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49화 (49/150)

49화.

고집도 소뿔을 꺾어서 탕 끓여먹을 쇠고집이었다. 벨리타를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간다.

벨리타가 옅게 마른기침을 했다. 압박감이 상당해서 괴로웠다. 버둥버둥, 온몸을 뒤흔들어 잭슨을 떼어놓으려 해도 어림없었다. 벨리타가 꽉 막혀 답답한 목으로 겨우 소리친다.

“꺼져!”

“보내주면 돌아오지 않을 거잖나.”

귓가에 닿는 숨과 말이 소름 돋는다. 집착은 질색이다. 완벽히 제압당한 벨리타가 씨근덕거렸다. 좀 나아졌다 했더니 티끌만큼 나아진 거다. 짜증이 났다. 간다면 보내주지 왜 그리 매달리는가. 서로 피곤하기만 한데.

벨리타가 갓 잡은 활어처럼 펄떡댔다. 잭슨의 눈에 광기가 빛난다. 이거 또 눈깔 돌아가지고. 매가 약이지만 손이 봉해지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대가리.

돌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벨리타의 이마가 잭슨의 이마를 향해 돌진해 들이박았다. 눈앞이 핑 돌아 잭슨이 나가떨어졌고 벨리타는 짓눌리는 압박 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벨리타의 머리도 핑핑 돌았다. 잭슨의 대가리는 돌기만 하는 줄 알았더니 단단하기도 했다. 돌대가리였다. 벨리타의 왼손에 잠들어 있는 사랑의 매가 다시금 울부짖었다.

짜악, 짝! 매타작이 이어진다. 잭슨의 단말마도 함께 퍼졌다. 벨리타가 라스트 팡으로 손을 높게 치켜드는 순간 집무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벨리타!”

손에 불을 품고 있는 다급한 얼굴의 오웬이었다.

황태자를 매타작하고 있는 벨리타와 바닥에 고꾸라져 매질을 맞고 있는 제국의 황태자.

저 새끼는 왜 처맞고 있어. 황태자 아니야?

오웬은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장차 황제가 될 사람의 적나라한 추태를 본 티를 내기에도 애매했다. 주먹을 쥐자 손에서 뿜어내던 불이 흔적도 없이 수그러들었다.

열이 잔뜩 올라 태자궁을 불바다로 만들고 가루를 만들어서라도 벨리타를 데려오고자 이를 뿌득뿌득 갈고 왔는데. 김이 팍 새버렸다.

“어…… 그럼…… 좋은 시간…… 나누시고…….”

벌컥 열었던 문을 스르르 닫으며 밖으로 몸을 빼냈다. 오웬의 얼굴에 난감함이 서린다. 전혀 알고 싶지 않았고 보고 싶지도 않았던 황태자의 두들겨 맞는 모습이었기에. 성격 더러운 잭슨이 얼마나 길길이 날뛰며 칼을 휘두를지도 모르고. 예정된 폭군 아니던가. 남한테 두들겨 맞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여줘도 태연할 만큼 수치를 모르지도 않을 테지.

오웬이 문을 거의 다 닫아 머리카락만 빼꼼 보일 즈음에야 벨리타가 아는 체를 해왔다.

“오웬?”

“어. 아는 척하지 마. 하던 거 해, 하던 거.”

문이 완벽하게 닫혀 손잡이만 놓으면 되는 순간이었다. 벨리타가 문을 벌컥 열었다.

“왔으면 인사라도 하지 왜 나가고 그래?”

“으아아, 마저 하던 거나 하라고~!”

등을 지고 있는 벨리타는 모르겠지만 잭슨은 오웬을 찢어 죽일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얻어맞는 꼴을 보이기 창피하긴 하겠다.

오웬은 결코, 결단코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세르트제 제국의 황태자가 맞으면서 행복해 보였다는 건 전혀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이기도 했다. 행복한 시간을 방해하는 자신을 원망하고 있다는 상황도 절대 인지하고 싶지 않았다.

벨리타를 얕보았다. 머리를 죄 쥐어뜯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태자궁에 갇힌 가련한 벨리타를 생각했던 오웬 스스로가 우스워졌다.

그렇지. 사람 안 가리고 매타작을 하는 벨리타가 벨리타지. 애 엄마라더니 한두 번 훈육한 손길이 아니다. 이런 모습을 꽤 사랑스럽다고 여기고 있지만. 아니, 뭐라고? 내가 뭐 어쨌다고? 오웬은 혼란스러워졌다.

오웬은 손잡이를 잡아당겼지만 벨리타도 손잡이를 잡아당겨 문이 이리저리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했다. 우스운 꼴이었다.

