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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51화 (51/150)

51화.

무슨 소리인지. 벨리타가 표정으로 생각을 드러내자 오웬의 손이 간드러지게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빗어낸다. 척추를 타고 뒷목까지 오싹함이 타고 올라왔다. 장난기가 묻어나는 낮은 목소리가 조용히 파고들었다.

“그런 녀석에게 갈 바에야 내가 더 낫지 않나 싶은데.”

벨리타는 바보가 아니다. 눈치가 없지도 않다. 의미가 분명히 읽혔다. 놀란 벨리타를 내려다보는 시선에 다정함이 흘러넘쳤다. 장난이라는 포장지에 담아 누른 진심이라는 내용물을 보고 말았다. 오웬은 자각하지 못했지만 벨리타는 알았다.

싫지 않다. 오히려 환영이었다. 불장난을 한다면 잭슨이 아닌 오웬이 좋았다.

그래 봤자 안 되잖아. 벨리타의 짝은 잭슨이었다. 벨리타의 의견과 바람은 중요하지 않다. 소설은 정해져 있으니까. 결말은 확실했고 다른 선택지란 없었다. 사랑 놀음을 해도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속이 쓰리다. 울렁거렸다.

벨리타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눈가가 파르르, 떨린다.

“내 짝인걸.”

오웬의 웃음이 옅었다. 알면서도 암묵적으로 삼켜낸 서로의 거짓된 얼굴.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아 겨우내 억누르는 진심. 장난으로, 친밀감으로 포장된 사심을.

“너는 마음 없잖아.”

먼저 깨트린 것은 오웬이었다.

온전한 사실이었다. 길들여지지 않은 짐승 같은 잭슨보다 스스로가 낫다고 생각했다. 철저한 논리였다. 벨리타는 잭슨을 사랑하지 않았고 황태자비가 되고자 했던 이유도 사랑 외의 것이 있으리라 짐작했다.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기 전, 불장난을 할 거라면 잭슨보다 자신을 선택하는 것이 이롭다는 점도 계산 끝에 나온 생각이었다.

잭슨은 벨리타에게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지만 오웬은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었다. 함께 보낼 시간도 자신이 더 많았다. 이익을 따져 보았을 때 자신이 더 낫지 않은가.

“마음 없어도 결혼은 할 수 있어.”

적나라한 질문이었으나 답변은 더욱 노골적이었다. 이유가 있으리라 예상했다. 돌아갈 사람이 황태자비가 되겠다는 말은 어불성설이었으니. 그렇다 하면 역시 벨리타는 잭슨에게 연심을 품고 있지 않다는 뜻이 된다. 오웬의 입매가 부드러이 휘었다. 근거가 없었지만 기분이 좋았다.

“돌아가기 위한 과정?”

“눈치 좋네.”

서운하다. 벨리타가 오웬을 믿지 못하고 다른 방법을 찾아냈다는 점이. 오웬은 벨리타를 돌려보낼 능력이 충분히 있었다. 시간만 주어진다면 얼마든지 해낼 수 있었다. 자존심이 상하는 것 같기도 했다.

오웬이 벨리타의 허리를 힘주어 끌어안는다. 자신이 모든 걸 해내어 품에 안겨줄 수 있는데.

오웬은 알고 있었다. 벨리타는 지금도 굉장히 지쳐 있는 상태였고 언제든 쉽게 부스러질 모래성이다. 바람에 쓸려나가고 중력에 서서히 무너지는 모래성이었다.

위태로운 벨리타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저 다른 녀석들에게 치이고 붙들려 힘에 부치면 자신에게 투정을 부려주기만 해도 되었다. 본래의 세계에서도, 이곳에서도 할 수 없었던 응석과 투정으로 마음이 편해진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했다.

가늘게 드러난 어깨에 이마를 기대었다. 자신의 앞에서 오열하던 모습이 계속해서 눈에 밟혀서.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몇 번이고 그 고비를 넘기어 왔다는 사실이 안타까워서. 연구는 핑계였다. 연구를 하지 않겠다는 말은 아니지만. 아닌 체했지만 알고 있었다. 오웬은 벨리타를 도와주고 싶었다. 마음의 근원이 동정인지, 정인지 중요하지 않다.

넓은 등에 작은 손이 얹어졌다. 등을 쓰다듬는 손길이 무척 다정하고 부드러워서 오웬은 눈을 질끈 감았다. 숨이 막혔다. 천천히 벨리타의 어깨를 잡아 조심스레 밀어내며 오웬이 고개를 들었다. 여상스러운 미소였다.

