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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52화 (52/150)

52화.

가슴께가 일렁이며 몽글거리는 알맹이가 생기는 감각이다. 물에 흠뻑 젖은 솜과 닮았고 녹아 버린 솜사탕과도 같았다. 벨리타는 어색하게 라빌의 손을 빼내며 자연스러워 보이려 미소 지었다. 당분간 태자궁에 돌아가지 말아야겠다, 다짐하며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가족 간의 단란한 대화를 끝마치고 오웬의 연구실을 찾았다. 짐을 옮기는 걸 도와주지도 못하고 홀라당 가 버려 마음이 쓰였다. 돌아갈 방법을 찾아내야 하기도 했고 서클을 만들기도 해야 했으니 겸사였다. 사실 머릿속이 복잡해서 의견을 구하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한탄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다.

벨리타의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는 건 오웬뿐이었으니까. 문을 두드리자 대답이 없다. 또 두드렸다. 묵묵부답이다.

열고 들어갈까, 집주인인데. 아니다. 이 나이의 아이는 문 벌컥 열고 들어가면 기겁하며 싫어한다. 거의 발작 수준으로 막 들어오지 말라고 성질낸다. 더 어린 나이였던가? 모르겠다. 아무튼 문 막 열고 들어가면 싫어한다.

나무 문에 머리를 박았다. 쿵. 속이 어지럽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제 탓에 애먼 누군가가 죽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괴롭다. 그저 소설 속뿐인데도.

그렇게까지 해서 황태자와 결혼해야 할까? 심적으로 너무 몰려 있어 이성적인 판단이 되지 않아 성급히 행동했던 것은 아닐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 딸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혼자 밥도 제대로 안 차려 먹는 웬수가 현실에 있었다. 내가 배 아파 낳은 사랑하는 웬수. 어떻게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겠어. 어떤 엄마가 그럴 수 있어.

핏기 없는 하얀 발목과 가죽으로 된 값비싼 신발을 바라보았다. 제 것이지만 제 것이 아니다.

숨을 쉬다가도, 머리카락을 빗다가도 문득문득 살을 에고 파고드는 괴리감이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보지 않으면 차라리 덜 괴로웠다. 호흡을 고르게 내쉬었다. 호흡에 무겁고 단 향이 섞여 들었다. 방 주인이라고 문 앞에서도 향이 나는 모양이다. 주먹을 꽉 쥔 손에 힘이 풀린다.

구렁이처럼 쇄골을 거쳐 어깨를 감싸는 손길이 느껴졌다. 코끝을 찌르는 축축하게 젖은 향기. 눈을 떴다. 살갗이 드러난 다부진 팔이 벨리타의 어깨를 두르고 있었다. 파드득 놀라 뒤를 돌아보려다 어깨 위에 묵직함이 얹어졌다. 오웬이 얼굴을 기대어 벨리타를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가 젖어있다. 씻고 나온 모양이었다. 방에 없었구나.

황금빛이 도는 눈에 벨리타가 비쳤다. 눈을 깜빡여야 하는 것도 잊게 만들었다. 물방울이 떨어져 옷이 젖는다. 검은 로브 너머로 드러나는 맨 살갗이 물기를 머금어 빛나고 있었다. 말을 할 수 없었다. 오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한참을 서로를 바라보았다. 차분한 노란빛의 눈에 홀려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게 했다.

“……울었어?”

낮은 목소리가 깊게 깔렸다. 심장을 두드리는 짙은 소리. 벨리타가 오웬의 팔 사이에 갇혀 안긴 채 고개를 저었다.

“내가 왜 울어.”

“그럼 왜 그러고 있어.”

“이러고 있으면 안 돼?”

보름달 같은 눈이 반달로 접힌다. 젖은 머리카락이 가닥가닥 얼굴에 붙어 흘러내렸다. 벨리타의 어깨를 붙든 손이 주황빛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린다.

“응. 안 돼.”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들어 볼을 감쌌다. 곧게 뻗은 손가락이 벨리타의 볼을 느릿하게 문지른다. 귀한 도자기를 다루듯 조심스러웠다. 얼굴에 열이 오른다.

“무슨 일 있었는지 걱정하게 되잖아.”

달다. 움츠러들게 만들 정도로 달았다. 설탕을 녹여 만든 사람일까 싶을 만큼. 남의 몸을 빌려서야 겨우 만날 수 있는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

벨리타는 타들어 가는 속내만큼 입꼬리를 올렸다. 오웬이 벨리타의 입매를 엄지로 쓸어냈다. 얼굴이 천천히 다가온다. 눈을 감았다. 호흡이 섞인다.

