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50화 (50/150)
  • 50화.

    “잭슨, 너 내가 이런 짓 하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어딜 선빵을 날려. 애 다치면 어쩌려고. 네가 무슨 깡패야? 싸움박질하고 싶으면 황태자 때려치우든가. 나중에 황제 돼서 다 죽이고 다녀라, 어? 아주 나라 말아먹어?”

    “……잘못했다.”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갔다. 오웬은 벨리타의 압도적인 위압감에 박수를 보내고 싶을 정도였다. 인성이 파탄 나다 못해 가루가 되도록 빻은 황태자를 어떻게 구워삶았기에 잔소리를 좀 한다고 기가 팍 죽는지. 흥미로웠다. 다른 세계에서 맹수 조련사를 한 게 아니었을까?

    남 일 구경하듯 가만히 서 있는 오웬에게 화살이 돌아간다. 벨리타의 형형한 눈길에 오웬도 움찔, 몸을 떨었다.

    “넌 애가 먼저 때렸다고 같이 싸워? 네가 애야? 말리지 못할망정 뭐 하는 짓이야. 너 뭐 하러 왔어. 애랑 싸우러 왔어?”

    “후작 부인이 데려오라고 해서…….”

    “내가 정말 그게 궁금해서 물었겠냐? 나이 먹었으면 처신을 잘하란 말이야. 그 나이 먹고 잔소리 들어야겠어?”

    “……잘못했어.”

    다부진 장정의 남자 둘을 말로 흠씬 두들겨 팬 벨리타가 콧방귀를 뀌었다. 벨리타는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여기까지 와서 애를 키운다, 키워. 답답한 가슴을 주먹으로 콩콩 두들겼다.

    잭슨이 눈썹을 늘어트리며 벨리타에게 다가간다. 벨리타의 눈이 험악하게 잭슨을 째려보았다. 잭슨이 안으려고 벌렸던 양팔을 내리며 축 처진다.

    한참을 궁시렁대며 짜증과 한탄을 쏟아내던 벨리타가 오웬에게 고개를 틀었다. 건드려서 숨 막히는 잔소리를 들을 생각이 없던 탓에 벽에 쭈그러져 있던 오웬이 화들짝 놀라 몸을 굳혔다.

    오웬은 제 어머니에게 회초리를 맞았던 기억을 회상했다. 어머니의 눈빛과 벨리타의 눈빛이 같아서 괜한 종아리가 쓰라렸다. 역시 벨리타를 볼 때 가슴이 쿵쾅거렸던 이유는 엄한 어머니와 같아서인 듯했다.

    “어머니가 나 데려오라고 했다고?”

    혼날 줄 알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오웬이 얼굴을 들었다. 살았다, 라는 심정이 낯짝에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었다. 단정한 얼굴에 그런 표정이니 꽤 귀여워서 벨리타는 꾹 웃음을 참았다. 아직도 화가 난 척 얼굴을 겨우 굳혔다.

    “어. 어머님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데리고 오라시던데?”

    “누가 네 어머님이야.”

    “우리 사이에 뭐.”

    그새 능구렁이처럼 능글거리는 미소를 짓는다. 벨리타의 기분이 나아졌다는 걸 귀신같이 눈치챘다.

    오웬이 달라붙어 있던 벽에서 떨어져 벨리타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잭슨이 빠르게 벨리타를 낚아챈다. 가녀린 몸이 휘청거리며 탄탄히 근육이 잡힌 품에 가두어졌다. 가는 목선에 볼을 맞대며 오웬을 매섭게 노려본다.

    “못 가.”

    작은 몸을 뒤에서 단단히 끌어안은 잭슨이 벨리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내 것이다. 파텔 후작 부인에게 전해라.”

    오웬은 기가 찼다. 어이가 없어서 어이가 하늘로 승천해버렸다. 누구 마음대로 사람을 그런 취급해? 물건도 아니고.

    벨리타를 보니 오웬과 같은 마음인 듯했다. 하루 이틀 듣나, 난 포기요. 하는 뉘앙스의 늘어진 태도였다. 연정을 품고 있는 반응은 아니었다. 불장난인 줄 알았는데 황태자에게 코 꿰여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경계하는 듯 사나운 맹수의 기운을 흩뿌리는 잭슨의 머리에 벨리타의 손이 얹어진다. 대충 슥슥 문지르자 잭슨의 낯이 마법처럼 평온해졌다. 아, 조련이구나. 동물과의 교감을 느끼고 길들이는 애정이라고 결론지었다. 강아지 키우는 기분으로 잭슨을 대하고 있구나.

