늘! 너 따위를 황태자비로 올리겠다 얼마나 투자를 했는지……!”

    체르핀 공작이 뒷목을 잡았다. 화가 치밀어 뒷목이 뻐근했다. 머리에서 흘러 내려오는 피를 닦아낼 새도 없이 소르니는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바르게 섰다. 아무 일도 없었던 모양새로. 한 번도 맞은 적 없는 척. 피를 쏟아 눈앞이 흐렸지만 굳건했다. 못 박힌 듯 서서 미동도 않았다.

    체르핀 공작이 식어버린 차를 단번에 들이켜고 소르니를 향해 찻잔을 던졌다.

    쨍그랑.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찻잔이 산산이 조각나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바로 옆에 처박혀 조각난 잔이 나동그라졌다.

    소르니는 시선을 돌리지 않고 곧게 체르핀 공작을 바라본다. 다른 곳을 보았다가 트집이 잡혀 두들겨 맞는 일은 이미 숱하게 겪어 왔던 탓이었다. 체르핀 공작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씨근덕거렸다.

    “황태자비의 자리를 빼앗겼단 보아라. 네년의 사지를 찢어발겨 태자궁의 잔디 비료로 써줄 테니. 수단과 방법 가리지 말고 네 자리를 지켜! 파텔 후작의 여식을 죽여서라도 빼앗기지 말아라.”

    “……네.”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체르핀 공작은 굳게 선 소르니를 매섭게 노려보았다가 미간을 짚어 앓는 소리를 냈다.

    피가 흘러내려 눈에 스며든다. 시야가 붉었다. 소르니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린 뒤 체르핀 공작의 집무실에서 벗어났다. 집무실 앞에서 대기하던 하녀들이 소르니를 흘겨본다. 피가 흐르고 흠씬 두들겨 맞아 드레스가 사정없이 구겨졌음에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흐트러짐 없이 꼿꼿이, 우아하게 걸었다. 찻잔 조각에 찢어진 발목에서 피가 배어 나와도 그저 걸었다.

    저택의 끝, 넓고 황량한 방에 들어서야 소르니는 문 앞에 주저앉았다.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지팡이에 맞은 부근이 욱신거리고 괴로워서 소리 없이 앓았다. 혀에서 비릿한 피 맛이 번진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소르니가 급히 몸을 일으켜 허름한 의자에 겨우 몸을 앉힌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유일한 소르니의 편. 단 하나뿐인. 하녀 멜타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소르니는 그저 미소를 지었다. 처참한 몰골에 기함한 멜타가 챙겨온 치료제를 들고 소르니에게 달려갔다. 머리에 찢어진 상처를 치료하며 멜타는 울적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아프세요?”

    “별로.”

    “거짓말. 조금만 더 견뎌요. 황태자비가 되면 이런 일은 이제 없을 거예요.”

    정말 그럴까. 소르니가 창문 너머를 내려다보았다. 닦이지도 않은 더러운 창문으로도 햇빛은 내렸다. 눈이 부셨다. 황후가 된다면, 반드시 공작을 죽여야겠다. 그러기 위해서 벨리타를 무너트릴 필요가 있었다.

    소르니는 매 순간순간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고 벨리타에게 황태자비를 빼앗긴다면 미래는 없었다. 살기 위한 발악이다. 벌레처럼 바닥을 기고 음험하게 수작을 부려서라도 살아야 했다.

    소르니가 멜타를 돌아본다. 멜타는 미소를 지었다.

    “멜타. 3일 줄 테니 태자궁의 하녀를 섭외해. 그리고…….”

    소르니가 창문 너머를 응시했다. 겨울. 뼈가 시리도록 괴로운 계절. 죽음이 드나드는 차가운 계절의 끝.

    “2황자가 행했다는 흔적을 남겨.”

    계절이 드리워지는 이는 누구일까. 소르니는 얼굴에 흐른 피를 투박하게 닦아내며 쓰게 웃었다.

    *

    태자궁을 떠나고 오웬의 바게트를 본 날에서 2일이 지났다. 라빌과 테일러는 가족 간의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아침 일찍 영지로 돌아갔다.

    오웬이 심드렁하게 순간이동으로 보내드려요? 했다가 간만에 둘이 데이트를 즐기겠다며 거절했다. 사실 조금 충격이었다. 티 한 번 내는 법 없더니 열렬히 사랑 중이었다.