끼익, 문이 열렸다. 눈을 떠 보니 오웬이 평소와 다름없는 미소로 문을 열고 있었다. 머리끝까지 열이 올랐다. 김칫국을 사발로 들이켜도 유분수지. 오웬은 순간순간마다 바람둥이처럼 굴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 모든 게 가벼운 장난질인 걸 알고 있는데. 바보처럼 굴었다. 창피하다.

“들어가서 얘기할까?”

와중에 목소리는 살 떨릴 만큼 달짝지근해서 더 열이 받았다. 벨리타가 상체를 돌려 오웬의 팔뚝을 찰싹! 때렸다. 젖은 살이 찰지게 달라붙었다.

오웬이 단말마를 뱉어내자 벨리타가 콧방귀를 뀌며 후다닥 연구실 안으로 들어섰다. 존재 자체가 십구금이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벨리타 전용으로 놓아둔 일인용 소파에 털썩 앉았다. 팔뚝에 손자국이 새빨갛게 남은 오웬이 우는 체하며 들어온다. 그러게 사람을 놀리면 벌 받는다. 문이 닫혔다.

여상스럽게 입던 검은 로브였다. 오웬이 담담하게 로브를 들추어 벗자 벨리타가 터져 나오려던 비명을 겨우 삼키며 입을 틀어막았다.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긴 로브 속에 감추어진 건 타월로 허리춤만 대강 둘러놓은 나체였다. 미친 새끼 아니야, 이거! 물론 좋은 의미지만! 딸! 엄마 즐겁게 살고 있다!

로브를 대충 걸어놓은 오웬이 젖은 머리를 손으로 거칠게 털어냈다. 물방울이 우수수 떨어졌다. 워메……. 눈 돌아가게 좋은 거……. 물기를 머금은 살갗이 반질거린다. 굴곡이 완벽하게 어우러진 근육들이 움직일 때마다 물방울이 미끄러졌다. 세상에나 시부럴……. 잔뜩 섹시함을 어필한 오웬이 벨리타를 바라본다.

“그렇게 보면 부끄러워.”

보여 줬는데 그럼 어찌하나. 벨리타가 화끈거리는 얼굴을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너머로 오웬의 웃음소리가 퍼졌다. 눈 호강 했다.

힐끔, 오웬을 돌아보자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리며 허리춤에 묶어 놓았던 타월을 풀려 하고 있었다.

아니, 이건 아니다. 극락 가서 옥황상제 뺨 싸다구를 왕복으로 갈길 만큼 좋은데! 이건 아니었다.

“뭐, 뭐해!”

“옷 갈아입는데? 보면 안 돼.”

안 된다고 해도 눈은 돌아간다. 옷도 없는데 어떻게 갈아입는다고.

벨리타는 고개를 돌려 오웬의 쪽에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책상에 놓인 옷가지들이 하늘거리며 공중에 뜬다. 마법 같은 일이었다. 벨리타가 깜짝 놀라 허공에 흔들리며 이동하는 옷을 좇았다. 저도 모르게 고개가 돌아갔다.

“보지 말라니까.”

……실하다. 외국 애들은 바게트라고 하더니만. 근거가 있는 말이었다. 고놈 참 실하네. 오웬이 붉어진 얼굴을 가리며 손가락을 휘두르자 옷이 자아라도 가진 듯 오웬의 몸에 엉겨 붙었다. 가만히 서 있는데 옷이 입혀진다. 신기하고 배우고 싶었다. 나도 손가락 휘둘러서 샤라랑 뿅 옷 입을래.

손가락을 한 번 더 까딱거리며 짧은 단어를 읊자 길게 늘어진 타월이 순식간에 뽀송뽀송하게 마른다. 저것만 있으면 비 오는 날 빨래도 문제없었다. 너무 배우고 싶다.

벨리타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오웬을 바라보자 오웬의 목덜미까지 열기가 옮았다. 마법을 보고 신기해하는 눈치였지만, 오웬은 나체를 보여 버렸다.

“……봤어?”

“이야. 야, 옷이 막 움직여! 마법이지? 배우고 싶어.”

“그거 말고.”

앗. 벨리타가 입을 꾹 다물었다. 오웬의 얼굴이 더욱 새빨갛게 물든다.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오웬이 손바닥에 막혀 뭉그러진 말을 뱉어냈다.