오웬은 한숨을 내쉬며 손잡이를 놓았다. 당기던 힘이 사라지자 벨리타가 제힘에 못 이겨 뒤로 고꾸라진다. 오웬과 잭슨이 동시에 벨리타를 향해 뛰어가 손을 뻗었다.

여리고 가는 몸이 섬섬옥수 위에 가벼이 얹어진다. 벨리타의 머리카락이 하늘거리며 허공을 흩뿌리고 꽃의 단 향이 퍼져나갔다. 가는 허리가 팔에 감싸여 끌어당겨졌다.

“어, 고마……워.”

“조심 좀 해.”

벨리타를 품에 끌어안은 오웬은 다디단 꽃의 향기에 질식할 것 같았다. 에메랄드빛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다 고맙다며 사르르 웃는 눈가가 녹아버릴 듯 부드러웠다. 벨리타를 감싼 팔이 저리다. 굳어버린 것 같았다.

오웬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 감각은 뭐지? 심장이나 뇌에 문제가 생긴 걸까. 현대 의학으로 고칠 수 있던가? 어디서 저주라도 얻어왔나?

분석하고 싶다. 낱낱이. 벨리타의 단 향이 폐부까지 가득 차 숨이 막히는 감각도, 거세게 뛰는 심장도, 활발히 돌아갔던 뇌가 굳어지는 멍청한 느낌이 무엇인지 원인과 결과를 도출해내고 싶어졌다.

아마도 원인은 벨리타겠지.

가정이 있는 유부녀이겠지만 돌아가기 전까지 곁에 붙어 연구하고 싶었다. 도와주는데 그 정도는 해도 되지 않나. 연구 정도는 괜찮다. 정신승리였다.

“놔라.”

벨리타를 품에 안지 못한 패배자 잭슨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오웬이 잭슨을 쳐다보며 벨리타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놓으라니까 놓아주기 싫은 청개구리 심보다.

당황하는 벨리타의 눈길이 정처 없이 헤매었다. 가슴팍에 얼굴이 닿는다. 말랑딱딱한 그 가슴이. 만져 보았으니 더 곤혹스러웠다. 얼마나 탄탄한지 알아서 더 당황스러웠다.

아따 좋은 거……. 벨리타는 귀한 좋은 시간을 굳이 내다버릴 만큼 바보가 아니었다. 이때가 아니면 언제 마음에 쏙 드는 남정네의 품에 안겨 있으랴. 심지어 상대방이 먼저 안아버린 것이니 벨리타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저 가만히 숨 막히게 압박하는 가슴을 느끼며 품에 안겼다. 황홀경이었다.

잭슨의 표정이 더욱 사나워졌다. 황태자의 명을 거역한 정체 모를 사내에게 벨리타를 빼앗아오고 싶었다. 내 것이다. 잭슨의 것이었다. 다른 것의 품에 안길 하찮은 것이 아니다. 오롯이 자신이 소유해야 했다. 잭슨이 품에서 단도를 꺼내 들었다.

화려한 옷 안쪽에서 드러난 날카로운 단도를 본 벨리타가 기함했다. 미쳤어. 오웬의 가슴팍에서 떨어지지 않은 채 벨리타가 단호하게 소리쳤다.

“미쳤어?! 그게 뭐라고 꺼내, 꺼내긴!”

“벨리타, 이리 와.”

한 손에 단도를 들고 남은 한 손이 벨리타를 향했다. 그 자세만으로도 황태자임이 만연히 드러났다. 흠 없이 잘 다듬어진 조각상과 같았다.

벨리타는 오웬의 팔을 단단히 붙들었다. 칼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저 남자가 대체 뭐기에. 자신보다 더 의지하는 것 같은지. 머릿속이 끓어 뇌가 타버리는 감각이었다.

“그딴 걸 들고 있는데 내가 왜 가?! 미쳤냐?”

일그러지는 잭슨의 표정과 대비된 오웬의 낯짝은 의기양양했다. 잭슨의 심기가 뒤틀리기 시작한다. 오웬을 죽이고 벨리타를 되찾아와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잭슨이 빈손을 벨리타에게 뻗어 두어 번 까딱인다.

“넌 나의 사람이잖나. 나에게 와.”

나의 사람. 즉, 연인. 오웬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유부녀 아니었나? 딸이 있다고 했지 않았던가? 이곳에 와서 바람이란 걸 피워보는 건가? 뜨거운 장난질?

오웬은 궁금한 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고개를 숙여 벨리타에게 작게 속삭였다. 귓가에 닿는 숨이 간지러워 벨리타가 움츠러들었다. 분노에 찬 잭슨의 몸이 가늘게 떨린다.

“벨리타, 황태자랑 불장난하는 거야?”