    오웬은 하마터면 벨리타의 큰 배포에 기립 박수를 칠 뻔했다. 야생의 황태자를 길들이는 애 엄마라니 가히 남다르다고 할 수 있었다.

    “근데 네가 어머니를 어떻게 알아?”

    “어머님 아버님 수도로 오셨던데? 너 없이 상견례 했지 뭐.”

    상견례. 가벼이 툭 뱉은 말에 벨리타와 잭슨의 얼굴이 경악에 물들었다. 미친 새끼 아니야? 폭탄발언을 한 오웬의 얼굴은 태연하고 덤덤했다.

    벨리타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자 잭슨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숨이 막히게 끌어안는다. 컥, 잭슨의 팔을 두드려도 힘은 풀리지 않는다. 오웬의 생각을 당최 알지 못하겠다. 무슨 심보로 상견례라는 단어를 올리는지.

    물론 마음대로 결혼할 수 있다면 오웬이었다. 불가능하겠지만.

    벨리타는 충격적인 단어를 떨쳐내고 라빌과 테일러의 행방을 떠올렸다. 아마도 데이비드가 보낸 몸 상태에 대한 편지를 받아 놀라서 달려온 것이었을 터였다. 혼비백산해서 올라왔겠지. 여간 속이 탔을 게 아니었다. 같은 부모의 마음으로 얼마나 걱정되었을지 짐작이 됐다. 얼굴을 비춰야 했다.

    돌아가야겠다, 입을 열려는 순간 잭슨이 잔뜩 심통 난 말투로 속삭인다. 허리와 어깨를 감싼 팔에 잘 짜인 근육이 꿈틀거렸다.

    “저 새끼는 무엇인가.”

    벨리타가 입을 열었지만 오웬의 말에 가로막혔다.

    “없어선 안 될 소중한 사람.”

    미친 새끼인가, 진짜? 두 번이나 말이 씹힌 벨리타가 인상을 구겼다. 오웬은 퍽 즐거워 보였다. 단정한 눈매가 가늘게 접힌다.

    장난기 가득한 대답에 잭슨은 단단히 열이 받은 듯 벨리타를 끌고 뒤로 물러났다. 물러난 만큼 오웬이 다가섰다. 잭슨이 경고가 짙게 깔린 서늘한 눈으로 오웬을 쏘아본다. 오웬은 개의치 않는 태도였다.

    잔뜩 혼이 나 단검을 꺼내거나 무력을 휘두를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나마 잘된 일이었다. 벨리타는 몸을 옥죄는 답답함이 버거워 잭슨의 팔을 여럿 두드렸지만 응답은 없었다.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차가웠다.

    “무슨 관계지?”

    “내 비밀스러운 신체 부위를 허락한 사이.”

    “…….”

    “부모님께 딸을 잘 부탁한다, 인사 받은 사이?”

    반복되어 답변의 기회를 빼앗긴 벨리타는 기절할 뻔했다. 오웬이 입을 열 때마다 폭탄 발언이 잇달아 터져 나왔다. 혼미해진다.

    물론 가슴을 만지기는 했지만! 좋기는 했지만! 또 만지고는 싶지만!

    아무렇지 않게 싱글싱글 웃으며 잭슨의 배알을 꼴리게 하는 발언은 위험했다. 잭슨은 눈 돌아가면 목을 조른단 말이다. 북극곰은 사람을 찢고, 잭슨은 목을 조르고.

    분개한 손이 벨리타의 어깨에서 떨렸다. 핏줄이 퍼렇게 섰다. 목에 얼굴을 파묻은 탓에 눈을 볼 수는 없었지만 벨리타는 이쯤 되어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눈이 돌았을 것이다. 사고 치기 전에 막아야 했다. 피를 보는 것은 언제나 벨리타였기에.

    즐거워 보이는 오웬을 째려본 뒤 잭슨의 뒤통수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달랬다. 달래질지는 미지수였다.

    “스승이야. 마법 스승.”

    “……뭐?”

    “서클 만들어야 해서.”

    무슨 의미인지 짐작도 하지 못했다. 고개를 들어 벨리타와 시선을 마주한 잭슨의 눈매가 접혀 미간을 찌푸린다. 설명을 요구하는 손이 벨리타의 어깨뼈를 붙들었다. 오웬을 흘겨보니 끼어들지 않겠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시작은 자기가 해놓고서 빠지겠다는 태도였다. 넌 나중에 죽었어.

    벨리타는 크게 숨을 내쉬며 대강의 몸 상태를 설명했다. 신력과 마력이 충돌해서 어쩌고저쩌고. 잭슨의 얼굴이 점점 파리하게 질렸다.