“……너어, 이거 진짜 책임져야 해.”

“뭘 책임까지 지냐. 어차피 떠날 사람 신경 쓰지 마.”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바람둥이가 뭘. 벨리타가 콧방귀를 뀌었다. 어차피 많은 여자들한테 보여줬을 텐데. 물론 보여주고 싶은 거랑 보인 건 다르지만. 민망하고 낯부끄러워서 더 뻔뻔하게 굴게 된다.

벨리타가 어색하게 엄지를 들어 보이며 진지한 미소를 지었다. 오웬은 차라리 기절해 버리고 싶었다.

“참하니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겠고만!”

“제발 조용히 좀 해…….”

이어지는 오웬의 작은 말을 들은 벨리타가 굳어버렸다.

“남한테 보인 거 처음이란 말이야.”

아니, 뭐요? 밤에는 조신한 바람둥이, 뭐 그런 콘셉트인 건가? 벨리타는 말을 잇지 못했다. 처음을 이런 아줌마에게 보이다니 오웬도 불쌍하다 못해 안타까웠다. 이런 상황에서는 위로도 하면 안 된다. 기만이다. 말을 돌리자. 없었던 일로 하자.

벨리타는 온 힘을 모아 필사적으로 말을 돌렸다.

“돌아갈 방법은 찾았어?”

“말 돌리는 것 좀 봐.”

“아니 그럼 뭐 어떡하라고! 결혼해?! 결혼이라도 하면 되냐?!”

“응.”

오늘 오웬은 참 말도 못하게 한다. 겨울이라 뇌가 얼었나? 벨리타가 미간을 짚었다. 긴 한숨이 흘러나온다.

“결혼 못 하는 거 알잖아. 난 짝이 있다니까.”

“내가 있는데 왜 해.”

오웬이 걸어온다. 바게트밖에 생각이 안 나서 눈을 마주칠 수가 없다. 괴롭다. 좋은데 좋아서 괴로웠다. 벨리타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제발 오지 마라. 제발.

원래 세상이란 바라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소파의 팔걸이가 움푹 파였다. 오웬의 손이 팔걸이를 내리누른다.

머리 위로 깊은 목소리가 흘러 떨어진다. 귀를 간질였다.

“내가 돌려보내 줄 건데 다른 사람 찾지 마. 자존심 상해.”

손 틈 사이로 벨리타의 흔들리는 말이 새어 나왔다. 숨소리가 느껴질 거리였다. 가깝다.

“그래서 진척은 있으시고?”

“나름. 방향은 잡혔어.”

반가운 소리였다. 반갑다 못해 쌍수 들고 태극권을 출 소리였다. 벨리타가 냉큼 고개를 들었다. 내려다보는 오웬의 얼굴과 마주했다. 화들짝 놀라 소파에 상체를 깊게 파묻자 오웬이 헛기침을 하며 뒤로 물러난다.

얼굴에 열이 바짝 오른다. 손에 힘이 들어가 주먹을 펼 수 없었다. 야해가지고, 쓸데없이 실해가지고! 왜 신경 쓰이게 하는지.

큰 손으로 입가를 가린 오웬이 책상으로 고개를 돌렸다. 벨리타가 태자궁에 머무는 동안 많은 연구를 한 티가 났다. 책상이 더러웠다. 가득 쌓인 책 더미와 연구 흔적이 빼곡한 종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감동이다. 연고도 없는 자신을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 기뻤다. 벨리타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혼을 옮기거나 잇는 건 신전에서나 할 수 있는 일이야. 신의 힘을 빌려야 할 정도로 쉽지 않아.”

벨리타가 오웬의 옆에 서서 책상을 내려다보았다. 알 수 없는 기호들과 숫자들, 도형들이 난무했다. 응, 안 읽어.

부끄러워하던 오웬이 진지해진 낯으로 연구 기록들을 훑어보고 있었다. 열중하는 모습이 참 곱다. 벨리타가 덜 마른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헤집는다. 오웬의 시선이 벨리타에게 향했다가 종이 무더기로 이동한다.

머리카락에 숨은 귓가가 새빨갛다.

“마법으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데. 마법사들이 원체 또라이들이라……. 연구 기록이 있더라고. 다른 차원으로 옮기는 건 더 연구해야 하지만. 조금만 손보고 실험해 보면 가능할 것 같아.”

벨리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돌아갈 수 있다. 현실로. 사랑하는 것들이 넘치던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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