“뭐?”

“유부녀잖아, 너.”

“남편 없는데?”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다. 다 자란 아이는 있는데 남편이 없다? 죽었나?

오웬이 놀란 낯을 했다.

그럼…… 나도……. 음? 나도 뭐?

오웬은 알 수 없는 감정이 생소해서 인상을 찌푸렸다.

퍽 다정한 모양새로 서로를 껴안고 귓속말을 소곤거리는 둘을 보니 잭슨의 뱃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분노를 참을 수 없다. 화를 내고 감정대로 휘두르면 분명 벨리타가 혐오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화가 나서 초연할 수가 없다.

내 거잖아. 나의 것이잖아. 혼인하고자 했지 않나.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눈앞이 새카맸다. 질투인 줄도 몰랐다. 배워본 적 없는 감정이었기에.

잭슨이 소리 없이 뛰어들어 단도를 휘둘렀다. 정확히 급소를 노리는 칼날을 피해 오웬은 벨리타를 단단히 붙들어 안아 고개를 숙였다. 로브 후드 자락이 깔끔하게 베어 갈라졌다.

천을 가볍게 찢어낸 칼날이 빠르게 목덜미로 드리워졌다. 피할 새도 없이 순식간이었다. 잘 벼려진 단도는 스치기만 해도 살갗을 그어 피를 뿜어낼 테다.

오웬은 입을 열 여유도 없어서 속으로 주문을 읊었다. 목을 겨냥해 정확히 내리꽂히던 날붙이가 단단한 것에 긁히는 괴기한 소리를 내며 튕겨 나갔다. 잭슨이 한 걸음 물러난다.

“너…… 마법사로군.”

보이지 않는 것에 갈려 나간 칼끝을 훑으며 잭슨이 이죽거렸다. 칼질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손잡이를 단단히 고쳐 쥔다.

“방어계 아티팩트인가? 무영창이라면 꽤 능력이 좋은 마법사겠군.”

“그런 게 중요합니까? 소문대로 불같으시군요.”

오웬이 벨리타를 놓아주며 작은 소리로 읊는다. 혹여 피해를 입힐까 봐 걱정되어 쉴드를 둘러놓은 것이다. 폭탄이 날아와도 멀쩡할 쉴드를 두른 벨리타는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어정쩡히 섰다.

잭슨이 오웬에게 칼을 휘둘렀다. 죽이려고. 벨리타를 도와줄 수 있는 거의 유일무이한 사람을 죽이려고 했다.

벨리타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뒷목에 머리털이 쭈뼛 서는 감각이었다. 현실로 돌아가게 해 줄 거의 유일한 가능성이다. 오웬을 잃을 수 없다.

단도를 쥐어 단번에 목을 그을 자세를 취한 잭슨과 양손에 푸른 불을 쥔 오웬이 대치 중이었다. 살기가 흐르는 공기였다. 사고가 나면 안 된다. 오웬이 다쳐서는 안 되었다. 다급한 마음에 벨리타가 냅다 소리를 지른다.

“둘 다 그만 안 둬?!”

시선이 벨리타에게 꽂힌다.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여전히 단도를 그러쥐고, 불을 품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구두 굽이 바닥에 맞부딪히는 소음이 퍼졌다. 또각, 또각. 천천히 걸어 다가온 벨리타가 둘의 사이에 섰다.

“뒈질래?”

둘보다 살기등등했다. 형형한 푸른 눈을 사납게 뜬 벨리타가 둘을 번갈아 쏘아보았다. 잭슨과 오웬의 기세가 누그러졌다. 무엇보다 벨리타가 가운데에 끼어 있으니 섣불리 공격을 가할 수도 없었다.

일부러 둘의 사이에 끼어든 게 맞았다. 잭슨은 벨리타를 이런 식으로 해치고 싶지 않을 터였고, 오웬은 벨리타를 해할 놈팡이가 아니었다. 벨리타는 둘에게 영향력을 끼친다는 사실을 알았다.

“칼 내려놔. 너도 불 안 꺼? 다 태워 먹을 거야?”

움찔, 잭슨이 칼을 든 손을 서서히 내렸다. 잭슨의 단도가 품으로 돌아간 것까지 확인한 벨리타가 오웬을 살벌하게 노려본다.

기세에 못 이겨 오웬이 한숨을 토해내며 손아귀에 쥔 불을 껐다.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둘의 전투 의지가 박살 난 걸 확인한 벨리타가 짝다리를 짚는다. 황태자보다, 차기 마탑주보다 권위적인 태도인 벨리타가 인상을 구겼다.

“이것들이 미쳐가지고. 어디서 싸움질이야?”

0