    그래서였던가. 죽음을 맞닥뜨려도 초연했던 이유가. 며칠을 앓아누웠던, 하얗게 식어 있던 얼굴의 원인이. 신력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시체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그리 생각하니 아연해졌다. 심장에 돌이 내려앉는 감각이었다. 가슴이 무거워 버거웠다. 벨리타를 잃을 뻔했다는 생각이 묵직하게 잭슨을 짓누른다. 다행이었다. 죽지 않아서.

    끔찍한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앙상한 몸이 얼마나 버거웠을지. 벨리타를 소중하게 고쳐 안는다. 납득하고 싶지 않지만 오웬의 존재를 인정해야 했다. 없어서 안 될 사람이며 떼어놓아서도 안 될 목숨 줄. 벨리타만을 들인 자신의 태자궁에 오웬을 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벨리타를 보내주어야 한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오매불망 기다리는 일은 성미에 맞지 않다.

    제 눈앞에서 다른 ‘것’과 단란히 떠드는 모습을 보면 속이 뒤틀려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그렇다 한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둘이 시간을 보낸다고 생각하니 격한 분노가 치민다. 잭슨이 벨리타를 바라보았다. 마음대로 되는 게 단 하나도 없었다. 가둬두고 싶어. 다른 것들과 같은 공기를 마시게 한다는 자체에도 때때로 분개하는데, 참아낼 수 없었다.

    “뚫어지겠네.”

    오웬이 툭, 말을 뱉었다. 잭슨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오웬이 벨리타에게 다가가 앞에 섰다. 잭슨의 품에 안겨 있는 벨리타가 오웬을 올려다본다.

    경계하며 잭슨이 뒤로 몸을 물리자 가늘고 단단한 손가락이 벨리타의 곱슬머리를 느슨하게 쥐었다. 손가락 틈새로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오웬이 천천히 상체를 숙여 벨리타와 시선을 마주한다.

    “벨리타. 나랑 돌아가자.”

    주황빛의 머리카락이 오웬의 불그스름한 입술에 닿는다. 집요한 눈길이 벨리타를 향했다. 부드럽고 상냥한 권유였다. 붉고 탐스러운 입술이 벨리타의 머리카락을 내리누르며 움직였다. 뒤통수까지 기분 좋은 오싹함이 기어 올라왔다.

    “가족이 기다려. 나도 널 기다리고 있고.”

    허리가 꽉 조여 온다. 잭슨을 올려다보자 노여움에 사정없이 구겨져 있었다. 벨리타는 잭슨의 팔뚝을 부드럽게 쓸어냈다. 시선이 맞닿았다. 부탁이 있을 때 잭슨은 상냥하게 대해야 말을 듣는 아이다. 벨리타는 잭슨을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했다. 눈을 접어 웃었다. 매번 하기엔 번거롭고 귀찮아서 하기 싫었지만.

    “가야 해. 가족에게 황태자비가 되고 싶다고 말도 전하고 올게. 다시 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못 기다려.”

    “이 정도는 기다려야지. 착하게 기다리고 있으면 선물 챙겨올게.”

    서러워한다. 미련이 흘러내린다. 차마 벨리타를 놓을 수 없었다. 벨리타 스스로가 느슨해진 잭슨의 팔을 떼어내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순순히 놓아주는 잭슨을 향해 벨리타가 작게 속삭였다. 착하다. 나긋하게 속삭인 그 말이 황홀해서 붙잡을 수도 없었다. 으레 그랬듯 구질구질하게 매달려서 가지 마라, 애원하지 못했다.

    벨리타는 오웬의 앞에 붙어 섰다. 내밀어진 손을 맞잡는다. 오웬이 벨리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잭슨을 바라보았다. 여러 속내가 뒤섞인 알 수 없는 눈이었다. 순간 오웬과 벨리타에게서 빛이 쏟아졌다. 눈이 시릴 정도의 빛이 버거워 눈을 감았다가 뜨니 둘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잭슨 홀로 남아 벨리타가 서 있던 허공을 허망하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

    눈 깜짝할 새 타운하우스였다. 비유가 아니다. 눈을 감았다가 뜨니 응접실이었다. 신기함과 당황스러움에 벨리타가 멍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머리 위에서 웃음소리가 터진다. 오웬은 벨리타를 놓을 의향이 없어 보였다. 당연하게 그대로 벨리타를 안고 있었다. 한 손으로는 손을 마주 잡고, 어깨를 감싸 안은 채로. 벨리타가 고개를 들었다.

    “황태자랑 무슨 사이야?”

    “왜?”

    “난 기회가 없나 해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