“후작님과 후작 부인께서 기다리셔. 가 봐.”

“그래, 고맙다. 조금 있다가 봐.”

미소를 따라 벨리타도 말갛게 웃었다. 데려와 주어 고맙다며 어깨를 다독이고 경쾌한 발걸음으로 멀어졌다. 멀거니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오웬이 뒷목을 긁적였다. 수업 준비나 하자. 순간 오웬의 주위로 빛 무더기가 쏟아졌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테일러의 집무실에 가족들이 모여 있었다. 테일러의 집무실에 모인 까닭을 알게 된 것은 가족들 전부가 걱정의 말을 쏟아내고 미리 알리지 못한 벨리타의 몸 상태에 대해 연신 사과를 한 뒤였다.

한바탕 휘몰아친 대화에 겨우 정신을 차리자 다시금 대화들이 쏟아졌다. 오웬이 벨리타만 보낸 이유가 있었다.

“황태자비가 된다고 했다면서. 사실이니?”

그렇다 대꾸하니 잭슨과의 관계, 황태자비가 되고자 하는 이유, 등등을 설명해야 했다. 거짓말은 능숙하지 않아 곤혹스러웠다. 몇십 년 전에 겪어 본 상황이다. 가족들에게 결혼하겠다 말을 올렸을 때 어머니, 아버지께서 달달 볶았었다. 뭐하는 남자냐, 벌이는 어떠한가, 잘생겼나, 성격은 어떠하냐 등.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갔을 때 그리도 안 된다, 허락 못 한다, 반대를 했었다. 나이를 먹고 보니 알았다. 반대하는 이유는 명확하게 있었고 사랑에 눈이 멀어 보지 못했을 뿐이라는 걸.

얼마 가지 못할 사랑에, 그깟 헤져버릴 마음에 모르쇠 했을 뿐이었다. 가장 자신을 아끼는 가족이 반대하고 나섰다면 분명한 단점이 있었을 텐데.

지금처럼.

“전하께서 널 무척 아낀다는 건 안단다. 하지만 좋은 통치자도, 좋은 남편감도 되지 않아. 벨리타, 다시 한번 생각해 봐라. 폭력적이고 살인을 일삼는 작자는 믿을 수 없는 법이야.”

라빌의 호소에 속으로 긍정했다. 잭슨은 연인으로서는 괜찮을지 모르지만 남편으로서는 한참 부족했다.

라빌의 말이 맞았다. 기억 속의 벨리타라면 자신을 사랑하고 있으니 괜찮다, 자신에게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우겼을지도 모른다. 여느 사람들이 그렇듯 사랑에 홀려서. 혹은 가족들에게 이야기조차 하지 않았을지 모르고. 기억 속 아이는 가족의 무관심에 질려 있었으니.

벨리타라고 이 결혼을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눈을 가려줄 사랑도 없었고 돈과 권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혹시 모를 희망에 눈이 돌아 있는 탓이다. 벨리타가 수줍은 척 미소 지었다.

“하지만 사랑하고 있어요. 첩이 되고 싶지도 않고요. 잭슨, 아니 황태자 전하께서 황태자비로 만들어 주겠다 약속하셨는걸요.”

너무 심했다. 기억 속 벨리타도, 현재의 벨리타도 이런 사람이 아니다. 어떻게든 속여 넘기려 가증스럽게 웃으며 콧소리를 섞어 발연기를 해버렸다. 발도 뺨 후려치며 날 엮지 말라고 화를 내도 할 말 없었다. 진땀이 났다. 속아 줄 리가 없는데.

“……많이 사랑하는구나.”

이게…… 되네? 벨리타가 멍청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라빌과 테일러는 제 딸이 사랑에 빠져서 그렇구나, 이해해 버렸다. 사랑에 빠진 소녀를 보는 시선이었다. 수줍고 사랑스러운 소녀를. 벨리타는 어색하게 웃었다. 구석에 앉아 있는 데이비드와 눈이 마주쳤다.

역겨운 걸 보는 듯 오만상을 찌푸린다. 너도 역겹냐? 나도 역겹다. 데이비드가 토하는 시늉을 한다. 턱주가리를 콱 그냥.