    오웬과 데이비드, 벨리타는 응접실에 모여 앉아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조슈아에게서 도착한 편지를 읽던 벨리타는 답장을 쓰고 있었고, 오웬은 연구 서적을 읽었다. 조슈아의 편지를 미처 태워버리지 못한 데이비드는 벨리타에게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시비를 걸었다.

    “로틀 남작이 뭐랍니까?”

    “황태자랑 정말 결혼하냐고, 자기 휴가라고 놀아달라네.”

    “놀아줄 겁니까?”

    “요즘 바빠서. 봄에야 만날 수 있겠다고 쓰는 중. 관심 꺼, 이 녀석아.”

    “남작이 불쌍해서 그럽니다. 어쩌다 누님한테 코 꿰여선…….”

    “뒈질래?”

    훈훈한 남매의 대화였다.

    오웬은 연구 서적을 넘기며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벨리타의 허벅지에 머리를 얹었다.

    벨리타의 앞에 마주 앉은 덕에 그 광경을 실시간으로 지켜본 데이비드가 눈썹을 까딱, 들어 올렸다. 벨리타도 오웬도 덤덤하다 못해 당연한 태도였다. 벨리타의 무릎베개를 한 오웬은 평온한 얼굴로 페이지를 넘겼고 벨리타도 태연한 낯으로 편지지를 오웬의 이마에 얹어 답장을 썼다.

    오웬의 바게트를 본 날, 벨리타는 오웬에게 모든 걸 털어놓았다. 잭슨과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면 현실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다. 몸의 주인은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겠고 일기도 쓰고 있으며 그로 인해 자괴감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것. 결혼을 하면 끝날 것 같지만 소르니의 목숨이 위태로워진다는 걸 아니 섣불리 결정할 수가 없다는 점.

    당연히 오웬은 결혼을 하지 말라고 했다. 벨리타의 세상으로 돌아갈 가능성도 확실하지 않고, 돌아가지 않는다면 괜히 얽혀서 상황이 복잡해지기만 할 테니까.

    논리로 무장한 답변이었지만 혹시 모를 가능성을 배제하고 싶지는 않았다. 차라리 소설을 다 읽었더라면 소르니가 어떤 결말을 맞이하는지 알 수 있었을 텐데. 죽는 전개라면 마음이 그나마 편했을 것이다. 어차피 죽을 캐릭터일 테니까. 만약 죽지 않는 전개라면.

    오로지 벨리타 탓에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 생각에 섣불리 결정할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잭슨을 찾아가기도 요원했다. 이번에야말로 잭슨과 만난다면 혼인신고서에 도장을 찍어야 할 것 같아서.

    해결하지는 못한 고민이었지만 털어놓으니 마음만은 가벼워졌다. 그 덕에 오웬이 편해졌고 유일해졌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오웬뿐이다.

    “벨리타.”

    누워서 글을 읽던 오웬이 벨리타를 올려다본다. 벨리타는 다 쓴 편지를 대충 접어 테이블에 던져 놓았다. 데이비드가 잔소리를 하며 편지를 다시 곱게 접어 하녀에게 전달했다.

    “오늘 수업하자.”

    “그럴까?”

    오웬이 책을 덮어 배 위에 얹는다. 초롱초롱한 눈이 벨리타에게 향했다. 귀여운 짜식.

    벨리타가 오웬의 앞머리를 툭툭 쓰다듬는다. 이상하게 이틀 전부터 무언가가 빠진 느낌이 든다. 뭐지. 일은 착착 진행되는데. 대체 뭐가 빠졌을까. 기분 탓이겠지.

    오웬의 앞머리를 대충 문질러 흩어놓고는 상체를 뉘여 오웬의 배에 머리를 얹는다. 서로 기댄 꼴을 본 데이비드가 쌩 쇼를 한다며 진저리를 쳤다.

    허벅지를 들썩여 장난스럽게 오웬의 머리를 공중부양 시킨 벨리타가 소파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황실 마차가 벨리타의 집 앞에 섰다. 하녀가 부리나케 뛰어나가 편지를 받아왔다. 보나마나 황태자일 터였다. 벨리타가 편지 봉투를 뜯어 편지를 읽었다. 잭슨의 필체가 아니었다.

    [어떻게 절 버리고 가실 수가 있어요. 아가씨 미워요.]

    아이고, 세상에. 뭐가 빠졌다 했더니 엘라였다. 엘라를 버려두고 왔다. 이 기지배는 알아서 올 것이지 데리러 와 달라 편지까지 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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