테일러가 정리하지 못해 까슬까슬하게 올라온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체르핀 공작가에서는 이미 벨리타의 뒷조사를 하고 있다. 소문을 듣자마자 손을 쓰려고 한 것일 테지. 우리도 가만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소르니 공녀의 약점을 잡아야 해. 공작가가 포기할 만한 약점을.”

누명이나 음독 살해도 괜찮은 수법이라며 작게 덧붙인다. 테일러가 달라 보였다. 무서운 양반일세. 벨리타가 가자미눈을 뜨고 데이비드를 흘겨보자 어깨를 으쓱했다. 자신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아 심통이 난 듯했다. 약점을 잡고 누명을 씌우고, 살해할 방법을 고민하면서까지 결혼을 해야 할까.

고작 캐릭터이지만 자신 탓에 죽음을 맞이하는 건 마음이 편하지 않다. 소설이나 만화에서 캐릭터가 쉽게 죽어 나가는 건 그러려니 했다. 극적인 장면을 위해서니까. 하지만 자신 탓에 죽는다니. 남의 것을 빼앗으려는 자신의 책임으로 남이 죽거나 망가져야 하는 건 입맛이 썼다. 잭슨과 결혼을 해야만 현실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오웬이 도와줄 것이고 그게 더 확실한 방법일지도 몰랐다. 속이 타들어 간다.

악녀의 역할인 소르니에 대해 조금은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혼이 되어도 괜찮은지. 황태자비의 자리를 빼앗아도 소르니는 개의치 않고 살아갈 수 있을지. 알아야만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벨리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시선이 쏠린다.

“결혼은 하고 싶지만, 소르니 공녀의 자리를 뺏는 거잖아요. 파혼을 하게 되더라도 소르니 공녀에게 피해가 없을지 알려주세요.”

데이비드가 인상을 찌푸리며 소파에 상체를 기댄다.

“무슨 소리십니까. 당연히 죽거나 파문당하겠죠. 황태자 전하와 파혼했다는 말이 돌면 가문의 수치입니다. 체르핀 공작이 넘어갈 리도 없고. 소르니 체르핀 공녀는 황태자비를 목적으로 거둔 사생아인지라 목적이 다하면 버려질 게 뻔합니다.”

보면 데이비드가 제일 많이 안다. 옆에서 모르는 거 다 설명해준다고 해야 할까. 딸내미가 이럴 때 쓰는 말이 있다고 했는데. 뭐더라.

“다른 황태자비 후보들을 포기시키려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모르십니까? 불구로 만들고, 죽이고, 가문을 붕괴시켰습니다. 그 짓을 했는데도 황태자비로 만들지 못했다고 하면 얼마나 길길이 날뛸지.”

아, 맞다. 설명충. 설명충이라고 했다. 설명에 충실한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했던가. 데이비드는 까칠한 설명충이다.

단어를 찾아 개운해진 벨리타가 허벅지를 가볍게 내리쳤다. 찰진 소리에 다시금 시선이 쏠렸다가 벨리타가 뱉는 말에 모두가 턱이 빠져라 기함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볼게요. 둘이 결혼하기 전에만 파혼시키면 되잖아요.”

다른 후보들에게 그런 짓까지 했는데 도중에 끼어든 벨리타에게는 무슨 짓을 할지 감도 오지 않는다. 쥐도 새도 모르게 목이 슥삭, 잘려서 벨리타의 목이 예쁘게 포장되어 파텔 저택에 선물로 보내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벨리타로서 나쁜 일은 아니지만 죽음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몸 주인이 돌아올 수도 있으니까. 일기도 열심히 쓰고 있지 않은가.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목이 깔끔하게 떨어지면 혹시 모른다. 더군다나 남에게 피해를 끼치면서까지 결혼하면 매일 밤 편히 발 뻗고 자지는 못할 것 같았다. 그만큼 잭슨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조금 천천히 생각해도 좋지 않을까. 오웬이 있으니까.

벨리타의 말은 라빌과 테일러에게 큰 감동을 안겨 주었다. 우리 딸, 반대하니까 들어는 주는구나. 결혼 전에만 파혼시키면 되지 않냐, 라는 발언을 할 정도로 인성이 박살나다 못해 가루약처럼 빻아져 버린 점은 인지하지 못했다.

라빌이 벨리타의 손을 잡아 쥐었다. 애정이 흠뻑 묻어나는 손길이었다.

“그래,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렴. 언제나 네 편이야.”

딸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었는데. 듣게 될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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